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읽는다 '물'- 시가 된 물

이형기 시인(1933~2005)


얼음 속에 갇혔다 빠져나온 물은

실눈을 뜨고 살며시 대지에 스민다.

스며선 뿔뿔이 흩어지는 물

네덜란드의 둑으로도 가고

백두산 천지로도 기어오른다.

마나과의 지진 터

그 폐허를 찾아가서는

늙은 겨울의

해진 구두 밑창을 적시는 물도 있다.

그러나 어떤 한 줄기는 엉뚱하게

내 혈관 속으로 기어든다.

겨우내 검게 응어리진 피를 풀자는 뜻인가

그래서 나를

슬픔을 다는 저울침의 눈금처럼

파들거리게 하자는 뜻인가

쳐다보면 뿌연 하늘

하늘에도 벌써 물 한 줄기 스며들었고나!
 

출처 〈그 해 겨울의 눈〉(고려원,1985)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