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학의 밤입니다(255호)

우문이지만 시와 시인의 간격은 어느 만큼일까. 초등학교 때부터 문필가가 꿈이었다는 이상국 시인의 간격이 궁금했다. 끊임없이 ‘글쟁이가 될 거야’ 라고 생각했다는 시인은 공부시간에도 몰래 소설을 읽었다고 한다. 시를 읽은 적이라곤 소월 시가 유일했고. “시인이 되지 않았으면 내가 더 잘되지 않았을까” 라고 슬쩍 운을 띄우지만, 시인이 되었어야 할 운명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글쟁이가 된 것이 정말 좋고 평생 글쟁이로 살아온 것도 좋다는 시인은 글을 쓰므로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에 대해서도 그 의미와 기쁨을 얹어두고 있다.

청년시절 학교에서 별명이 ‘문학의 밤’이었다는 시인은 1946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나, 76년 <심상> ‘겨울 추상화’로 등단했다. 시집으론 <동해별곡>, <내일로 가는 소>, <우리는 읍으로 간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뿔을 적시며>, <달은 아직 그 달이다> 등을 냈다. 시선집 <국수가 먹고 싶다>가 있으며, 백석문학상, 민족예술상, 유심작품상, 정지용문학상, 박재삼문학상, 강원문화예술상,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유심지 주간, 설악신문 대표이사,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 백담사 만해마을운영위원장 등을 지냈다.

지난 6월 10일 <시노래마을 일상의 인문학 콘서트>에서 등단 후 지금까지 40년 가까운 세월, 시에 얹은 의미와 그 너머 존재하는 가슴 속 이야기들을 구수하고 누긋한 강원도 사투리로 풀어내었다. 류미야 시인이 사회를 맡아 이야기를 이끌었고 시노래 운동가 신재창 씨가 이상국 시인의 시로 만든 노래를 열창하기도 했다.

먼저, 가장 싱겁지만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해야겠습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술은 없어서 못 마시고, 밥은 집에서 너무 많이 먹어서 절제해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남겨주신 유산이 <주역> 한 질과 <주자가례> 그리고 직접 필사한 <만세력> 한 권이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요?

선친이 정월달에 마을 아녀자들에게 토정비결을 봐주던 분인데, 토정비결에 일테면 사기를 조금 섞어서 마을 아녀자들에게 풀어주던 그런 것들이 제게 와 글을 쓰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때 토정비결 봐주던 수고비로 옥담배를 받았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과학이 발달한 때가 아니라 달력이 흔하지 않았지요. 만세력을 필사를 해서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제게 남은 아버지의 유물이죠.

그런 기억이 선생님 시 쓰기에 기여했을까요?

결국엔 그런 인문학적 분위기들이 저에게 건너오지 않았나 싶지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막연한 그런 분위기들이 제 속에 들어와 있었고, 결과적으로 서른 살에 등단했으니까, 초등학교 때부터 적어낸 ‘문필가’라는 꿈을 이룬 거죠. 글쟁이가 된 것도 너무 좋지만 프로스트의 시처럼 제가 시인의 길을 가지 않았으면 내가 더 잘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무튼 꿈을 이루었습니다.

‘지게’라는 작품에도 아버지의 어떤 보이지 않는 큰 그늘 같은 것들이 스민 건 아닌지요?

아버지가 어머니를 못살게 굴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화가 나 있으면 피신했지요. 그럴 때 나는 어린 마음에 ‘어디서 죽지 않나? 어디 가서 들어오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죠. 그래서 어머니 시만 썼어요. 제가 나이 들어 보니 너무 아버지를 홀대하고 구박하지 않았나 싶어요. 두 분이 돌아가시고 합장해드렸는데 저 속에서 두 분이 싸우시지는 않나 싶고요. 두 분이 저를 만들고 키웠는데 싶어서 30~40대는 어머니 시를 많이 썼지만, 그 뒤로는 의도적으로 아버지 시를 썼죠. 지게는 꼭 아버지는 아니고 삶을 지고 가는 것이기도 한데 그러다보니 아버지를 떠올리게 되고 그런 거죠.

‘아버지가 보고 싶다’라는 시도 같은 배경일까요?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자기 아내를 아내가 아니라 노동력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어머닌 저녁에 들어오면 소죽을 끓이고, 밥을 안치고, 가지와 고추를 따서 밥을 짓고, 동네 큰 우물에서 동이로 물을 길어 와야 하고 그랬는데, 저녁이면 설거지하고 내일 아침에 먹을 것을 준비하고, 지금 보면 노예적인 삶을 산거나 마찬가지더라고요. 그래서 더욱 아버지에 대해 좋은 추억이 없는 편인데, 내가 아버지가 되고 아이들이 자는 걸 보면 ‘내가 아버지구나. 저걸 어떻게 책임져야 하나’ 싶으니까 아버지도 나를 보고 그렇게 생각했을 거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때 비로소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되어 보지 않고는 결코 알기 어려운 것들이죠.

