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종교

무엇을 태우고
태워보내는 능력
다양한 의례에 접목
인간과 신성의
매개역할

지난 8월 6일 지구촌의 축제, 올림픽이 브라질 리우에서 개막되었다. 1928년 암스테르담 대회 이래 줄곧 올림픽의 시작과 끝을 여닫는 주인공은 다름 아닌 불이었고, 그 점화 및 소화의 기법과 방식은 올림픽의 또 다른 화젯거리이자 볼거리였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부턴가는 멀리 그리스의 헤라신전에서 성화를 채화하여 봉송을 거치는 불의 대장정 릴레이가 추가되었고, 그것은 인류를 위해 신들의 나라 올림푸스에서 불을 훔쳐온 저 위대한 영웅 프로메테우스가 벌인 문명의 도둑질을 모방한 레이스라는 데에 이견이 없다. 문명을 가르는 불, 바로 그 불을 사용했다는 직립인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의 남겨진 유골이야말로 인류에게 불을 선사한 신화적 프로메테우스의 역사적 흔적이리라.

미국 뉴욕 록펠러센터의 황금 프로메테우스 동상.

불은 필요불가결한 삶의 일부이면서도 일상을 뛰어넘어 자연과 우주의 본질적인 차원으로 의미화되기 일쑤였다. 만물의 본질을 ‘물’로 꿰뚫고자 했던 탈레스에 비해, 헤라클리투스는 우주만물의 영원한 변화의 이치와 질서를 ‘불’의 유비를 통해 이해하고자 했다. 만물이 불에서 비롯되었다는 불-결정론을 억세게 밀어붙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불을 지렛대 삼아 우주의 본질을 파악하려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동양 의학·풍수 등 이해 큰 축 인식
인간의 몸ㆍ땅ㆍ하늘을 관통하는 5가지 요소를 특유의 오행론으로 완결시킨 동양의 사고에서도 불 (火)은 나무(木)에 의해 나고 다시 땅(土)을 낳는, 물(水)에 지면서도 쇠(金)를 이기는 상생상극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방위로는 남쪽, 계절로는 여름, 신체로는 심장, 도덕적 가치로는 예(禮), 색깔로는 적색, 띠로는 말, 맛으로는 쓴맛 등을 지시하는 한 축으로서 복잡다단한 동양의 의학ㆍ풍수ㆍ천문ㆍ윤리 등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주요한 구성요소였다.

불은 신성 자체 혹은 신의 현현으로 이해되어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인도 리그베다에 등장하는 불의 신 아그니(Agni)가 그렇고, 화덕과 난로의 신인 그리스의 헤스티아(Hestia)와 로마의 베스타(Vesta)도 그렇다. 중국과 한국의 가정에서 신앙된 부엌의 신 조왕(竈王)도 예외는 아니다. 불의 숭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조로아스터의 전통이다. 조로아스터 자신도 신성한 불을 예배하다 살해당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불은 천재적인 종교가에게 필생의 종교적 유작인 셈이다. 불은 ‘현명한 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의 본질을 드러내는 상징으로도 이해되었고, ‘진리’와 ‘정의’의 신성(Asha Vahishta)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거룩한 불멸의 존재로도 추앙받았다. 신성한 불에 대한 그들의 열렬한 봉헌은 배화교(拜火敎)라는 신앙적 별칭을 낳기도 하였지만, 어쩌면 불 자체에 대한 숭배보다는 불에 대한 헌신을 통해 선함과 의로움을 각성하려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불교 등 종교도 ‘불’ 신성시
숭배까지는 아니더라도 불은 신의 임재(臨在)를 암시하는 강력한 상징이기도 했다. 가령, 구약성서 <출애굽기>에서 확인되듯이, 불타오르는(그러나 사그라지지 않는) 떨기나무에 다가간 모세에게 하느님의 사자가 나타났고, 신이 현전한 그 신성공간에서 하느님은 자신이 유일신 곧 ‘스스로 존재하는 자’(I am who I am)임을 공표한다.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떠나 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밤길을 안내한 ‘불기둥’도 신의 임재와 가호를 알리는 기호로 받아들여졌다.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이른바 ‘불세례’는 세례 요한의 ‘물세례’와 대비되는 예수의 세례로서 구원과 생명을 보증하는 성령의 세례로 이해되었다. 불세례는 곧 신의 세례인 것이었다.

