"왕유의 선시는 곧 한 폭의 그림이다"

鳥 鳴 澗
조  명  간

人閑桂花落(인한계화락)사람은 한가롭고 물푸레나무 꽃잎 사뿐히 떨어지는데

夜靜春山空(야정춘산공)밤은 깊어 봄 날의 산은 텅 비었네.

月出驚山鳥(월출경산조)떠오르는 환한 달빛에 산새들 놀랐음인가

時鳴春澗中(시명춘간중)때때로 산새들 울어대는 봄날의 개울가.


<새우는 개울가(鳥鳴澗)>는 선적인 적정의 경계를 묘사한 왕유의 선시들 중에서도 명편으로 꼽히는 시다. 대자연에 대한 섬세하고 치밀한 체험을 담고 있는 이 짧막한 시의 시심(詩心)은 한 폭의 수묵화를 방불케 하는 청신담아(淸新淡雅)함과 한 편의 소야곡 같은 편안하고 고요하며 그윽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5언 절구인 <조명간>은 왕유의 산수시 <황보악운계잡제오수(黃甫岳雲溪雜題五首)>중의 제1수다. 황보악은 왕유의 친구이고 운계는 황보악의 별장이 있던 곳으로 현재의 강소성 단양이다. 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황보의 가문 중 한 지파가 윤주 단양군에 살았다고 한다. 왕유는 당 현종 개원 28년(740년) 전중시어사로 영남지방에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윤주(현 강소성)에 들러 와관사(瓦官寺)의 선(璇)선사를 배알했다. 그의 시집에 <알선상인(謁璇上人)>이라는 시가 실려 있다. 이 때 윤주 단양에 있는 친구 황보악의 별장에도 들러 <조명간>이라는 시를 지었다.
시의 첫머리에 내민 ‘인한(人閑)'은 곧 시인 자신의 심경이다. 이 두 글자는 시의 전편을 관통하는 ‘눈알'이다.
‘한'은 한적함, 즉 적정(寂靜)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일체의 번뇌 · 근심이 없음을 상징한다. 시인은 산거(山居)하고 있으면서 번뇌나 근심이 전혀 없다. 차마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시인의 심경은 오직 유한(悠閑)할 뿐이다.
사람은 정적인 환경과 정일(靜逸)한 심정이 되면 아주 작은 자연의 성음과 동태에도 민감해 진다. 시인은 이런 정황에서 계화 꽃잎이 사뿐히 떨어지고 있음을 감각적으로 느꼈고, 마치 꽃잎들이 자신의 옷 위에 내려와 앉는 듯한 촉각을 어루 만지고 있다.
또 꽃잎을 날리는 미풍 소리까지도 들리는 듯한 느낌이다. 아마도 분분히 날리는 꽃잎이 시인의 폐부에 까지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겠지만 시인은 이런 세부적 묘사를 하진 않고 독자들의 상상에 맡겼다. 계화(桂花)는 물푸레나무 꽃으로 향기가 짙고 황색과 백색이 있으며 추계 · 춘계 · 사계계(四季桂)로 분류한다. 이 시에서의 계는 춘계, 또는 사계계다.
봄날 밤의 산에는 많은 경물들이 있다. 시인은 단지 조용히 떨어지고 있는 계화 꽃잎을 묘사해 독자들을 정일 유아(幽雅)한 경계로 인도한다. 계화의 표락(飄落)은 시인으로 하여금 봄날 밤에 만뢰무성의 적정을 느끼게 한다. 시인은 또 밤의 적정으로 인해 봄산에서 격외의 공(空)을 각득(覺得)한다.
시의 앞 두 구는 대칭의 인과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사람이 한적하기 때문에(人閑) 꽃이 떨어지고 있음(花落)을 인지하고, 꽃이 떨어짐으로 인해서 밤이 고요함(夜靜)을 느끼고, 야정으로 인해 산이 텅 비어 있음(空山)을 깨닫는다. 시의(詩意)가 마치 매미 울음 소리가 이어지듯이 연이어 계속되는 인과의 순환을 보여준다. 봄날의 밤 적막한 산 중에서 사뿐히 내려앉듯 떨어지고 있는 계화 꽃잎은 정취와 운치를 한껏 돋운다. 시구는 물흐르듯 연결되면서 독자들에게 율동 만점의 음악적 미감을 느끼게 한다.
뒤의 두 구는 이 때 홀연히 둥근 달이 구름을 뚫고 떠오른다. 유백색의 달빛이 산림을 환하게 비추어 캄캄한 밤인 줄 알고 잠자던 개울가 산새들을 놀라게 한다. 일반적으로는 월출이 새를 놀라게 했다고 말하진 않는다. 여기서 “산새들이 놀랐다”는 표현은 극한점에 다달은 춘산의 적정을 나타나기 위한 묘사다.
새들의 울음소리는 공곡(空谷)에 메아리 치면서 잠시 춘산의 적정을 깬다. 동시에 이같은 정경은 춘산의 맑고 그윽한 공적(空寂)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공적'은 만물이 모두 실체가 없고 상주(常住)가 없음을 뜻한다.
