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렁이 원한 ‘법화경’ 글귀 한 자락으로 막아내

오늘 밤으로 막걸리 50말을 장만하여 온 동네 사람들을 집 마당에 청해 술잔치를 베푸십시오. 단, 오는 사람마다 숯 한 포씩을 가져오게 해 마당 가운데 숯불을 지피고 풍악을 올리십시오. 그리고 〈법화경〉 한 질을 그 앞에 놓으십시오.

관의 형태가 완전히 사그라지자 마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칼을 찾던 조부자도 놀란 눈으로 관이 타버린 숯불더미 위의 광경을 바라보며 경악했습니다. 응당 있어야 할 아들의 시신 대신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뜨거움에 못 견뎌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

이 나라 남녘, 어느 마을에 천석꾼 조 씨가 살고 있었습니다. 재산이 많은 데다 늘그막에 기다리던 아들까지 보게 된 조부자 내외는 더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한 스님이 조부자 집 문간에 서서 염불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을 뒤편 암자에서 탁발하러 내려온 천수 스님이었습니다.

“아이구 스님이시구먼유.”

“예, 그렇습니다.”

그 암자의 주지인 천수 스님은 합장한 채 공손히 인사를 했습니다.

“시주를 드릴 터이니 염불은 그만하시고 어서 딴 집으로 가 보셔유.”

조부자 아내는 몇 줌 안 되는 쌀바가지를 내밀었지요. 스님은 메고 있던 바랑에 쌀을 받으면서 말했습니다.

“염불을 좀 더 해야겠습니다.”

조부자 아내는 내심 거추장스러웠지만 정중하게 인사했습니다.

“감사하오나 지금 저희 집 3대 독자가 안방에서 곤히 낮잠을 자고 있슈. 하도 귀한 아들이라 깰까 조심스러워 부탁드리는 거예유.”

스님은 지그시 웃으며 조용히 대답을 했습니다.

“허나 소승이 염불을 더 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 귀한 아드님으로 인해 장차 이 집안에 일어날 액운을 소멸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원 별말씀 다하시네유. 애지중지하는 남의 집 아들 보고 액운 운운하시다니….”

“미리 막지 않으면 평화스런 귀댁에 화가 미칩니다.”

“화라구요?”

“화가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화의 근원이 무르익었습니다.”

“스님, 그렇게 뜸들이지 말고 무슨 곡절인지 속 시원히 알려주셔유.”

아들이 화를 당할까봐 아까와는 달리 조부자 아내는 스님에게 간곡히 사정했습니다.

“소승이 일러주는 대로 하시면 액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밤으로 막걸리 50말을 장만하여 온 동네 사람들을 집 마당에 청해 술잔치를 베푸십시오. 단, 오는 사람마다 숯 한 포씩을 가져오게 해 마당 가운데 숯불을 지피고 풍악을 올리십시오. 그리고 〈법화경〉 한 질을 그 앞에 놓으십시오. 그럼 소승 이만 물러갑니다.”

조부자 아내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다 싶으면서도 천수 스님의 말을 묵살할 수 없었습니다. 인근에서는 도에 통달해서 용하기로 이름난 스님이 허튼소리를 했을리 만무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법화경〉 한 질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구해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지요. 조부자 아내는 근처의 절들을 다 다녔지만 〈법화경〉을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절망하여 이름도 없는 어느 조그만 암자에 다다른 조부자 내외가 퇴락한 암자의 툇마루에 앉아 있는데 그 기둥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씌어있었습니다.

내가과거 무량겁에 이런상서 있게되면
묘법설함 보았나니 그대들은 필히알라
그당시에 일월등명 부처님이 계셨으며
바른법을 설하시매 처음중간 마지막이
순일하여 섞임없고 깨끗한행 갖추오니
근기따라 사제십이 육바라밀 설하시어
아뇩보리 일체종지 모두얻게 하시나니
이와같이 이만부처 같은이름 일월등명
〈법화경〉 ‘약찬게’

아, 조부자 내외는 그 뜻을 그대로 알지는 못했지만 〈법화경〉이라고 쓰인 글귀만 보고 합장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혹 소용이 될까 싶어 그 글귀를 그대로 종이에 적어 집에 가져왔습니다.

그날 저녁, 조부자 아내는 스님이 일러준 대로 막걸리 50말을 준비하고 술잔치를 벌였습니다. 물론 그 〈법화경〉의 글귀를 앞에 놓고 말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가져온 숯불이 벌겋게 달아올랐을 때였지요. 방 안에서 아들이 앙앙, 목을 놓고 우는 것이었습니다. 조부자 아내는 풍악이 울리고 사람들이 웅성거려 놀라서 그러는 줄 알고 어르고 달랬으나 막무가내였습니다.

