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쓰면 ‘똑똑전화’, 못 쓰면 ‘멍청전화’

TV중독ㆍ인터넷중독서 진화한 ‘스마트폰 중독’
‘가장 멍청한 세대’ㆍ‘천박한 사람’ 비난여론 ‘暗’
SNS, 튀니지 변혁ㆍ이집트 독재 종식 주도 ‘明’
붓다 지혜와 사유, 탁월한 스마트폰 중독 치료제

긴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한 고전 명작이 아예 한 편도 없는 젊은 세대도 적지 않다. 모두 스마트폰이 빚어낸 변화다.

스마트폰, 국립국어원이 순화한 우리말은 ‘똑똑전화’다. 스마트폰이든 똑똑전화든 명분은 같다. 똑똑하거나 스마트하게 만들어주는 매체라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현대인에게 똑똑전화는 아예 몸의 일부가 되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손에 들고 다니거나 옷 속에 지니고 있다. 청소년에게 똑똑전화는 목숨처럼 소중한 ‘절친’이다. 어디 10대만인가. 출퇴근길 대중교통은 똑똑전화에 몰입한 승객들로 넘친다. 만원 지하철에서도 저마다 거머쥐고 눈 번득이며 집중하는 풍경은 낯설지 않다. 아니 아주 자연스럽다.

21세기 들어 IT업계가 ‘창조’한 똑똑전화는 융합미디어라는 말 그대로 지금까지 인류가 개발해온 신문ㆍ전화ㆍ영화ㆍ방송ㆍ인터넷과 같은 모든 미디어를 담고 있다.

정말 똑똑전화는 사람들을 똑똑하게 해줄까? 미국대학의 마크 바우어라인은 단호히 부정한다. 물론 그도 디지털 혁명으로 손쉽고 빠르게 여러 정보와 상품, 오락과 친구를 접할 수 있게 됐다고 인정한다. 젊은이가 시간과 기회를 낭비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있었던 일이라고 이해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 젊은 세대는 그런 습관을 야단스럽고 지속적인 것으로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비판한다. 바우어라인은 서슴없이 그들을 ‘가장 멍청한 세대(The Dumbest Generation)’라고 규정했다. 미국 대학교수에게 스마트폰은 똑똑전화가 아니라 ‘멍청전화’인 셈이다.

바우어라인의 경고는 우리 삶의 풍경화에서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당장 지하철 안에서 대다수 사람이 스마트폰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둘러보라. 의미 있는 탐색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드라마와 야구중계를 즐기거나 인터넷 게임에 열중한다. 20세기 중반 텔레비전이 등장하면서 전문가들이 우려한 ‘바보상자’론이나 ‘TV중독’은 고스란히 인터넷 중독에 이은 스마트폰 중독으로 ‘진화’했다.

20세기에 텔레비전은 집집마다 가족 구성원들이 모이는 거실 중앙에 사뭇 의연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터넷시대가 활짝 열린 21세기에 텔레비전은 개개인의 손 안으로 들어왔다. 똑똑전화가 텔레비전을 품으면서 가족들 사이에 그나마 존재했던 ‘거실 대화’는 시나브로 사라졌다. 바우어라인만이 아니다. 세계적인 경영컨설턴트 니콜라스 카도 인터넷이 ‘천박한 사람들(The Shallows)’―같은 제목의 카의 저서가 국내에서 출간될 때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로 옮겨졌다―을 양산한다고 경고했다.

물론, 어두운 그림자만 드리운 것은 아니다. 일찍이 닐 포스트먼이 텔레비전을 두고 우려한 ‘죽도록 즐기기’의 극한적 행태가 스마트폰으로 증폭된 것은 사실이지만, 즐거움으로 일상의 권태를 벗어나려는 중독과 전혀 달리 일상의 부조리를 이겨내는 새로운 가능성도 발견할 수 있다.