불이 발한 빛, 즉 화광(火光)에 주목한 종교적 상상도 십분 발휘되었다. 불(佛)과 불(火)은 발음 이상으로 통하는 면이 많다. 붓다가 생의 마지막에서 내놓은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는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의 일성은 불법(佛法)과 그것을 좇는 나를 불(火)과 각각 일치시키고 있는 명 대사였다. 불(佛)과 불(火)의 친연성은 연등(燃燈)의 의식을 통해 더욱 구체화된다. (등)불은 번뇌와 무지의 세계를 밝게 비추는 부처의 지혜의 빛이자 공덕으로 통한다. 고려시대에 정월 혹은 이월에 국중대회로 열린 연등회는 왕건의 말대로, “부처를 섬기는” 공양으로서 불의 축제이자 놀이였으며, 오늘날 국가무형문화재로 자리잡은 초파일 연등회도 그 면면을 잇고 있다.

다비식. ⓒ금강신문

그러나 불(火)은 불(火)이다. 그것이 지니고 있는 파괴적 잠재력은 만만히 볼 수 없는 것이었고, 수많은 종교적 상상력을 자극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신의 처벌·진노·심판이 있는 곳에 불이 있었고, 유황을 곁들인 불로써 파국을 맞은 저 타락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그 전형으로 각인되었다. 불의 소임은 지상 위의 심판으로 멈추지 않는다. 지옥이야말로 심판의 완성이요 종착지인 셈인데, 불이 빠질 수는 없다. 이슬람에서는 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 낙원에 이를 수 없는 불순종자들이 거할 지옥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로 이미지화함으로써 심판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가뭄의 귀신 한발(旱魃)도 전염병을 일으키는 여귀(厲鬼)도 두렵기는 매한가지지만, 유난히 화마(火魔)에 공포감을 더 했던 것은 그것이 가져올 대파국에 대한 직감 때문이고, 그것이 환기시키는 우주론적 대변혁에 대한 예감 때문이리라.

인간의 번뇌 상징하기도
불이 가진 가공할 만한 잠재력과 대비되는 무기력한 인간의 번민은 공포 스릴러 문학을 통해 곧잘 승화되기도 하는데, 종교의 주제와도 상통하는 면이 많다. 영화로도 제작된 스티븐 킹의 저작 <파이어스타터(Firestarter)>(1980)는 인간의 분노와 초인적인 방화능력을 보여준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인기 절정의 미스터리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크로스파이어>(1998)는 소위 ‘파이로키네시스(pyrokinesis)’, 즉 물리적인 절차와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도 생각과 의지만을 가지고도 불을 내고 조절할 줄 아는 ‘염화능력’을 지닌 젊은 여성이 사회적인 흉악범에 퍼붓는 거침없는 보복적 대리 살인과 그에 얽힌 내적 분노와 번민을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킹이나 미야베는 막강한 불의 파괴력을 신의 영역에 두지 않고 ‘파이로키네시스’를 소지한 인간에게 맡기고 있다는 점에서 불을 세속화시키고 있지만, 신에게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준 프로메테우스에 비견된다. 물론 문명의 불이 아닌, 분노와 처단의 불이긴 하지만.

불이 지닌 잠재력은 적절하게 조절되지 않으면 안 된다. 불이 지닌 부정적인 힘은 더욱 그렇다. 한 순간 방심이라도 하는 날에는 무력한 인간이 감내해야 할 고통은 한층 유력해진다. 그 어느 종교보다 인간의 고통에 주목한 불교가 내놓은 명쾌한 답변 중의 하나는 고통의 바다가 욕망의 불꽃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불교는 고통의 근원과 양상을 인식시키는 것으로 끝맺지 않고 그것을 초극하는 길과 목표를 역설한다. 주지하다시피 그 길은 구복(求福)과 같이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이 아니라 욕망 자체를 소거함으로써 해방을 얻으라는 구도(求道)의 요청이었다. 최고의 이상인 ‘니르바나(nirvāṇa)’ 즉 열반은 말 그대로 욕망의 불을 끈다는 의미이다.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과 분노는 부지불식간에 불타올라 불가항력의 고통을 낳기 마련이다. 인간의 집착과 욕망은 여유부리며 구경하는 저기 강 건너의 불이 아니라 자신을 고통으로 타들어가게 하는 여기 내 몸의 불이기에 긴장을 늦출 수 없고 누가 대신해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불교도는 번뇌의 불꽃을 다스리는, 꺼진 불도 다시 봐야 하는 영적인 소방수가 아닐 수 없다.

