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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로 배우는 불교 9. 〈법화경서사보탑도〉
  • 이승희/홍익대학교 강사
  • 승인 2016.07.29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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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 7만 자 법화탑 모양 따라 사경

〈법화경서사보탑도〉, 고려후기, 일본 교오고코쿠지(敎王護國寺) 소장.

고려후기에는 국가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귀족들의 개인적인 발원으로 널리 사경이 조성되어 그 어느 때보다 귀족적이고 화려한 사경문화가 꽃 피었다. 사경은 감색 혹은 자색 등으로 물들인 고급스런 한지에 금 또는 은니로 변상도를 정밀하게 그려내고, 표지까지도 소담스런 넝쿨진 꽃으로 아름답게 장엄하고 있다. 사경은 공덕을 쌓기 위한 수행이나 전법의 방편으로 그 가치가 크지만 고려인들은 사경을 고려후기의 우수한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예술적인 가치와 아름다움을 지닌 창작물로 승화시켰다.

일본 교오고코쿠지(敎王護國寺) 소장의 〈법화경서사보탑도(法華經書寫寶塔圖)〉(이하 보탑도)는 고려후기의 사경 중에서도 매우 특별하다. 7층 탑 모양의 이 그림은 사실 〈법화경〉의 6만 9384자를 한 자 한 자 공들여 법화탑의 모양을 따라 쓴 사경인 것이다. 이러한 형식의 사경변상도는 고려에서도 유일한 예로서 어떠한 상황에서 이러한 사경형식이 만들어졌는지 궁금하다.

이 보탑도는 폭이 61cm, 보탑의 높이는 225cm로 상당한 규모로 미루어 보아 개인 원당이나 사찰의 전각에 걸렸던 것으로 추정되며, 발원문의 내용이 증명해 준다. 발원문에는 신안공 왕전(新安公 王佺, ?∼1261)이 왕의 수명장수와 국가의 태평과 백성의 편안함을 기원하며 1249년 2월에 발원한 것임을 신효사(神孝寺)의 승려가 적고 있다. 또한 어린아이들이 모래를 모아 탑을 세운 놀이만 해도 그 공덕으로 성불할 수 있다는 〈법화경〉 ‘방편품’의 내용을 언급하며, 하물며 〈법화경〉을 탑으로 사경한다면 그 복덕이 한량없을 것이라며 〈법화경〉에 의한 공덕을 찬탄하고 있다.

보탑도를 발원한 왕전은 왕실의 종친이자, 원종(元宗, 재위 1259~1274)의 비인 경창궁주(慶昌宮主, 생몰년 미상)의 아버지이다. 왕전은 1239년과 1245년 2차례에 걸쳐 몽고와의 강화를 위해 사신으로 갔으며 두 번째 사신행은 약 5년에 걸친 고된 행로였다. 이후 1250년과 1252년 몽고가 침임하였을 때는 몽고군을 맞아 화친을 위한 실무교섭을 담당했던 인물로서 그는 고종년간(1213~1259)에 활동했던 정치적인 핵심인물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보탑도는 왕전이 약 5년에 걸친 두 번째 사신행에서 돌아온 1249년 2월에 자신의 무사함에 감사하며 신효사(神孝寺)의 전향도인(典香道人)에게 쓰게 한 것이다.

신효사는 921년(태조 4)에 창건한 사찰로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에 위치한 왕실의 원당으로서, 1230년부터 고려 말까지 천도재나 우란분재 등 왕실의 각종 불교의례가 행해졌던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찰이었다.

이 보탑도는 왕실 인물의 발원으로 조성된 13세기 중엽의 사경변상도로서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북송의 마지막 황제 휘종(徽宗, 재위 1100~1125)이 하사한 변상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 주목된다. 고려 예종 때의 사람인 학사 권적(學士 權適, 1094~1147)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115년 송나라 최고의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에서 유학을 하고, 갑과(甲科)에서 장원급제까지 한 고려 최고의 석학이다.

고려에 돌아오기에 앞서 권적은 한 관상가를 만났는데, 그가 권적에게 ‘당신은 재주는 많은 데 수명이 짧으니 대승경을 독송하여 수명을 늘리도록 하십시오’ 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권적은 〈법화경〉을 3일 만에 암송하니 그 놀라운 이야기를 들은 송황제가 권적을 불러 치하하며 관음상과 법화서탑을 한 폭씩 내려주었다. 본국으로 돌아와서도 권적은 계속해서 〈법화경〉을 독송하여 수명이 늘어 57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권적의 사후에 관음도는 권학사의 딸이 보관하고 보탑도는 아들 중 승려가 된 권돈신(權敦信, ?~?)이 갖고 있었다고 하는데, 오랜 동안 보탑도의 행방이 묘연하였다. 이후 권학사의 증외손자인 최자(崔滋, 1188~1260)가 경상북도 상주의 수령으로 있을 때, 1243년 미면사(米麵寺)를 새로이 수축하고 백련결사 2대주인 정명국사 천인(靜明國師 天因, 1206~1248)을 초청하여 법회를 가졌다.

이 때 한 노승이 보탑도를 가져왔으니 약 100여 년이 흘러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된 것이다. 보탑도가 사불산(四佛山)의 백련사라고 할 수 있는 미면사에서 출현하였다는 점은 고려후기 천태종의 부흥과 깊은 관련이 있다. 당시 법회를 주관했던 천인은 보탑도의 출현에 감격하여 시문을 작성하였는데, 그 시문에서도 “학사가 죽은 후에 전하지 않다가 백련결사를 만들자 하늘과 용도 또한 기쁜 마음으로 이내 옛 물건을 가져와 신기롭게 주었다”라고 적어 보탑도의 출현을 백련결사운동의 부흥과 연결시켜 신비롭게 여겼음을 적고 있다.

이승희/홍익대학교 강사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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