화락 · 월출 · 조명(鳥鳴)과 같은 봄날 밤 산중 경물의 소리와 동태는 독자들을 극한의 청유(淸幽) 정일한 경계로 진입시킨다. 이는 동(動)과 정(靜)이 서로 의존하는 변증법적 관계를 활용한 기법이다 ‘동"으로서 “정”을 드러내고 소리로서 조용함을 부각시키는 예술적 표현 기법이기도 한다. 앞의 3개 구는 화락 · 월출의 동태를 통해 봄날 달 밝은 밤의 고요를 나타냈고 마지막의 제4구에서는 새들의 지저귐을 통해 고요를 깨는 반츤법을 구사했다. 동에 기탁한 정과 성(聲)을 내세워 부각시킨 정은 '죽어 있는 고요‘와는 다른 생동하는 고요로서 한층 더 깊고, 그윽하고, 고적한 경계를 창조해 냈다.
소동파는 왕유의 시와 그림을 평하길 “시 가운데 그림의 운치가 서려 있고 그림에는 시의가 들어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절찬했다. 소식의 지적대로 왕유의 시는 형상성이 뛰어나 청대 신운파(神韻派)들은 왕유를 신운의 비조로 추종했다.
왕유의 전원 산수시는 선명한 색채미와 입체감이 있어 마치 수채화나 수묵화를 대하는 듯한데 무엇 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의 시에는 문인의 격조와 의경(意境)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시에 나타난 또 하나의 특징은 시정 · 화의와 더불어 선의(禪意)가 깃들어 있다는 점이다.
왕유는 많은 시에서 ‘공'과 ‘정'의 의경을 창조해 냈다. <조명간>의 정적인 의경에는 담박 아담하면서 온유미(溫柔美)가 흘러넘치는 봄날 밤에 느끼는 온화하고 편안한 삶의 의지가 솟구치고 잇다. 우리는 이같은 시인의 마음 속 희열을 완상하면서 자연히 그 기분에 도취하게 되고 시인의 삶에 대한 열정, 자연에 대한 사상과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당시(唐詩)연구가인 중국 진윤길(陳允吉) 교수는 『논왕유산수시중적 선종사상(論王維山水詩中的 禪宗思想)』이라는 논문에서 《대반열반경》의 “산속 개울가에서 메아리쳐 되돌아오는 소리를 듣는 어린 아이가 그 소리를 실제 소리라고 하나 지혜 있는 사람은 그 소리의 실상이 없음을 이해한다”는 이야기를 인용해 왕유의 <조명간>은 불교의 허환적회(虛幻寂灰)사상을 자연 경물을 빌어 기탁한 시라고 보았다. 즉 종교 이념이 시인의 예술 사유에 침투해 작품에서 내재적 의온(意蘊: 의식 · 사상)으로 자리한 예라는 것이다.
왕유는 이 시에서 불학을 강의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미를 추구하고 있으며 그 미를 창조하기 위해 깊고 신비스러운 예술 표현을 구사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왕유의 산수시의 자연 의상(意象)들 속에 불교 사상이 들어가 있지 않다고 부인 할 수는 결코 없다.
그는 시심을 통한 객관적 자연미를 재창조하기 위해 자신이 믿는 불교 이념의 공무(空無)사상에 반대 되는 ‘발랄한 생기'를 드러내 강조하기도 한다. <조명간>의 경우 시인은 자연과 세계 · 인생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집착을 우의적으로 드러냈다. 이같은 출세 지향 사상은 세상 만사를 허환으로 보는 불교 사상과는 분명히 대립되는 것이다. 왕유의 산수시에서 시정 화의와 선리(禪理)의 관계는 전면적으로 변증법적 인식을 통해 시 가운데의 심층적인 선종사상을 찾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시들의 아름다운 심미 속에 녹아들어 있는 불교 이념을 파악할 수 없다. 일단 왕유의 시들은 시경(詩境)이 선경(禪境)보다 우세하다고 볼 수 있다.

 

왕유의 생애

왕유는 어릴 때부터 재주가 비상한 천재였다. 9살 때 시문을 지었고 19세에 해원(解元)으로 선발 됐으며 21세 때 진사과에 급제했다.
또 음악에 대한 조예가 있어 대악승(大樂丞)벼슬을 역임하기도 했다. 36세 되던 해인 개원 24년 이임보가 득세해 좌지우지하자 정계서 은퇴, 61세 때까지 망천에 은거해 참선 수행을 하면서 뛰어난 산수 전원시와 문인화를 짓고 그렸다. 그의 불교 신앙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의영향을 받은 모태 신앙이었다.
성당 시단에서 그는 두보 · 이백과 이깨를 나란히 하는 대가였다. 1백여 수에 이르는 산수 전원시는 대표적인 그의 시가 예술의 성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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