불은 어디까지나 중립적이어서 다루기 나름이고 조절하기 나름이다. 불의 공격성이 부정과 오염, 부조리와 사악을 향하게 한다면 불은 얼마든지 선용될 수 있다. 불이 갖는 정화의 힘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제장의 주변이나 입구에 놓여 있는 불은 외부의 오염을 막으면서 성스러운 공간을 보호하기도 한다. 가령, 시신을 매장하고 돌아올 때에는 불을 타넘어 통과하기도 하는데, 이는 불의 힘을 통해 죽음의 부정을 떨쳐내는 것이려니와 행여 생자의 세계로 귀환하려는 사령의 동행을 제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불길 밖으로 외부의 접근을 막아내는 것이 정화의 불이라면 불길 안에 있는 내부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전이의 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불의 변용과 전환의 힘을 우주의 기본요소라고 간파한 것이 바로 헤라클리투스와 그의 철학적 후예들이다. 화학적 결합과 융합은 모든 희생과 시련의 용광로에 가해지는 불의 힘에서 비롯된다. 수 만년의 자연적인 변화를 단시간에 압축시켜 금을 얻고자 하는 연금술사들에게도 불의 능력은 필수적이다. 멀치아 엘리아데가 언급했듯이, 연금술은 질료의 존재를 탈바꿈시키는 실험실의 통과의례이다. 꿈의 영약(靈藥)과 현자의 돌은 불의 시련과 제련의 과정을 거쳐야 나올 수 있는 전이의 산물이다.

불은 뭔가를 태우는 것(combustion)이면서 동시에 뭔가를 나르기 위해 태우는 것(vehicle)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불은 태울 뿐만 아니라 태워 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의례문화에서 불이 애용되고 있는 것은 불의 매개력과 전달력에 대한 상상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인도의 희생의식(yajña)에서 불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소로 인정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불은 ‘아그니’ 신으로 인격화되기도 하면서 봉헌하는 신도와 그것을 흠향하는 신들을 매개한다고 여겨졌다. 고대 히브리의 번제(燔祭)에서 보듯이, 희생공물은 완전히 태워진 채 연기와 향으로써 신에게 흠향된다. 유교제사의 상향(上香)도 불의 매개와 전송을 활용한 의례라 할 수 있다. 불교의 분향(焚香)은 부처의 공덕을 기리며 발원하는 공양으로서, ‘향불을 피우는 것’은 곧 불도를 닦는 것을 의미할 정도로 불교의 기본에 해당되는 불의 의례로 자리잡았다. 한국의 민속현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한지를 태워 재를 날리며 축원하는 ‘소지올리기’ 의식은 태워서 신에게 보내는 기도라 할 수 있다. ‘씌어진 기도’가 축문(祝文)이요, ‘읽혀진 기도’가 독축(讀祝)이라면, 소지는 소박하지만 불의 전달력을 강화시킨 ‘태워진 기도’이다.

불에 대한 종교적 사유도 필요
인류의 문명과 역사는 불에서 비롯되었고, 불로써 대파국을 맞을지도 모른다. 문명을 일으키고 신성을 일깨우고 삶을 정화시키고 성스러움을 매개시키는 불이지만 여전히 두렵고 위험한 것이 불이다. 빗나간 자만심과 과욕은 크나큰 상처와 상실감을 안길 수 있다. 크고 작은 ‘화재막이’와 ‘불막이’ 의례가 여전한 것은 민속적인 차원에서 보여주는 불에 대한 두려움과 겸손의 양식일 수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네 인생은 불에서 시작해서 불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불이 있는 곳에 종교문화도 사이사이에 끼어든다. 태어남을 기리는 불의 의례가 1년마다 생일날 반복된다. 바라나시 갠지스강변의 화장과 명승의 다비식이 마냥 낯설 것도 없이, 우리는 화장장의 불과 함께 인생의 대미를 장식하며 기나긴 통과의례를 마감한다. 실로 ‘불의 인간’ 즉 ‘호모 이그니아리우스(Homo igniarius)’ 라는 명찰을 인간학의 리스트에 추가해서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을 탐색해야 할지 모르겠다. 1956년부터 그래왔듯이, 10월 3일 개천절에 영산(靈山)인 강화 마니산의 참성단에서 전국체전을 밝힐 성화가 채화될 것이고, 여러 봉송길을 거쳐 주경기장에 점화될 것이다. 몸들이 부딪는 불의 향연과 더불어 불에 대한 종교적 사유도 함께 타오르길 기대한다.

최종성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최종성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사와 박사를 받았다. 캐나다 브리티쉬 콜롬비아대에서 박사후연수 과정을 거쳤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학술교육부장을 지냈으며, 현재 한국역사민속학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조선조 무속 국행의례 연구>, <기우제등록과 기후의례>, <동학의 테오프락시>, <역주 요승처경추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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