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벌판 호령한 고구려인 기상 새기며
“남북 평화통일 세계 중심 국가” 발원

24일 안개 자욱한 백두산(서파)에 오른 순례단이 남북평화통일과 세계평화를 기원하며 축원문(총무원장 춘광 스님)을 낭독하고 있다.

천태종 도용 종정예하, 총무원장 춘광 스님 등 종단 비구ㆍ비구니 스님 42명으로 구성된 ‘중국 심양·백두산ㆍ집안 고구려유적 순례단’이 7월 23일부터 27일까지 요령성(遼寧省), 심양(瀋陽), 길림성(吉林省) 백두산(북파, 서파)과 집안(集安)의 광개토대왕비와 대왕릉, 장수왕릉(장군총), 국내성, 환도산성, 5호묘 등 고구려유적지를 둘러봤다. 순례단의 4박 5일을 동행취재했다. 편집자

지난 7월 23일 오전 6시. 인천공항은 한국 관광을 마친 중국인 등 외국인들과 해외로 떠나는 한국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에 중국 심양·백두산ㆍ집안 고구려유적 순례단 스님들이 약속 장소로 모여들었다.

종정예하 등 스님 42명 동참
이번 중국 순례에는 도용 종정예하, 총무원장 춘광스님, 감사원장 용암 스님, 총무부장 월도 스님 등 비구ㆍ비구니 스님 42명이 함께했다. 출국 수속을 마친 천태종 중국 순례단은 심양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오전 8시 5분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심양 도선(桃仙)국제공항에 안착했다.

순례단의 첫 순례지는 청나라 태종 누르하치(努爾哈赤)의 8번째 아들인 홍타이지(皇太極)의 무덤이 있는 북릉(北陵)공원. 이곳은 조선 인조의 ‘삼전도의 굴욕(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가 삼전도로 나아가 청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이란 아픔이 서려 있는 곳이다. 북릉 공원은 삼전도의 굴욕으로 인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로 끌려 온 조선인 수십만 명의 노역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순례단은 전통차를 타고 북릉공원을 관람한 뒤 통화(通化)로 이동했다. 통화까지는 약 300km. 3시간 남짓이면 도착하는 거리다. 그런데 지난해 지방행정연수원에 참가한 한국공무원들이 탄 버스가 길림성 집안시 인근에서 추락해 사망자가 발생하자 길림시 정부에서 지방도로 최고속도를 40km로 제한하고 이를 엄격히 적용하고 있어 속도를 낼 수 없어 4시간 30분이 걸렸다.

중국에선 주말에 왠만하면 차가 막히지 않는다고 한다. 남자들이 주말에 집안일을 도맡아 하기 때문이란다. 현지 가이드의 “비가 와서 그런지 남자들이 집안일 하지 않고 많이 나왔나보다”라는 말에 스님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통화로 가는 내내 3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가 계속됐다.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흘렀다. 여기저기서 “아이고, 더워라”는 말이 터져나왔다. 이때 총무원장 춘광 스님이 “순례를 떠나기 전 종정예하께서 ‘(아무리 무더운)여름이라도 햇볕을 받아야 기운이 생긴다. (햇볕을)받지 않으면 좋은 기를 받지 못한다. 더우면 더운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하자 버스 안은 일순간 조용해졌다. 이후 순례 기간 내내 ‘덥다’는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심양에서 통화로 가는 고속도로 양 옆으로 옥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한 스님이 “내일 천지를 볼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현지 가이드가 “백두산은 아이 얼굴과 같습니다. 웃다가 울고, 울다가도 웃습니다. 가봐야 합니다. 저녁에 편히 쉬시고 내일 뵙겠습니다”라고 답하자 버스 안은 웃음소리로 가득찼다. 수십 번, 수백 번 백두산을 올랐을 가이드의 말이 아니더라도 온전한 천지를 볼 수 있는 날은 많지 않다는 건 순례단 스님들도 다 아는 얘기일 터. 숙소에 도착한 순례단은 맑게 갠 백두산 천지를 볼 수 있다는 기대를 품은 채 노곤한 하루를 마감했다.

