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유’ 아닌 잠시 맺은 아름다운 인연

부처님께서 탁발하시다가 빈터에 버려져 있던 어린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부처님은 아이를 거두어서 절에 데리고 오셨지요. 그리고 아이는 자라서 계를 받아 정식 스님이 되었습니다.

스님이 된 아이는 어느 날 자신을 버린 생모를 물어물어 찾아갔습니다. 반듯한 스님의 모습으로 자신을 찾은 아이를 마주한 생모는 얼마나 황망했을까요? 어쩌면 생모에게 있어 그 아이는 숨기고 싶은 과거였을 수도 있고, 영원히 후회하고 자책하게 만드는 마음의 멍이었을 테지요.

그런데 스님은 생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허물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저 저를 다시 만난 것을 기뻐하십시오. 제 전생의 악업으로 버려진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금생에 어머니의 태를 빌려 이렇게 태어났으니 어머니는 제 복전입니다. 제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러니 부끄러워 마시고 빨리 여래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가십시오. 어머니는 저를 회임하셨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아주 큰 이익을 얻으실 것입니다. 저는 제게 베푸신 어머니 은혜에 보답하려 합니다. 어머니께서 부처님을 뵙고 그분께 공양 올리며 선근을 심고 보리심을 일으키시기를 바랍니다.”

〈부사의광보살소설경〉이란 제목의 경에 담긴 이야기입니다. 이 경을 읽으면서 한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난다는 것, 한 생명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자꾸 생각하게 됐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려지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 있을까요? 그리고 사연이야 어찌되었든 제 자식을 낳자마자 버린다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있을까요?

그런데 이 경에서 버려진 자식이 생모를 찾아가서 하는 말 속에는 아무리 현실이 기구하고 비참해도 부모자식의 연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임을 일깨워줍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만날 수 있도록 인간의 몸을 받게 해준 인연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식에게 있어 부모는 복전입니다. 부모에게 있어 자식은 복의 씨앗이요, 그 복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 아주 커다란 보리수가 되게 해주는 터전입니다.

자녀는 제2의 ‘나’입니다. 아무리 부모에게 ‘자녀에게 집착하지 말라’고 일러줘도 소용없습니다. 자식을 향한 그 애끓는 마음, 영원히 품 안에서 호호 불며 아끼고 싶은 마음을 어쩌겠습니까. 하지만 부처님은 자녀에게 다음의 다섯 가지를 해줘야 한다고 일러줍니다.

첫째, 자식을 악으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둘째, 자식에게 선이 굳건하게 서도록 해야 합니다.

셋째, 자식에게 기술을 가르쳐야 합니다.

넷째, 어울리는 짝을 찾아 줍니다.

다섯째, 적당한 때에 재산을 물려줘야 합니다.

저 유명한 〈육방예경〉의 한 대목입니다. 이 이야기도 자세히 보십시오. 부모가 자식에게 해줘야 할 것으로 가장 먼저 제시하는 것이 악으로부터 보호하고 선을 행하게 한다는 사항입니다. 좋은 것 먹여주고 입혀주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을 잘 분별하도록 일러주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이지요.

요즘 교육현장에서는 아우성이다 못해 비명이 들리고 있습니다. 공교육이 무너지고 있고 교권이 침해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장 큰 피해자는 우리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아이들 인성교육은 누가 맡아야 할까요? 〈육방예경〉에 의하면 학교 선생님 이전에 부모가 그 담당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악행에서 멀리하고 선행을 짓도록 일깨워주는 일은 마치 출가수행자가 재가신자에게 해야 하는 의무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자식에게 있어 부모는 정신의 스승이기도 하다는 말이 됩니다.

아, 그러니 한 아이의 부모 된다는 것이 어찌 쉬울 수 있겠습니까?

자식이 내 맘대로 된다면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잘 압니다. 색수상행식으로 이뤄진 이 몸과 마음이 무상하고 괴롭고 그래서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데 내 몸 밖의 한 생명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는 일이 헛되다는 사실을….

자식에게 바른 길을 일러주려니 부모는 또 얼마나 몸가짐 마음가짐을 삼가고 또 삼가야 할까요?

흔히들 애물단지라느니, 전생에 죄를 갚기 위해 만난 인연이라느니 라며 부모자식간을 말하곤 하지만 그건 틀렸습니다. 불교에서는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세상에서 둘도 없이 소중한 불연(佛緣)의 단초입니다.

“내가 너 때문에 하고 싶은 것 못 했다.”

