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어루만지는 불교설화(256호)

삶은 관계의 연속이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태어나 관계 속에서 죽어간다. 부모자식·부부·친구 등 인간관계 속에서 ‘나를 좀 더 봐 달라’, ‘사랑받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며 관심을 갈구한다. 이런 갈구가 심해지면 자신도 모르는 새 특정 대상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이른 바 ‘관계중독’이다. 중독은 ‘의존증’의 다른 말이다. 라틴어 어원에서 중독은 ‘자기 자신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인지 세계보건기구(WHO)는 중독을 의학용어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 ‘의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권고한다.

한 연구기관이 전국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남학생의 주된 관심사 중 하나는 ‘연애’였다. 연애는 친밀감을 나누는 하나의 과정이다. 하지만 ‘상대가 나를 거부하면 어쩌나’하는 불안·우울 등 부정적 감정을 생기게 하고,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채 상대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강박을 일으키게도 한다.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집착해서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하는’ 관계중독은 학업이나 직장생활 등 일상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 중독은 크게 물질중독(섭취적 중독)과 행동중독(과정중독)으로 구분되는데, 관계중독은 행동중독에 속한다. 사랑·열정과 혼동하기 쉬운 관계중독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강화도 전등사를 참배해 본 이들이라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대웅전 추녀 아래 나부상(裸婦像) 이야기는 그 좋은 예다.

절절한 사랑은 증오를 남기고
강화도 전등사는 1,600년을 이어오면서 여러 차례 소실의 아픔을 겪었다. 17세기 말경에도 사찰 중건을 위해 당대 손꼽히는 도편수를 불렀다. 솜씨 좋기도 이름난 도편수는 매일 목욕재계하고 톱질을 할 정도로 정성을 다해 가람 조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섬 생활에 외로움이 쌓였던 도편수는 목을 축이기 위해 들렀던 마을 주막에서 미모의 주모를 만났다. 도편수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은 주모는 도편수의 가람 조성 솜씨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수년간의 타지 생활에 외로움이 쌓였던 도편수는 자신을 위로하는 달콤한 속삭임에 점점 주모에게 빠져들었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어서 불사 끝내시고 살림을 차려요.”

“좋소. 우리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사랑에 빠진 도편수는 정갈한 마음으로 불사(佛事)에 임하던 초심을 잊고 말았다. 대신 주모를 향한 열정이 마음속에 이글거렸다. 열흘에 한 번 씩 주모를 찾던 게 닷새에 한 번이 되고, 다시 이삼일에 한 번이 되더니, 결국 매일같이 주모를 찾아 사랑을 속삭이게 됐다. 불사가 제대로 진행될 리 만무했다. 불사는 예정했던 일정보다 점점 늦어졌다. 그 사이, 공사비로 받았던 많은 돈은 이러저리 새어나가 수중의 돈은 바닥이 나고 말았다. 그래도 도편수는 주모와 살림을 차릴 꿈에 부풀어 있었다.

어느 덧 시간이 흘러 대웅전 불사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며칠 만에 주막을 찾은 도편수는 아무리 불러도 주모가 나오지 않자 당황했다. 소리를 들은 이웃집 여인이 나와 하는 말에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며칠 전에 딴 사내와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했수. 찾을 생각일랑 아예 마시우.”

불사 마무리를 앞두고 섬을 빠져 나간 주모를 쫓아 육지로 나갈 수는 없었다. 사랑했던 여인에게 배신을 당한 도편수의 마음은 갈가리 찢어지는 듯했다. 몇 년간 사랑을 쏟았던 주모에 대한 애정은 증오로 변해갔다.

사찰로 돌아온 도편수는 여인상을 깎기 시작했다. 사랑과 증오의 고통 속에 여인상을 깎으며 그저 묵묵히 견뎠다. 그렇게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나부상 네 개를 조각했다. 도편수는 대웅전 처마 네 귀퉁이의 추녀 밑에 지붕을 받드는 형상으로 나부상을 끼워 넣었다. 자신을 배신한 여인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다.

전등사 대웅전(보물 제178호) 용마루 밑에 벌을 서는 형상으로 추녀를 이고 있는 네 나부상은 절절한 사랑이 지독한 증오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상징물로, 사람을 향한 집착을 경책하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연민과 자비로 자기 돌보기
‘너 없는 나는 없다’라는 생각에 빠져드는 관계중독은 스스로 중독 상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치유가 어렵다. ‘연인을 향한 애정’, ‘자식을 향한 무조건적 사랑’, ‘가족과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봉사’라고 여기면서 관계중독을 자각하지 못한다. 심할 경우, 아름다워야 할 사랑이 지독한 증오로, 자기희생은 자기학대로 변질된다. 이런 고통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선택하는 사례도 있다.

관계중독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불안한 애착 경험’이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됐거나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마음의 상처가 있을 때는 세월이 흐른 뒤 부족했던 사랑의 갈증을 누군가로부터 채우고자하는 애집(愛執)이 생기게 된다. 부모의 학대 등 한 사람의 인격체로 존중받지 못한 경험은 누군가에게 보호받길 원하고, 인정받고자하는 욕구로 남는다. 반대로 부모의 과잉보호는 주체성의 확립을 방해해 누군가에게 지속적으로 보호받길 원하고, 의지하려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이야기 속의 도편수는 불사 초기에는 가람을 조성하면서 매일 목욕재계를 하고 톱질 하나에도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외로움과 허전함을 견디지 못한 채 주막집 주모의 위로에 현혹돼 주체 못할 사랑에 빠져든다. 도편수의 애틋한 사랑과 상반되는 주모의 위선적 행동은 도편수의 일방적인 애정공세를 부추긴 관계중독의 또다른 원인이다.

관계중독에 대한 처방은 개인 성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일반적인 대처법은 첫째, ‘거리두기’다. 공허함과 헛헛함을 채우기 위해 상대에게 매달리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후 객관적 시각으로 마음을 봐야 한다. 자신과 상대와의 거리를 적정하게 유지한 채 자신의 애타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이다. 둘째, ‘놓아주기’다. ‘상대를 위해 나를 희생하고 있다’, ‘봉사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상대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스스로를 놓아준다. 셋째, ‘연민과 자비로 스스로 돌보기’다. 즉, 자기 돌봄이다. 대다수 현대인들은 과중한 노동으로 자기 돌봄의 기회를 갖기 못했다. 이런 결핍은 자녀에게 세대 전승되는 경향이 많다. 돌봄이 부족했던 자신을 보살펴야 한다. 더불어 상대의 과한 요구까지도 받아들이며 관계를 유지하고자했던 지친 마음을 스스로 위로해야 한다. 마지막은 ‘자신과 친구되기’다. 혼자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보면서 타인에게 의존했던 습관을 고치는, 자신과 친구가 되는 연습이다.

관계중독에서 벗어나면 상대와 거리가 멀어지는 게 아니라 온전한 상태에서 상대와 새롭게 관계를 정립하게 되므로 삶에 큰 활력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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