순례 이튿날 새벽 일찍 일어나 아침공양을 마친 순례단 스님들이 호텔 로비에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법랍이 오래된 한 스님은 1990년대 백두산 천지를 본 경험담을 후배 스님들에게 들려주면서 ‘천지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을 부풀렸다. 한 비구니 스님은 순례에 동행한 기자와 여행사 관계자, 가이드에게 “좋을 일이 있을 것”이라며 합장주를 손목에 걸어주었다. 동행자들에 대한 배려와 함께 ‘백두산 천지 친견’에 대한 간절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아침부터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과 전날 밤 같은 호텔에 투숙한 대구에서 온 한국불자들이 “이틀 동안 날씨가 좋지 않아 천지를 못봤다”고 한 말이 떠올라 걱정을 하는 스님들도 있었다. “천지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라는 질문에 “천지분간이 안되는 사람이라 천지를 아직 못봤습니다”라고 요즘 유행하는 아재개그로 받아낸 스님과 “천지를 못 본 사람이 ‘천지’라서 천지라고 부릅니다”라는 가이드의 농담도 정겹기만 하다.

순례단 중에는 백두산에 여러 번 와 본 스님도, 이번이 처음인 스님도, 15년 만에 해외성지순례를 나선 스님들도 있었다. 백두산으로 오르는 길은 세 곳(북파, 서파, 남파)이다. 북파는 길림성 이도백하, 서파는 길림성 백산시, 남파는 백산시 장백현에서 오를 수 있다. 현지 가이드에 따르면 남파코스는 도로공사 중이어서 잘 이용하지 않고 북파코스와 서파코스가 주된 관광코스다. 순례단은 24일 서파코스로 ‘천지 친견’길에 올랐다.

점심공양차 들른 식당에 총무부장 월도 스님과 연락이 닿은 길림성 연길시에 사는 윤성천 불자 가족이 무려 5시간 동안 차를 달려 순례단을 찾아왔다. 윤 씨의 딸 정미(7, 여) 양은 종정예하와 총무원장 스님에게 꽃다발을 공양했고, 이튿날 백두산 북파까지 동행했다.

백두산 천지서 평화통일 기원
백두산 서파 코스로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주차장에서 셔틀 버스로 갈아타고 50분을 달려 백두산으로 오르는 계단 앞 주차장에 닿았다. 천지까지의 계단은 총 1442개. 쉬엄 쉬엄 오르는 길, 하늘은 천변만화(千變萬化) 그 자체였다. 순식간에 개었다 흐렸다를 반복했다. 순례단은 천지를 못 보고 내려오는 한국 관광객들의 “스님들을 따라가야 천지를 볼 수 있는데…”라는 아쉬움 섞인 푸념을 들으면서 걱정 반, 희망 반을 품은채 길을 재촉했다.

순례단 모두가 정상에 올랐을 때, 좀 일찍 올라간 몇몇 스님이 “천지가 열렸다(천지를 봤다)”고 해 기대감에 부풀었지만 그것도 잠시, 백두산 천지는 자욱한 안개로 휩싸였다. 이에 아랑곳 않고 순례단은 안개 자욱한 천지를 바라보고 조용히 <반야심경>을 독송하며 국태민안과 남북평화통일, 세계평화를 염원하고 수해로 고통받고 있는 중국인들의 빠른 쾌유를 기원했다. 총무원장 춘광 스님은 250만 천태종도의 마음을 모아 준비한 축원문을 낭독, 민족의 평화통일과 인류 평화가 실현되기를 발원했다. 아울러 중국 북동부지역에 쏟아진 폭우로 인해 생을 마감한 이들의 극락왕생과 조속한 피해복구를 기원했다.

