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유사’모두
소중한 겨레 자산
저자 철학·소망 담겨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정사(正史)이고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야사(野史)라는 말을 들어왔다. 맞고도 틀린 말이다. 두 저술 모두 지은이가 노고를 아끼지 않은 소중한 겨레의 자산일진대 그 우열 혹은 등급을 가릴 수 없다. 각각 고려시대 중ㆍ후기에 쓰여진 두 책은 현재 남아 있는 우리 고전 가운데 가장 오래됐으며, 그 가치 또한 막대하기에 한국고대사에 접근할 수 있는 수레의 두 바퀴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가 못 다 적은 세 나라[삼국] 역사를 마저 채운 역사책 즉 유사(遺史)가 아니라 그와는 관점[사관]과 차원[불교]을 달리하여 고구려ㆍ백제의 역사와 신라 천년을 증거한 역사책이다. 선인들은 자신의 책을 과대포장하거나 천추(千秋)의 귀감이라 떠벌이지 않으므로 ‘유사(遺事)’란 제목을 더러 붙였다. “이런 것 정도가 빠졌다”고 하는 겸손한 표현이지만 실은 “이것만은 알아두라!”는 지은이의 철학과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다.

무미건조한 과거의 사실만 기록하면 ‘역사’고, 사실여부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지나간 일에 대한 해석과 의미까지 곁들이면 신화나 전설이 된다. 오래된 역사일수록 사실만의 기록으로 남아 있기 어렵고, 고대 사료는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사실 사이에 연결고리[인과관계]를 지어 듣는 이에게 어떤 메시지를 호소한다. 그러니 단군이야기가 신화냐 역사냐 묻는 질문은 물음 자체가 문제다.

〈삼국유사〉는 이야기 형태로 전한다. 바로 설화의 세계로서 여기에서는 이야기꾼과 듣는 이 사이에 감정이 오간다. 강조하고 싶은 내용이 있고, 듣고 싶어 하는 스토리전개가 있어서 때와 장소에 따라 항상 변해간다.

삼국에서 일어났던 ‘일(역사)’을 몇 백 년 뒤에 ‘이야기(설화)’로 들려주는 형식을 ‘역사이야기[史話]’라고 해두자. 이런 것을 골라서 담아놓은 〈삼국유사〉에는 어느 임금 때 또는 몇 년이라고 표방한 절대연대가 있지만 13세기 말에 문자로 정착된 역사이야기 속에는 후대의 가공(加工)이 켜켜이 쌓여 있다. 여기에서 역사학자는 글에서 드러낸 연대의 시대모습을 알아내려고 골몰할 것이다. 역사이야기는 반드시 시대순으로 적혀 있지 않으며, 이야기꾼의 관심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삼국유사〉 읽기는 우선, 글에 쓰인 이야기를 그대로 읽고 즐길 일이다.

선덕여왕을 사모하다 사랑의 불길[心火]에 타죽은 신라 총각이 있으니, 여왕이 젊고 아리따워 당나라 황제까지 수작을 걸 만하다. 그러나 실제 나이를 계산해보면 여왕은 즉위 당시 이미 노숙하였고, 남편이 누구라는 기록도 있다. 이야기꾼과 듣는 이는 드라마틱한 사연을 선호하여 여기까지 발전시켰지만 사실은 사실대로, 지어낸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의미가 있다. 하나는 역사가 되고, 또 하나는 문학이 되는데 진실과 진리의 가치는 수요자에 따라 다르다.

신라의 계집종 욱면은 주인 허락 없이 미타사라는 절에 따라와서 염불하던 도중 극락왕생하였다[육신등공. 서기 815년]. 그녀는 종일 일한 뒤라 쏟아지는 잠을 물리치고자 손바닥을 밧줄로 꿰어 정진하였다 하는데, 그것은 고대 형벌의 한 형태다. 그런데 미타사에는 천장과 지붕에 허리둘레만큼 뚫린 구멍이 왕생을 증명하고 있으니 가보라고 한다. 이 구멍은 화재를 예방한다는 화주(火珠)를 용마루에 올려 놓은 지붕의 약한 구조 때문에 생긴 것이지만, 이처럼 심금을 울리는 영험설화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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