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어루만지는 불교설화(255호)

얼마 전 1학기 종강을 앞두고 박사과정을 다니는 도반이 모 대학에서 실시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마땅히 축하해 주어야 할 소식임에도 일순간 마음 한구석에서 뭔가 상쾌하지 못한 감정이 불쑥 치솟았다. ‘질투심’이었다. 누구 못지않게 친하다고 생각하는 도반이었고, 실제 아주 가깝게 지내오던 도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 그를 경쟁자로 여기고 있었던 질투의 뿌리 한 가닥을 자각하게 됐다. 내심 질투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도리가 없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한 그 마음, 질투를 그저 지켜볼 뿐.

‘질투’의 사전적 의미는 ‘타인의 잘 되는 모습을 보며 느끼는 불쾌감에서 증오에 이르는 마음’이라고 한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장 자주 드러내는 질투란 감정은 왜 일어나는 걸까?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타인과 비교하는 상대적 열등감이다. 둘째, 그로 인해 자신이 피해를 보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나머지 하나는 주관적인 인상(선입견)에 의한 불만이다. 세 가지 모두 생각으로 짓는 업(業, karma)에 해당한다. 그래서 고스란히 인과업보의 책에 쌓이게 되는, 녹여내야 할 상념의 종자다. 다음은 〈잡보장경〉에 나오는 설화 한 토막이다.

그림 - 스튜디오 돌

형을 질투한 삼장법사

형제가 불법(佛法)에 뜻이 있어 출가했다. 형은 부지런히 수행해 아라한과를 얻었다. 동생도 경전을 부지런히 익혀 경·율·론을 다 외워 삼장법사(三藏法師)로 불리게 됐다. 나라의 재상이 삼장법사의 명성을 듣고 초빙해 많은 자금을 주며 불사(佛事)를 부탁했다. 얼마 후 완공된 사찰은 탑과 전각이 웅장하고 수려했다. 둘러본 재상은 삼장법사를 더욱 존경하게 돼 수행생활에 무엇 하나 모자람이 없도록 뒷받침했다. 삼장법사는 절이 완공된 만큼 수행력 높은 스님을 초청해야겠다고 생각해 재상에게 아라한과에 오른 형을 초청하고 싶다고 말했다. 재상은 흔쾌히 수락하며 사람을 보내 형을 정중히 청했다. 그리고 삼장법사의 형이 여법하게 수행하는 모습을 본 재상은 그 또한 더없이 극진히 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재상은 수행하는 스님(형)의 모습에 마음이 우러나 천만 냥의 값어치가 있는 비단을 보시했다. 물론 스님은 받지 않으려 했지만, 재상은 막무가내로 떠안겼다. 스님은 재상이 돌아간 후 ‘동생은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하므로 이런 재물이 필요할 것이다’ 생각하며 비단을 동생에게 주었다. 며칠 후 재상은 그보다 질이 조금 낮은 비단을 이번에는 삼장법사에게 공양했다. 그런데 삼장법사는 고마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몇 달이 지나 재상은 또 천만 냥의 값어치가 있는 비단을 삼장법사의 형에게 보시했다. 형은 이번에도 동생에게 비단을 주었다. 그런데 비단을 받은 삼장법사가 질투심에 눈이 멀고 말았다.

삼장법사는 형에게 받은 비단을 들고 재상이 애지중지하는 외동딸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 아버지가 전에는 나를 후하게 대접했소. 그런데 저 비구가 온 후 그가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당신 아버지가 나를 몹시 박하게 대하오. 이 비단을 당신에게 줄 테니 이것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서 옷을 만드시오. 그 옷감이 어디서 났냐고 묻거든 ‘아버지께서 존경하는 그 수행자가 주었다’고 하시오. 그러면 화가 치밀어 올라 다시는 저 비구와 말도 하지 않을 것이오.”

재상의 딸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냐?”며 거절했지만 삼장법사의 회유와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 재상의 딸은 삼장법사가 시키는 대로 아버지 앞에서 비단으로 옷을 만들었다. 재상은 그 비단을 금방 알아보고 생각했다. ‘수행하는 비구는 보기와 달리 아주 나쁜 놈이군. 내가 준 비단을 가지고 내 딸을 유혹하려 들다니.’ 재상은 그 뒤로 비구가 찾아와도 못 본 척 돌아섰다. 비구는 재상의 달라진 태도를 보고 누군가 자신을 모함했음을 짐작했다. 그래서 재상 앞에서 열여덟 가지 신통을 보였다. 이를 본 재상은 크게 놀라 비구의 발을 붙잡고 절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 후 재상은 비구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고, 삼장법사와 딸은 나라 밖으로 쫓겨났다.

긍정의 빛으로 치유하기

이 설화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이야기다. 부처님은 이 가르침과 함께 대중들에게 “그때의 삼장은 바로 이 몸으로 남을 비방했기 때문에 한량없는 겁 동안 큰 고통을 받았고, 지금에 와서도 저 손타리(孫他利)의 비방을 받는 것이다”며 대중에게 “모든 일에 있어 밝게 살펴야 하고, 함부로 비방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질투의 대상은 다양하다. 그런데 결핍이 심할수록 질투가 강해지는 건 아니다. 질투심의 강도와 결핍감이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철학자 버나드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가진 사람이 있다. 그를 마차가 없어서 걸어 다니는 사람과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가진 사람이 지켜본다. 둘 중 누구의 질투심이 강할까?’ 정답은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가진 사람. 상대적 결핍감이 질투심을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는 새 치솟는 질투심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질투하고 있구나.’하고 자각해야 한다. 이후 다음의 순서대로 화해를 시도하면 된다. 첫째,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일이다. 형 비구의 장점과 삼장법사의 장점은 누가 봐도 확연하게 달랐다. 둘째, 자신이 가진 장점에 밝은 빛을 보내는 일이다. 삼장법사가 “형은 수행을 잘하지만 나는 경전에 능하고 불사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사고의 전환이다. 셋째, 기뻐하기(수희찬탄) 단계다. “형의 수행이 높아 참 다행이다. 형과 함께 한다면 불법(佛法)을 더욱 홍포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필자의 경험처럼 친한 친구의 축하할 일에 질투의 감정이 불쑥 치솟는 일을 예방하고 싶다면 미리 자신에게 결핍된 부분이 무엇인지,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점검해보는 게 좋다. 러시아에는 ‘하얀 질투심’과 ‘검은 질투심’이야기가 전한다. ‘하얀 질투심’이 자신의 목표를 향한 긍정의 힘을 선사한다면, ‘검은 질투심’은 악의적인 파괴의 속성을 지닌다. 평소 자신이 갈망하는 부분을 파악하고 집중하는 기회를 가진다면, 질투가 일어날 때 건강한 긍정의 힘으로 이끌기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 이 연재는 백원기 동방문화대학원대학 교수님의 지도로 기획되었습니다.

그림 - 스튜디오 돌
황선미 자유기고가

황선미

동국대학교 국민윤리과 졸업. 계간지 ‘시와 문화’ 통해 등단. 불교계 언론사와 조계종 불교상담개발원에 근무한 바 있다.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과 석박사통합과정(상담심리전공)에 재학 중이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