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신라의 역사와 혼이 깃든 곳

백제는 한강 유역에 도읍(하남 위례성)을 정하고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져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웁니다. 백제의 전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이 시기를 한성백제(B.C.18~475) 시대라고 부릅니다. 유명한 몽촌토성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부터 21대 개로왕까지 493년간 백제의 수도였죠. 그리고 4세기 후반부터 7세기 후반에 걸쳐 고구려, 신라와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이던 격전지이기도 합니다.

서울 송파구와 허리를 맞대고 있는 지역이 경기도 하남시입니다. 이곳에 옛 산성 하나가 매일 매일 등산객을 반기며 천 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하남에는 이 지역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성산(二聖山), 금암산(金巖山)이 있죠. 이번에 함께 떠나 볼 산성은 해발 209.8m의 이성산에 있는 이성산성(二聖山城)입니다.

유구ㆍ유물 많이 나온 옛 성터

이성산성은 포곡형(包谷形, 계곡과 산 정상을 함께 두른 형태)의 산성입니다. 북쪽으로는 한강 유역과 한강 주변에 접해 있는 여러 성(城)이 한 눈에 보이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이기도 합니다.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에서 북쪽 방향으로 내려오는 줄기와 만나 길게 맥을 형성하는 금암산의 줄기와 접해 있죠.

이성산성의 성벽 높이는 4∼5m, 전체 둘레는 약 2km, 성의 내부 면적은 155,025㎡(약 4만 6977평)에 달한다고 합니다. 현재 발견된 이성산성의 유구는 △남문지 △동문지 △북문지 △서문지 △제1 저수지 △제2 저수지 △장방형 건물지 6곳 △9각 건물지 2곳 △12각 건물지 △장방형 부석 건물지 등입니다. 한양대박물관에서 1986년부터 발굴을 시작, 지금까지 많은 유구와 유물을 발굴했죠. 현재 13차 발굴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성산성으로 떠나 볼까요. 승용차로 가는 방법도 있지만, 대중교통을 추천합니다. 올림픽공원역에서 버스를 타고 이성산성 입구 버스정류소에서 내려 ‘이성산성’ 표지판을 따라 15분 가량 오르면 이성산성 남문지가 나옵니다. 안내판이 잘 돼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남문지에는 저수지와 수로 유구가 펼쳐져 있는데, 5월~6월 경에는 개망초 무리가 쑥쑥 자라 장관을 이룹니다.

다시 오솔길을 따라 10여 분 가량 오르면 성벽을 볼 수 있는 동문지가 눈앞에 나타납니다. 흙길이지만 정비가 잘 돼 있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죠. 동문은 출입구가 성벽 중간에 있어 드나들 때 사다리 같은 장비를 이용해야 하는 현문식(懸門式)입니다. ‘ㄱ’자 형으로 꺾여 있어 적의 공격에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도록 축조됐다고 합니다. 성 축조에 쓰인 돌은 둥글게 잘 다듬었는데요, 마치 옥수수 알처럼 생겼습니다.

동문지 위쪽의 정자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습니다. 백제인도, 신라인도, 고려인도, 조선인도 가파른 길을 올라와 이곳에서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한 숨 쉬어 갔겠지요.

격전지는 아니지만 군사요충지

이성산성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이기는 했지만, 전쟁을 벌일 만큼의 위치는 되지 않았나 봅니다. 발굴 결과 이곳에서 신앙유적이 4곳이나 발견됐습니다. 동문지 위쪽은 산 정상 부근인데, 이곳에 8각과 9각 건물이 직사각형 건물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배치돼 있죠. 전문가들은 동쪽의 9각 건물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 서쪽의 8각 건물은 사직단으로 추정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이곳에 올라서면 전쟁의 상흔보다는 경건한 느낌이 앞섭니다.