하지만 하늘은 여전히 천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이 때 종정예하의 “(순례단의)마음이 덜 깨끗해서 (천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마음이 깨끗했으면)올라오자마자 보였어야 하는데…”라는 말씀을 들은 대중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에 종정예하께서 미소를 지으며 “내 말이 거짓말인 줄 아나 봐”라고 하자 안개의 장막에 싸여 있던 천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청명하지는 않았지만, 천지를 분간할 수 있을 정도의 모습을 보이자 순례단과 관광객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환희의 순간이었다. 저마다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며 기념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언제 닫힐지 모르는 천지와 자신의 모습을 담기 위해서였다. 오랜 기간 가이드를 한 이도 이 광경에 감동을 받았다고. 비록 온전한 모습이 아니었지만, 서파코스에서 본 천지는 다음날(25일) 북파코스에 대한 기대감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전날의 감동을 간직한 채 새벽밥을 먹고 북파코스 등정을 준비하고 있는 순례단 스님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화창하다 못해 무더위가 예상되는 날이었지만, 온전한 백두산 천지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숙소에서 이도백하까지 약 2시간, 이도백하의 한 호텔에서 셔틀버스를 갈아타고 북파코스 입구까지 1시간, 다시 20분을 더 오른 뒤 봉고차로 갈아타고 25분을 더 가야 했다. 마침내 도착한 백두산 정상은 맑고 화창했다. 길게 줄 지어선 관광객들의 모습도 장관이었다.

급한 마음에 B코스(북파는 A, B코스로 관람할 수 있다)로 가서 맑고 푸른 천지를 만났다. 가이드가 “10번 오면 1번 볼 수 있다는 천지를 이틀 연속 봤으니 순례단의 운이 억세게 좋은 셈이다”라고 하자 순례단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발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관광객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순례단은 전날에 이어 천지를 바라보고 〈반야심경〉을 조용히 독송하며 남북평화통일과 세계 평화를 기원했다. 마침 하늘에 쌍무지개가 펼쳐져 관광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맑고 푸른 천지 친견’의 소원을 성취한 순례단의 하산길 발걸음은 가벼웠다. 내려오는 내내 얼굴에는 백두산 야생화같은 웃음꽃이 만연했다. 순례단은 장백폭포를 관람한 뒤 다음날 집안의 고구려유적을 답사하기 위해 통화로 이동했다.

고구려 기상 되새기며 ‘정진’ 다짐
다음날(26일) 일정은 집안시에 있는 국내성, 환도산성, 광개토대왕비와 능, 동양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장수왕릉(장군총), 고구려 귀족의 무덤인 5호묘 탐방. 26일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흩뿌리는 비였기에 개의치 않았다.

순례단은 말없는 유적지에서 과거 만주벌판을 호령했던 고구려인들의 웅혼한 기상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남북이 평화통일을 이뤄 세계의 중심이 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27일 오전 청나라 초기궁전인 심양고궁을 관람한 뒤 순례 일정을 모두 마친 순례단.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모두 건강하게 중국 유적 답사를 무사히 마쳤다. 본산(구인사)에 돌아가서 더욱 정진해 성불을 이루기를 바란다”는 총무원장 춘광 스님의 당부에 대중들은 “더욱 열심히 정진하겠다”고 다짐했다.

스님들의 순례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고, 사찰에서 하는 수행만 수행이 아니다. 스님들의 발걸음 한 걸음, 한 걸음은 운수행각(雲水行脚)의 길이다. 또한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가 걸었던 고행의 길이요, 성불을 이룬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 전역을 걸으며 펼쳤던 전법의 길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반도의 평화통일과 세계평화를 발원하고자 진행된 천태종의 심양ㆍ백두산ㆍ집안 고구려유적 순례에 동참한 스님들의 마음과 얼굴에 피어오른 염화미소의 향기가 세계 곳곳에 퍼져 연화장세계가 이룩되길 기원한다.

아름다운 본 모습을 드러낸 백두산 천지.
총무부장 월도 스님의 설명을 듣고 있는 종정예하.
백두산(북파) 천지에서 기념촬영.
광개토대왕비(호태왕비) 앞에서 기념촬영.
장수왕릉에서 기념촬영.
총무원장 춘광 스님이 윤정미 양으로부터 환영 꽃다발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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