기실 ‘바보상자’ 텔레비전과 ‘멍청전화’ 스마트폰은 비슷한 속성을 지녔으면서도 성격이 확연히 다른 미디어다. 텔레비전으로 대표되는 과거 미디어들이 송신자에서 수신자로 가는 일방향 미디어인데 반해, 스마트폰이 근거한 인터넷은 송신자와 수신자가 고정되어 있지 않은 쌍방향 미디어로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때로는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도 일으킨다. 대표적 보기가 이른바 ‘아랍의 봄’이다. 시사주간지 <타임>이 ‘지구촌 올해의 인물’로 페이스북 창업자를 선정한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분신자살한 20대 청년의 억울한 사연이 삽시간에 사회적 연결망(SNS)을 통해 퍼져갔다. 독재정권이 장악한 신문과 방송은 늘 그랬듯이 모르쇠 했지만, 진실을 알게 된 젊은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곧바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경찰이 무자비하게 진압하자 그 또한 동영상으로 생생하게 퍼트렸다. 결국 2011년 1월, 민중 위에 24년 동안 독재자로 군림했던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도망쳤다. 흔히 ‘SNS혁명’으로 불리는 튀니지의 변혁은 이집트의 독재정권도 무너트렸다.

그래서다. 스마트폰을 놓고 그것이 사람을 똑똑하게 만드느냐, 멍청하게 만드느냐를 논의하는 것은 해답을 찾을 수 없다. 똑똑전화는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스마트폰’이라는 미디어가 아니다. 그 미디어를 소유한 사람의 문제다. 같은 물을 마셔도 독사가 먹으면 독이 되고 젖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듯이, 스마트폰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독이 될 수도, 득이 될 수도 있다.

다만, 문제의 뿌리는 더 깊다. 정보혁명 시대의 네티즌이 자기 성찰로 주체적 삶을 일궈갈 가능성을 끊임없이 훼손하는 세력이 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스마트폰을 팔아 막대한 이윤을 얻는 기업들은 비판의 목소리들을 잠재우려고 안간힘이다. 똑똑전화를 오래 할 때 두뇌에 손상이 온다는 과학적 연구 결과들은 은폐되거나 ‘근거 없는 소문’으로 치부된다. 네티즌들이 똑똑해질 때 권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정치세력도 스마트폰이 ‘위대한 국민’을 게임과 포르노 따위의 선정적 즐거움에 가둬주기를 바란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깨어있어야 할 까닭이 여기 있다.

만일 누군가 의도적으로 생산해낸 단편적인 정보에 의존하며 일상을 게임이나 오락, 포르노로 소비하고 인생을 탕진한다면, 미국 정보기술 사상가의 조롱처럼 ‘천박한 인간’이 되거나 ‘바보’로 전락할 가능성이 거의 100퍼센트다.

일상생활이 굴러가는 맥락을 전혀 모른 채 단편적인 정보만 알고 있는 사람,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쓰레기 정보들에 중독된 사람들을 다름 아닌 똑똑전화가 양산하고 있다는 지적 앞에 과연 나 자신은 얼마나 자유로운지 성찰이 꼭 필요하다.

물론, 멍청한 세대로 전락할 수 있는 ‘굴레’를 개인적인 작심만으로 벗어나긴 어렵다. 스마트폰으로 특정한 문제를 검색하다가 찾으려는 정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며 어느새 시간만 탕진하는 경험은 누구나 했을 법하다. 막연하게 개인의 ‘절제’나 ‘분별’만 강조해서 될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한 시대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는 종교가 나서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스마트폰에 중독되거나 중독되어가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시공간을 마련해주어야 옳다. 무엇보다 불교는 천박한 세태를 치유할 ‘깊이’를 무궁무진 지닌 종교 아닌가. 탐욕스런 서양문명에 맞서 21세기 인류가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데도 불교의 가치는 풍부하다. 똑똑전화가 빚어낸 ‘가장 멍청한 세대’와 ‘천박한 사람’들 앞에 붓다의 지혜와 사유는 탁월한 치료제다.

손석춘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아일보 기자와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을 지냈다.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사)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과 이사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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