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리뷰 (256호)

수륙재와 영산재 법화사상 꽃 피운 문화결정체

구인사 영산대재 ⓒ김운식

‘수륙재와 영산재의 성립고찰’을 주제로 하는 국제학술세미나가 6월 25일 서울 개운사에 소재한 어산작법학교에서 열렸다.

(사)어산작법보존회와 불교의례문화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세미나에서는 3명의 발제자가 발표했고 여느 세미나와 달리 60명이 넘는 청중과 논평자들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발표와 질의응답에 집중했다.

약간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으련만 개인적 관심사 내지 자신의 견해와 다른 점을 발제자들에게 기탄없이 물었고 발제자들도 성실히 답했다.

필자가 의례 전문학자가 아니라 그렇겠지만 어떤 것은 용어의 개념이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스님들 중심으로 열띤 토론이 진행되었는데, 근자에 보기 드문 뜨거운 열기의 세미나였다. 사회를 맡은 신규탁 교수(연세대 철학과)는 지루할 수 있는 발표와 질의응답 시간을 특유의 재치와 학문적 지식으로 웃고 따지는 축제의 마당으로 만들었다.

구인사 영산대재 ⓒ천태종

의례학, 전문 학문영역 자리매김

이날 세미나는 필자에게 평소 지니고 있던 지적인 편견을 깨뜨리고 안목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사찰 행사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는 의식, 특히 제사의식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불교문화의 정수를, 더 이상 간과해선 안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깨달은 기회이기도 했다. 발제자의 한 명인 이성운 박사의 주장처럼 불교의례는, 이제 의례학(儀禮學)이라는 이름으로 전문적인 불교학의 한 분야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의례학이라 할 경우, 그 속에 동북아 불교의 역사ㆍ사상ㆍ문화ㆍ민속 등이 총체적으로 녹아 있으며, 더불어 동북아 불교도들의 특수한 종교체험이 짙은 향기로 배어 있기 때문이다.

발제자들의 발표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지만, 동북아시아 불교권의 불교의례는 동북아 불교문화의 공통 키워드 중의 하나가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가 중국문화와 결합하여 불교의례라는 매우 독창적인 종교문화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불교문화가 다시 주변 지역으로 전파되면, 기존 지역문화의 특수성과 결합하여 다양한 변화의 양상을 노출하게 된다. 한국의 수륙재나 영산재 역시 그런 시각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날 발표자는 세 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4시간이 넘는 발표와 토론이었다. 토론자들의 질문도 많았지만 청중들의 관심이 그만큼 뜨거웠다. 전국 각지에서 의례에 관심 있는 스님이나 재가 연구자들이 참석했는데, 불교의례가 지니는 실용성도 한 몫 했다고 본다. 발표제목과 발제자는 다음과 같다.

 

제1주제 ‘한국영산재의 성립 고찰’, 고상현(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박사.

제2주제 ‘수륙재의 성립 고찰’, 호우춍(候沖, 상하이 사범대학) 박사.

제3주제 ‘한국 수륙재의 변용’, 이성운(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연구소) 박사.

 

주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핵심은 수륙재와 영산재이고, 이 두 중요한 문화유산이 어떻게 성립하여 전개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이날 세미나의 핵심이다. 이 두 훌륭한 문화유산, 즉 불교의례를 대표하는 영산재와 수륙재는 이미 국가에 의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영산재가 1973년 11월 5일 지정된 이후 1987년 11월 7일에는 범패작법 장엄 등을 포함한 마당 종목이 대한민국 무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9월 30일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후 불교문화에 대한 인식, 특히 무형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어 불교계는 수륙재를 무형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2013년 12월 19일 동해 삼화사ㆍ서울 진관사ㆍ마산 백운사에 전승되고 있는 수륙재가 국가무형문화재 마당종목 125호, 126호, 127호로 지정됐다.

구인사 영산대재 ⓒ천태종

어느 의식이 먼저 시작됐을까?