초기 시들은 민중시였는데 지금은 조금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첫 시집은 습작기 작품을 대략 모아서 낸 것으로, 저 같은 경우는 등단하고 10년 만에 내었죠. 보통 처녀시집이라고 그러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는 것 같지만, 처녀라고 하니까 상당히 숭고하고 아름답잖아요. 처녀가 아름다운 것도 모르고 썼던 것들을 모았는데, 거기에는 제 유년과 성장뿐 아니라, 문단이란 것도 모르고, 문단에 대해 눈치란 것도 없었던 때 쓴 시를 모아 낸 거였죠.

두 번째, 세 번째 시집은 군사정치 시대였어요. 저는 태백산맥 너머에 있으니까 무슨 일이 벌어져도 신문지상을 통해 알거나 하니까, 시를 쓰다 감옥에 가고 데모 하다 죽고 그 험한 과정에 맨발이 보일 정도로 맞은 적도 없었죠. 저는 한 번도 최루탄을 맞아본 적이 없어요. 신발 한 짝도 잃어버린 일 없이 민주주의에 편승했는데, 참회시나 민중시를 써서 시대에 동참하거나 독재타도에 앞장서고 동참한 선배시인들이나 동료시인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요. 박정희가 죽은 소식도 당구장에서 당구 치다 들었지요.

그렇지만 “국가를 생각하지 않는 시인은 시인도 아니다”는 정약용 선생님 말씀처럼, 뭔가 나도 역사발전에 동참하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는 없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을 따라가는 뒷전에서 시들을 썼죠. <우리는 읍으로 간다>, <내일로 가는 소> 등을 보고 시집 제목을 붙일 게 없어서 썼냐고 많이들 하는데, 그때 그 ‘소’의 의미는 민족성이었지요. ‘내일’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 시대를 넘어서 가야할 그 어떤 곳을 의미하는 것이었고요. 두 번인가 세 번 민중시 계열의 시집을 낸 건 나도 이 시대에 동참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시대가 그렇게 우리에게 어떤 것을 요구할 때는 시대를 따라가는 게 좋죠. 물론 노골적으로 썼던 적이 사실 없고, 동참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쓴 것들이라, 그 중 어떤 작품도 대표시라 뽑을 수 없다는 것은 지금도 자괴감이 듭니다.

그런데 그런 시대가 지나가고 ‘국수’를 선택했으니 잘했다고 볼 수 있지요. 그 시대의 고통을 같이 하고 느낀 민중시를, 그때 순수시 쪽에서는 한 시대가 지나가면 아무도 찾지 않는 시라고 했었는데, 저는 그나마 그렇게 참여했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근래 ‘슬픔’을 테마로 한 시들을 쓰기도 하시죠?

얼마 전에 스님 모시고 팽목항에 갔어요. 삼백 몇 명이 죽은 바다 치고는 너무 조용했어요. 아이들이 죽어 가는데 바라보기만 한 나라는 나라가 아니죠. 망국의 슬픔보다 식민의 절망보다 내국적 식민이 더 끔찍한 거죠. 소위 민주정부 체제하에서 세금 내고 사는데 그 목숨을 나라가 보호해주지 못한다면 국가개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죠. 제 시에서 나라는 곧 ‘의자’와 병치되는데 피곤하면 편하게 앉아서 쉬기도 하는 곳이 의자이자 국가인데, 나라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른들의 잘못으로 생긴 사고를 금방 잊어서는 절대 안 되잖아요. 저나 여러분이나 느끼는 슬픔에 대해선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할 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할 말이 있는 사람이 시를 쓴다’고 합니다. 또 누구는 ‘아는 말과 모르는 말의 협업이 시’라고도 하지요. 겉으로 사물을 보고 있지만 내면이 겹치는 세계, 즉 시인의 고통, 결핍들을 통과하여 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영감의 부림을 받아 시의 밭을 가는 시인의 뜰이 늘 소담스럽기를 빕니다.

내 이름은 문학의 밤입니다

친구들 모임 같은 곳에 가서 누군가 “어이, 문학의 밤, 한잔 받아” 하면 나는 “미친 녀석” 하면서도 덥석 잔을 받습니다. 나의 앨범 속에는 유난히 밤이 많습니다. 별이 빛나던 밤이나 눈보라 치던 밤 혹은 너 아니면 죽고 못 살던 밤 그리고 시체 같은 밤도 있었으나 나는 그냥 어둑한 길을 혼자 걷는 밤이 좋았고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문학의 밤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부지런해도 아직 문학의 아침이나 문학의 저녁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문학은 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문학의 밤’은 ‘문학은 밤’과 같은 말이어서 시인들은 대체적으로 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차마 잊지 못할 밤이 있는가 하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밤도 있게 마련입니다. 많은 밤들이 물결처럼 왔다가는 스러져가고 나에게는 문학의 밤만 남았는데 아직도 그 어둑한 길을 혼자 다닌다고 친구들은 일부러 즐거운 술잔을 건네는 것입니다. 나는 문학의 밤입니다

-이상국, <내 이름은 문학의 밤> 전문

시를 낭송하는 이상국 시인.
권영희 시인.

권영희

2007년 <유심>으로 등단했다. 시집 <오독의 시간> 등을 냈고 2015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를 받았다.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재무차장과 이효석문학재단 사무실장을 지냈다. (사)한국시조시인협회 사무차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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