오만상을 찡그리며 마구 울어대는 아들을 보자 조부자 아내는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뭔 놈의 액이 온다고 일러주어 남의 귀한 아들만 고생시키는지 모르겠네.”

부인은 천수 스님을 원망했지요. 바로 그때였습니다.

“보살님!”

하늘에서 천수 스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스님이 나타나자 풍악도 멈추고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잠잠해졌는데, 스님은 이상하게도 곧바로 작은 관 하나를 어깨에 메고 나타났습니다.

“아니, 스님. 그 관은 왜 들고 오셨슈?”

“예, 우선 그 아이를 이리 내려놓으세요.”

부인은 안고 있던 아들을 스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아기는 더욱 소리 높여 울면서 쪼르르 엄마에게 달려가 치맛자락을 잡았지요. 순간 천수 스님은 일언반구도 없이 아기를 낚아채더니 관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아기는 숨이 넘어갈 듯 울어댔습니다. 스님은 그 사이 앞에 놓인 〈법화경〉을 독송하였습니다.

그러자 영문을 모르는 부인은 마치 실성한 듯 스님의 장삼을 쥐어 잡아 뜯으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태연하게 독송을 하며 관을 숯불위에 내동댕이쳤습니다.

사태가 이쯤 되자 사랑방에 앉아 있던 조부자도 뛰어나왔습니다.

“여보, 칼 가져와. 저 중놈의 배를 갈라 버리게.”

조부자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칼을 찾았습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숯불 위에 던져진 관은 순식간에 재로 변했습니다. 관의 형태가 완전히 사그라지자 마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칼을 찾던 조부자도 놀란 눈으로 관이 타버린 숯불더미 위의 광경을 바라보며 경악했습니다. 응당 있어야 할 아들의 시신 대신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뜨거움에 못 견뎌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우리 아들은 어디로 가고….”

조부자 내외는 천수 스님을 바라보며 외쳤습니다.

“저게 댁의 아드님입니다.”

구렁이를 가리키며 조용히 말문을 연 천수 스님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혹시 아기를 가질 무렵 구렁이를 죽이지 않으셨는지요?”

“글쎄요…. 아, 생각납니다. 토끼에게 풀을 먹이고 있는데 풀 속에서 구렁이가 나타나 토끼를 잡아먹으려 하길래 들고 있던 낫으로 찍어 죽인 일이 있어요.”

“그 낫을 가져와 보시지요.”

조부자가 부러진 낫을 가져오자 천수 스님은 구렁이 뱃속에서 꺼낸 낫 끝과 맞추어 보았습니다. 신통하게도 꼭 들어맞았지요. 보고 있던 동네 사람들까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큰 일 날 뻔했습니다. 구렁이가 조금만 더 자라면 내외분뿐 아니라 동네 분들까지 모두 화를 입었을 것입니다. 정말 천만다행입니다.”

그 때였습니다.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밀어닥치더니 천둥 번개와 함께 비바람이 몰아쳤습니다. 그리고 빗속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천수야 이놈, 내 철천지원수를 못 갚게 방해한 널 그냥 두지 않을테다.”

소름이 끼칠 만큼 흉악한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천수 스님은 조용히 〈법화경〉을 외울 뿐이었습니다. 독송이 끝나자 스님이 손짓을 하며 말했습니다.

“가거라!”

“아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원수를 갚을 것이다.”

“어림없는 수작 말고 물러가거라!”

순간 구렁이는 독기를 내뿜었습니다. 스님은 재빨리 합장을 하고 또 다시 〈법화경〉 한 자락을 염송했습니다. 그러자 구렁이의 독기는 스님의 염불 속에 그만 사그라지고 말았습니다. 다만 조부자가 쓴 종이의 〈법화경〉만이 금빛으로 빛났습니다. 함께 모여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 금빛의 글귀를 향해 합장을 하였던 것은 불문가지겠지요.

동서고금,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는 것이 우리 어미들의 행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알아야 될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자식을 옆에 놓고도 변하지 않는 것, 변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부처님의 말씀이고, 그 중에서도 그 정수인 〈법화경〉 한 자락임을 절감합니다. 이제 여름휴가가 끝난 계절, 조그맣게 아니면, 아주 큰 〈법화경〉 글귀를 들고 가까운 사찰로 나들이해 봄이 어떨런지요? 그것이 우리 불자들의 일상이 되었으면 또 얼마나 더 좋을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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