세미나를 들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이 있었다. 수륙재와 영산재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즉 성립의 선후관계가 어떻게 되며, 각각의 특징이 무엇인가가 궁금했다. 이런 필자의 궁금증은 이성운 박사의 논문을 통해 다소 해소되었다. 이성운은 2015년도에 발표된 <영산재와 수륙재의 성격과 관계 탐색(한국불교학 제73집)>이란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영산재’란 영산작법의 이칭으로 이런 명칭이 사용된 것은 오래된 것이 아니다. <법화경>을 염송하는 ‘영산법석’의 절차이며, 적어도 16세기 이후에 국내에서 정형화되었다. 추선공양을 목적으로 설행되었지만 <법화경>을 염송하거나 예참하는 상구보리를 추구하는 자력적인 수행의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둘째 한국불교의 수륙재는 중국에서 성립되어 국내에서는 10세기경부터 개설되었다. 중국의 남북지방에서 전개된 두 계통의 의식문을 당시의 실정에 맞도록 요점을 간추리거나 새로 편집되어 실행되었다. 그렇지만 수륙재는 수중중생, 지상중생, 공중중생을 위한 시식에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상구보리의 성향이 강한 영산재와 달리 하화중생의 의례라 정의할 수 있다.

셋째 <법화경>의 독송과 공양이 중심인 영산재와 무주나 유주의 고혼을 위한 시식이 중심인 수륙재는 상향과 하향이라는 고유한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상호간의 역할이 보완된 형태로 실행되고 있다. 그렇지만 ‘왕생극락을 위한 추선공양의 의례’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상호간의 역할이 보완되고, 마침내는 유사해져서 영산재와 수륙재라는 각각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연구 결과는 수륙재를 영산재와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국불교신문>, 2013.5.4.)하면서, 수륙재를 영산재의 일부로 보려는 인식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가를 일깨워준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륙재가 영산재에서 파생된 의례인가?’ 만일 수륙재가 영산재에서 파생된 것이 분명하다면 필자의 질문에 명쾌한 답변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역시 반대의 질문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영산재는 수륙재에서 파생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만만치 않다. 그렇지 않다는 설과 그럴 개연성이 있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영산재와 수륙재의 고유성을 인정하되 양자 중에서 어느 것이 빨리 성립했으며, 상호 어떠한 상관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해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상호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정할 이유가 없다.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립의 선후를 논해야 하는데, 그 점을 살펴보면 수륙재가 훨씬 빠르다. 미등 스님은 “수륙재는 중국 양나라 무제(502~549)가 천감(天鑑) 4년인 505년에 처음 시행했다”(<국행수륙대재>, 조계종출판사, 2010. pp.17~18)고 소개한다. 송나라 때 불교사학을 대표했던 학승인 지반(志磐)이란 스님이 저술한 <불조통기>에 나오는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이후 당나라 고종시대에는 함형연간(670~673)에 도영(道英) 선사가 북산사(北山寺)에서 수륙재를 봉행했다고 하며, 이후에도 수륙재를 시행했다는 기록은 많다. 그런데 대만의 홍진순(洪錦淳)은 보다 포괄적이면서도 명확하게 수륙재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인도불교의 포살제도와 자자의식 중의 참회의궤에서 연원하며, 중국에 들어와서는 동진시대의 도안(道安: 313~385)이 ‘포살법, 차사법(差使法), 회과법(悔過法)’ 등을 정립하여 중국 참회법의 원칙을 만들었다. 그의 제자인 혜원(慧遠: 334~416)은 대중을 모아놓고 고승대덕을 초청해서 법좌에 올라가 설법을 하는 것으로 대중을 교화인도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하는데 힘쓰게 하는 것으로 후대 참회문의 선구가 되게 하였다. 그 뒤에 남북조 시기 양무제 등의 제창을 거쳐 수나라 때 천태지의 스님이 창작에 크게 힘써서 중국화된 참회의례가 점차 완성되었다.”(<水陸法會儀軌>, 臺灣 文津出版社, 2006. p.12)