“너는 내 인생의 걸림돌이다”

이렇게 푸념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아들딸들아, 너를 잉태하고 키우면서 내가 참 많이 인생공부했다.”라고 감사인사를 자식들에게 보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식이 아니었다면 인생의 쓴맛단맛을 어찌 알았을 것이며, 자신의 부족함과 용렬함을 어찌 깨달았겠습니까? 그러니 절에 계신 부처님만이 내 인생의 스승이 아니라 어쩌면 집에 있는, 당장 오늘 아침까지도 내 속을 뒤흔들고 울화가 치밀어 오르게 만든 아들과 딸이 내 진짜 스승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자식이 내 인생의 교과서임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부잣집 외아들 야사가 어느 날 아침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끔찍하다’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집을 나섰고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 그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오직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 재산을 불려왔고, 그렇게 모든 부와 명예를 함께 누리다가 어느 날 이른 아침 그 아들이 ‘끔찍하다’라고 말하며 사라졌으니 말입니다.

다행히 아들 야사는 이른 아침 숲 속 수행처에서 부처님을 만나 진리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아들을 찾아 나선 그의 아버지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의 모든 감각에는 오직 아들뿐!

자식! 자식! 자식!

오직 자식만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아들의 흔적을 용케 찾아냈고 급기야 부처님 앞으로 오게 되었지요. 그런데 부처님은 그런 아버지가 그토록 혈안이 되어 찾던 아들을 슬그머니 감춰버립니다.

부처님이 너무 매정하게도 느껴집니다. 하지만 온통 아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 아버지를 진정시킬 방법은 이것 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들이 바로 옆에 있건만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아버지에게 부처님은 아마 나직하고도 청아한 음성으로 안부를 묻고 가벼운 인사를 건네셨을 것입니다. 대화가 오가는 사이에 아버지는 잠시 마음에서 아들을 내려놓고 성자와 오롯하게 마주 앉은 탈속(脫俗)의 즐거움을 잠깐이나마 맛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자리에서 ‘야사의 아버지’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존재했을 테고, 부처님은 그런 그에게 진리의 말씀 한 자락을 들려주었지요. 그 직후 장막을 거둬 아들 야사의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아버지는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담담하게 아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기뻐할 뿐입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늘그막에 자식을 봤습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요? 자식 하나 기르는 재미로 생을 보내고, 더 늙어서는 그 자식에 노후를 의탁할 마음이었지요. 그런데 한창 재롱을 부릴 일곱 살 나이에 아들이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이 그리워 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결국 염라대왕에게까지 가서 부탁하게 됐지요.

“제가 그 아들 하나만 믿고 살았습니다. 제가 늙은 뒤에는 아들에게 의지할 생각으로 살아왔는데, 제발 다시 데려갈 수 없겠습니까?”

아버지의 부탁이 너무나도 간곡한지라 염라대왕은 알아서 데려가라고 허락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저승으로 간 아들을 찾아내서 돌아가자고 말했지요.

그런데 어린 아들의 입에는 믿기 어려운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제가 잠시 몸을 의탁해서 지냈을 뿐인데 어찌 이곳에서까지 부자관계일 수 있겠습니까? 저는 따라가지 않겠습니다.”

설마 내 자식이 이런 말을 할 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크게 상심한 아버지는 이승으로 돌아와 부처님을 찾아갔지요. 부처님은 이렇게 달래주었습니다.

“부모 자식의 인연으로 모여 사는 것은 간밤에 여관에 깃든 나그네들이 아침에 일어나면 뿔뿔이 흩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한데 어찌 자기 소유라 생각하며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가.”

얼핏 듣기에 참으로 매정하다 싶지만 삶이란 것이 또 이러한 것 아니겠는지요. 부처님은 그 아버지에게 조금 더 자세하게 무상의 법문을 들려주셨고, 아버지는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다고 합니다. 〈법구비유경〉에 등장하는 이 이야기는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줍니다.

자식은 부모의 보험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자식을 제대로 길러내는 것이 삶의 의미요 보람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자신의 삶을 도배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식은 ‘나’가 아니요, ‘나의 것’이 아닙니다. 자식이란 내게 잠시 와서 깃들었을 뿐, 그의 인생과 부모인 내 인생은 길이 다릅니다. 그러니 부모 자식의 인연을 맺는 동안에는 복을 심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되, 그 관계가 변함없이 영원하리라는 생각은 품지 말라는 것이 경전의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자식을 상대로 이렇게 마음먹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자식은 부모에게 인생공부를 제대로 시켜주는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공들여 길렀는데!”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데!”

이렇게 말하면서 노년의 시대를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내 자식으로 와줘서 고마웠다. 너를 키우면서 참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는 시간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부처님은 후자를 더 괜찮은 부모라 여기실 것 같습니다. 100세 시대를 앞둔 세상, 모든 부모들이 더 활기차고 즐거운 인생을 보내기에는 후자의 생각이 더 낫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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