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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종교이야기 8. 술과 불음주계

‘취하게 마시지 말라’가르쳐

절집에서는 흔히 술을 ‘곡차(穀茶)’라고 부른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조선시대 때 진묵 대사(1562~1633)가 술 마시길 좋아했는데 ‘술’이라고 부르기가 겸연쩍어 ‘곡차’라고 불렀다는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진묵 대사가 ‘겸연쩍어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대승불교권에 해당하는 우리나라 승단이 그 이전부터 술을 금해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고승들의 일화에는 ‘곡차’가 자주 등장한다. 이런 배경에는 술 마시는 행위 자체만으로는 계를 어겼다[犯戒]고 보지 않는 의식이 바닥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음주는 행위만으로 죄가 되는 성계(性戒)가 아니라 행위만으로는 죄가 되지 않는, 대신 이로 인해 다른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어 금지한 차계(遮戒)이다. 중계(重戒)보다는 경계(輕戒)에 가깝다.

음주, 행위자체는 죄 해당 안 돼
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술을 허용하기도, 금하기도 했다. 〈사분율〉 중 음식과 약에 관한 규정을 설명한 ‘약건도(藥度)’를 보면 “취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 때나 마셔도 좋고, 취했을 경우에는 마시지 말라”거나 “오늘 받은 술을 내일 마시지 말라”며 음주를 제한적으로 허용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반면 술을 금한 경전은 ‘중아함’ 중 〈가나치경〉, ‘증일아함’ 중 〈마혈천자문 팔정품〉과 〈결금품〉, ‘장아함’ 중 〈삼취경〉과 〈선생경〉 등 다수가 있다. 이 중 〈선생경〉이 대표적인데 “재물이 없어지고, 병이 생기며, 다툼이 있게 되고, 나쁜 소문이 퍼지고, 성을 잘 내게 되며, 지혜가 줄어든다”며 금하고 있다.

술에 대한 부처님의 상반된 견해에 비춰볼 때 초기 교단은 음주를 허용했지만 대승불교가 융성해지면서 육식과 마찬가지로 음주로 인해 폐해가 발생하고, 이 과정에서 금기시 됐을 것이라 짐작된다. 달리 말하면, 부처님은 술을 마실 때도 음식을 먹을 때와 같이 탐심과 집착을 일으키지 않으면 마셔도 무방하다고 가르쳤다가, 대승불교의 흥기와 중국 전래를 거치면서 ‘불음주’가 엄격한 계율로 적용됐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부처님과 기타 태자와의 대화는 이런 추측에 조금 더 무게를 실어준다. 오계를 수지한 기타 태자는 부처님께 불음주를 지키기가 어렵다며 이렇게 말한다. “불음주계를 지키기 어려워 자칫 죄를 지을까 두렵습니다. 오계를 버리는 대신 십선계를 받고 싶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태자에게 “술을 마시거나 마신 후 나쁜 짓을 하는가.” 묻습니다. 태자가 “때때로 술을 마시고 오락을 즐기지만 계율을 생각해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하고 답하자, 부처님은 “그대 말과 같다면 종신토록 술을 마신들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약건도’편의 가르침처럼 ‘불음주계’에 깃든 의도가 술을 마시는 행위 자체가 아닌, 취할 정도로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대화다. 이런 경전 상의 내용들은 요즘 오계 중 ‘불음주’계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나는 근거로 작용한다. 군(軍)법당 등 일부 사찰 수계식에서 오계 중 불음주계를 줄 때 ‘술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대신 ‘술을 취하도록 마시지 않겠습니다’라고 수지하는 사례가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오계 중 ‘불음주’의 시대 변화
직장생활을 하는 현대인들에게 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간관계의 연장이다. 직장 상사가 권하는 술잔을 거부할 수 있는 강심장의 부하직원은 많지 않다. 이럴 경우, 계를 받은 불자는 오계를 수지하기 위해 술을 거부하기도, 술잔을 받고 ‘불음주’계를 범하기도 난처했던 게 사실이다. 이런 변화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적절한 대응이라 생각한다. 문제는 부처님이 기타 태자에게 말했듯이 술을 마신 후 허튼 짓을 하지 않을 정도로 절제하면서 마실 수 있는가하는 점이다.

불음주계에 대한 경전상의 해석과 무관하게 우리나라 사찰은 예부터 술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앞서 ‘곡차’의 유래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고려사〉 등 옛 문헌에서는 ‘사찰에서 누룩을 만들어 팔았다’는 기록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불교가 문란해진 고려 말에는 사찰에서 술을 팔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억불을 시행하는 조선조에 들어 조금 수그러지지만 사찰의 재정확보를 위해 누룩을 제조, 판매하던 행태는 구한말까지 이어진다.

1907년 조선 재정고문부에서 조사한 자료에는 “경남에서 승려의 부업으로 누룩을 제조, 판매하는 자가 많다. 동래 범어사·양산 통도사·합천 해인사·사천 옥천사 등으로 그중에서도 통도사가 가장 유명하다. 범어사·옥천사도 버금간다”고 적고 있다. 범어사의 경우 ‘매년 100명의 승려가 2300석 이상의 밀로 누룩을 만들어 팔았다’고 나온다. 이런 폐습은 1911년 통도사 주지를 맡아 사찰을 일신시킨 구하 스님 등 걸출한 스님들의 등장과 함께 막을 내린다.

윤완수 기자  yws37@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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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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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정애 2018-11-06 10:54:10

    제 생각으로는 불음주는 음주 후 행위 뿐 아니라 곡식이 워낙 부족해 먹고 살 양식도 모자란 형국에서 술까지 빚어 먹지 말라는 게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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