 

이상의 인용문은 수륙재가 성립되는 과정이나 그 사상적 연원이 매우 오래되었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수륙재의 기원이 종교적 참회의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도 알려준다. 그런데 도안이나 천태지의 등 수륙재가 완성되는 과정에 기여한 스님들은 모두 유교나 불교를 겸비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도교도 섭렵한 대가라는 점에서 수륙재의 의례문에 나오는 사상은 불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도문화와 중국문화의 융합과 재창조라고 인식하는 것이 타당하며, 그렇기에 동북아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것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이제 다시 말을 바꾸어 보기로 하자. 그렇다면 영산법석은 언제부터 실행되었을까? 시기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매우 이른 시기에 시행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천태종의 제16대조사인 사명지례(960~1028)가 연경도량(延慶道場)을 개설했었고, 역시 천태종 승려인 자운준식(964~1032)이 영산법석(靈山法席)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종효(宗曉: 1151~1214)라는 스님이 편찬한 책인 <사명존자교행록>에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종효 스님은 사명지례의 제자이며, 사명지례와 자운준식은 고려출신의 승려인 의통보운의 제자였다. 의통보운이 중국 천태종 제15대 조사로 추앙받은 것은 사명지례와 자운준식이란 걸출한 승려를 양성하여 중국 천태종이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을 닦았기 때문이다. 사명지례를 중심으로 산가파와 산외파 사이에 전개된 백여 년에 걸친 사상적 논쟁은 중국사상사 내지 불교사에서 이채를 발하고 있는데, 그것도 역시 의통보운의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그의 제자인 사명지례가 소재길상을 염원하는 연경도량을 개설하고, 자운준식이 <법화경>을 염송하는 영산법석을 개설했다는 기록은 영산법석의 연원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그렇다고 자운준식이 개설한 영산법석이 현재 한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영산재와 형태상 동일한 것이냐고 질문한다면 그 대답은 쉽지 않다. 수륙재의 한 과정 속에 영산법석이 많은 법석 중의 하나로 존재했었을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중국에서, 그렇지 않으면 한국에 건너와 한국의 문화적 특수성과 결합하여 현재 한국에서 설행되고 있는 영산재, 혹은 영산법회가 완성되었을 수도 있다.

구인사 영산대재 ⓒ천태종

기도와 참회의 마음 의식으로 확대

제1주제인 ‘한국영산재의 성립과 전개 고찰’은 그동안 발표된 논문들을 연구사적인 시각에서 분류해 소개하고, 한국 영산재의 성립과 전개, 명칭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고찰해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결론에서 이후의 전망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문제는 영산재라는 불교의 무형문화유산이 국가의 지정을 받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보존과 전승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화유산이란 점이다. 따라서 전승과 보존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와 대책이 필요하다는 점을 잊지 않고 상기시킨다.

제2주제인 ‘수륙재의 성립 고찰’은 발표자인 상하이 사범대학 호우춍 교수가 최근에 중국에서 수집한 수륙재 유관 문헌을 소개하는데 논문의 절반을 할애하고 있다. 이어 수륙재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집중적으로 검토해 발표했다. 이 논문은 수륙재와 관련된 자료를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은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동시에 수륙재의 성격을 고찰하면서 수륙재의 기원을 반승재(飯僧齋)에서 찾고 있는 점이 특기할 사항이다. 또한 반승재가 성스러운 승려[聖僧]를 숭배하는 사상과 결합하여 수륙재를 탄생시켰다고 본다. 이후 당나라 때 밀교의 <유가염구의궤(瑜伽燄口儀軌)>가 번역 소개되면서 시아귀식(施餓鬼食)을 중시하는 의례로 전환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 다시 <수생경(受生經)>의 영향으로 예수 (預修) 혹은 사후에 다시 생을 받고자 하는 수륙재를 거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호우춍 교수의 발제문은 매우 독창성이 돋보이는 논문이다. 특히 수륙재의 기원을 반승재에서 찾거나 성승의식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주장은 독창성만큼이나 논란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수륙재의 기원을 참회의식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는 다른 전문가들, 즉 성개(聖凱)법사나 대만의 홍진순(洪錦淳)의 주장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제3주제인 ‘한국 수륙재의 변용’에서 발제자는 중국에서 수입된 수륙재는 한국사회에 정착하면서 변용되었다고 진단한다. 서기 963년 귀법사에서 무차수륙회를 지냈으며, 971년 갈양사에서 수륙도량을 개설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한국에 도입되어 실행된 수륙재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고 본다. 그것을 발제자는 근기에 맞추어 작법을 실행했다는 의미의 견기이작(見機而作)으로 정의한다. 한국불교의 수륙재는 수륙재가 추구하는 목적에는 변함이 없지만 상황에 따라 축약과 첨가의 변화를 거쳐 왔다는 주장이다.