이성산성에서는 규모가 큰 저수지와 목간(木簡, 종이가 없던 시대에 글을 적기 위해 썼던 나뭇조각), 철과 흙으로 만든 말, 토기, 기와, 대형 시루, 나무 빗, 나무 망치, 짚신, 나무 팽이, 천 조각, 칠기, 요고(腰鼓, 국악에서 쓰는 타악기의 일종) 등 3000여 점이 넘는 고대 유물이 출토됐다고 합니다. 이 중 목간에는 간지가 기록돼 있어 관심이 집중됐다고 합니다. 이 목간의 앞면에는 ‘戊辰年正月十二日朋南漢城道使…(무진년정월십이일붕남한성도사)’, 옆면에는 ‘須城道使村主前南漢城○○…(수성도사촌주전남한성)’, 뒷면에는 ‘○○蒲(포)○○○○○○…’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1차 저수지에서 출토된 토기는 경주 황룡사지와 안압지에서 출토된 토기와 비슷해 통일신라 때의 것으로 추정합니다. 특히 신라인들이 사용하던 당척 1점이 발견돼 학계가 주목했다고 합니다.

학자들은 목간에 기록된 ‘무진년’을 603년으로 추정, 이성산성의 축조연대를 603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발굴된 유물 중 고려 초기의 청자 조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등으로 이성산성은 축조된 후 200∼300년 가량 사용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성산성은 백제의 산성일까요? 신라의 산성일까요? 이성산성을 발굴하기 전에는 백제의 산성으로 추측했지만, 발굴 후에는 신라의 산성으로 보는 시각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발굴이 끝나지 않아 백제의 산성인지, 신라의 산성인지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선조들이 피땀 흘려 쌓은 산성이 현재까지 전해져 후손들에게 역사의 현장이 되고 있다는 거겠죠.

바람 속에 서 있는 석탑

신앙유적 부근에 난 길 중 위례역사길 코스를 따라 가면 사적 제352호로 지정된 ‘춘궁동 동사지’와 연결됩니다. 울창한 숲 길을 걸으면 산성을 오르며 흘렸던 땀이 싹 사라져 청량감이 온 몸을 감쌉니다. 동사지로 가려면 산을 내려와 차로의 갓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조금 위험합니다. 이성산성 입구로 다시 내려와 동사지로 가는 안전한 코스를 권합니다.

동사지에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보물 제12호 ‘하남 동사지 오층석탑’과 보물 제13호 ‘하남 동사지 삼층석탑’이 우뚝 서 있죠. 동사지 옆에는 동사(桐寺)가 꺼져가던 불법(佛法)의 향기를 다시 피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성산에 있는 전통사찰 선법사에는 보물 제981호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이 등산객을 반깁니다. 이밖에도 객산폭포와 온조왕이 마셨다는 전설이 깃든 ‘온조왕 어용샘’ 등이 있어 옛 백제와 신라의 모습을 상상하게 합니다.

하남시에는 이성산과 연결된 금암산이 있습니다. 이곳 또한 유서 깊은 곳입니다. 금암산은 남서부 광암동과 춘궁동 경계에 해발 321m의 산입니다. 이 산을 따라가면 남한산성이 나옵니다. 남한산성은 이성산성 정상부에서 약 6km 가량 떨어져 있습니다. 조선 후기 관암(冠巖) 홍경모(洪敬謨)가 편찬한 경기도 광주의 읍지(邑誌)인 <중정남한지>에 ‘금암산(金巖山)은 서부면에 있고, 청량산(淸凉山) 북쪽 줄기다. 가운데에 용호동이 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바위가 많고, 바위 색깔이 비단색을 띄고 있어 금암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기록도 전합니다. 금암산 자락에는 약정사지ㆍ자화사지 등 옛 절터가 몇 곳 있다고 합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울창한 숲과 문화유산이 가득한 이성산, 금암산으로 천 년 전으로의 시간 여행을 떠나보세요. 당신의 미래가 그곳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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