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이 있는 여행지(256호)

바다와 숲에서
낭만과 서정을 읽는다

추암해변

강원도 동해시. 그곳에 가면 푸른 ‘바다’와 초록의 ‘숲’과 해안선을 따라 흐르는 ‘철길’ 삶의 현장인 ‘항구’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파도가 몰고 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바라보고, 숲이 기른 오솔길을 걷고, 기차가 지나간 철길을 바라보고, 만선의 고깃배들이 몸을 푸는 항구에 서면 문명의 언어로는 읽을 수 없는 낭만이 보인다.

바다열차길과 동해

추암해변과 추암역

태양이 아침마다 얼굴을 씻는 동해(東海). 동해에는 많은 명소가 있지만 촛대바위가 있는 동해시의 추암해변 역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촛대바위와 함께 하는 일출 풍경이 일품이며, 형제바위를 비롯한 바위섬과 기암절벽이 만들어내는 해변 풍경도 절경이다. 한국관광공사의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에 선정된 곳이다.

추암역

먼 길을 달려온 파도가 바위섬과 절벽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진다. 부서진 파도가 다시 바다가 되고나면 파도를 따라온 바람은 이제 바다를 바라보는 것들의 것이 된다. 지친 삶에서 건너온 인간의 가슴 속으로, 파도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갈매기들의 날개 밑으로 바람은 다시 분다. 그리고 다시 절벽 위에 핀 나무와 그 위로 흐르는 흰 구름을 흔들고 나면 파도가 바다가 되듯이 바람은 하늘이 된다. 쉴 새 없는 문명 속에서 메말라버린 두 눈을 푸른 바다에 던지고, 치열한 삶으로 쪼그라든 가슴을 아득한 바람결에 맡기면 어느 새 두 눈엔 푸른 물이 스며들고, 가슴엔 드높은 하늘이 들어와 앉는다.

추암해변-촛대바위

촛대바위에서 50m 거리에는 추암역이 있다. 정동진역에서 삼척역까지 56km의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테마관광열차 ‘바다열차’를 탈 수 있다. 추암역은 역사(驛舍)가 따로 없다. 두 줄의 철길과 사람의 발자국이 만나는 곳이 추암역의 역사다. 플랫폼에는 ‘추암역’이라는 문패와 문패 옆에 놓인 낡은 벤치 하나, 그리고 철길이 있을 뿐이다. 플랫폼에 서서 열차를 기다린다. 열차는 자주 오지 않는다. 주말엔 세 번, 평일엔 두 번이다. 열차 승차권은 승차 후 승무원으로부터 구입한다. 열차는 아직 멀었다. 역무원도 없고 승객도 없다. 벤치에 앉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아득히 뻗어 있는 철길 뿐. 하지만 그 철길 위에는 많은 것들이 있다. 어제 다 못한 생각과 다짐, 그리운 얼굴, 알고 싶은 내일, 그리고 어딘가에서 오고 있을 열차가 그 위에 있다. 그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으면 철길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차창 밖의 푸른 바다를 볼 수 있는 낭만 가득한 열차가 나를 태우러 온다.

무릉계곡

무릉계곡

동해시는 바다와 더불어 깊은 숲을 가지고 있다. 넓게 펼쳐진 바다가 마음을 넓혀준다면, 깊은 숲은 마음을 깊은 곳으로 데려간다. 삼화동의 무릉계곡은 동해의 명산인 두타산의 숲과 청옥산의 숲이 함께 만들어낸 계곡이다. 무릉(武陵)이란 이름은 도연명의 <도원화기>에 나오는 무릉도원에서 연유한다. 낙원을 염두에 둔 이름이다.

계곡의 시작을 알리는 무릉반석은 사람 천 명이 앉을 수 있는 거대한 암반이다. 다녀간 시인 묵객들의 기념각명이 반석 위에 새겨져있다. 숲이 길러낸 오솔길을 한 발 한 발 걸으면 숲은 깊어지고, 온갖 새들과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밤하늘의 별처럼 숲의 천장에서 쏟아진다. 별빛이 쏟아지는 밤길을 걷듯이 숲길을 걸어 들어가면 무릉도원의 흐르지 않는 시간이 흐른다. 쏜살같이 흘러가던 시간은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처럼 숲의 길목 길목에서 산산이 부서진다. 삶이 힘든 것은 아마도 쏜살같이 흘러가버리는 시간 때문일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힘겨웠던 시간들이 다가와 부서진다.

묵호항

묵호항과 논골담길

바다의 진정한 풍경은 항구가 아닐까. 1941년 개항한 묵호항은 동해안의 어업기지다. 만선을 염원하는 고깃배들이 먼 바다를 향해 뱃머리를 세우고, 만선으로 돌아온 배들은 힘겨웠던 몸을 푼다. 부두에서 그물을 마주잡은 어부의 손끝에서는 파도 소리가 들려오고 주고받는 표정과 표정 사이에는 두터운 삶의 이야기가 쌓인다. 타인의 삶으로 삶을 들여다보면 삶은 신성해진다. 허기진 갈매기들이 부두를 기웃거린다.

논골담길

묵호항에서 약 1km 거리에 묵호등대가 있다. 묵호등대로 오르는 길의 이름은 논골담길이다. 논골 마을은 묵호항의 대표적인 마을이다. 30년 전부터 부족해지기 시작한 어자원으로 인해 주민들이 하나 둘 마을을 떠나야 했고, 2만여 명에 달하던 주민은 현재 4천여 명으로 줄었다. 2010년부터 동해문화원은 점점 위축되는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묵호등대담화(談畵)마을 논골담길’ 사업을 추진했다. 묵호항을 배경으로 살아온 논골 사람들의 이야기가 골목골목 담벼락에 그려져 있다. 담화가 그려진 골목길에 접어들면 길을 따라 푸른 바닷물이 차오르고 명태·오징어·가오리가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그 정상에 묵호등대가 있다. 1963년 건립된 묵호등대의 주변은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공원으로 조성되어있다. 등대에 오르면 동해가 한눈에 보이고 지나온 해변과 계곡ㆍ철길ㆍ항구의 풍경을 품고 있는 동해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많은 사람들이 멀리 바다를 바라본다. 그 먼 시선 하나 하나는 시선이기 이전에 진한 삶에서 온 독백들처럼 보인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독백의 문장들이 푸른 바다 위에서 반짝인다. 동해시의 풍경에는 지친 삶의 반대편을 볼 수 있는 낭만의 빛깔과 서정이 배어있다.

묵호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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