필자는 수륙재나 영산재가 재의식으로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종교적 정서가 문화로 결실된 것이란 점에서, 두 무형의 문화유산을 높이 평가하고자 한다. 그것은 종교를 떠나면 전통의 종합예술이며,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동아시아 역사와 사상의 결정체이다. 그런데 그 중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법화경>과 천태사상이라는 사실이다. <법화경>과 천태사상을 제외하고 두 문화유산의 정체성을 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만일 한국불교의 주류가 천태종이었다면 이들에 대한 관심이 이 정도로 그치고 말았을까? 그것은 동시에 역사적 연속성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애잔한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법화천태사상이 문화적 결정체로 승화된 것이란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한국불교의 신세계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수륙재의 기원을 참회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종교의 핵심은 기도와 참회이며, 그것은 불교 역시 예외일 수 없다. 특히 참회는 내면의 본질이나 절대성과 합일하기 위한 자기 힐링이란 점에서 시공을 초월해 종교적 필요성을 지닌다. 그런 점에서 주기적으로 반복되던 포살과 자자라는 수행의 일과가 남북조시대라는 특수한 시대상황과 만나게 된다. 전쟁으로 인한 살생의 자행과 자연적ㆍ정신적인 황폐화는, 참회사상에 입각해 많은 참회문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 탄생한 많은 참회문은 <홍명집>에 실려 있다. 이러한 참회문의 영향 속에서 ‘자비도량참법’이나 ‘법화삼매참의’ 등의 참회법이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이런 점에 대해 <중국불교참회법연구>란 책을 쓴 성개(聖凱) 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국불교에서 참회법의 체계를 진정으로 건립한 것은 천태지자대사로부터 시작된다. 지자대사는 천태교관에 의지해 대승불교의 이관(理觀)과 참회를 서로 결합시켜 <법화삼매참의>, <방등삼매참의>, <청관음참법>, <금광명참법>의 네 가지 참회법을 만들었다. 더욱이 <법화삼매참의>는 천태종에서 수학하는 사람들의 실천행법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 참회법을 제작하는데 있어서 모본이 되었다. <수륙의궤>, <정토참>, <약사참>, <지장참>, <대비참> 등 거의 모두가 천태종의 여러 조사들에 의해 제작된 의궤이다.”(北京, 宗敎文化出版社, 2004년, p.80)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수륙재는 천태종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영산재 역시 마찬가지다.

<법화경>을 염송한 이유가 현세이익적인 것이든, 아니면 망자의 극락을 기원하는 추선공양에 목적이 있든, 영산재에서 <법화경>을 빼 놓고서는 어느 것도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수륙재나 영산재는 법화사상을 중핵으로 꽃피운 문화적 결정체이며, 길이 전승하고 보존할 가치가 있는 동북아 문화의 공통분모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연꽃의 향기를 길이 지닐 의무와 책임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차차석

동국대 불교학과를 나와 법화천태사상을 전공하여 석ㆍ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등에서 강의를 했으며, <중국의 불교문화>, <불교와 국가권력>, <다시읽는 법화경>, <불교와수행> 외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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