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인문학 - 고운기 교수의 ‘일연 스님과 삼국유사’

한 권의 책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수많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그 책이 갖는 보편성과 진실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기술한 사서(史書)에서 보편성과 진실성을 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를 보는 가치가 시간과 공간에 따라 격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삼국유사〉는 매우 특별한 책이다. 역사와 지리, 사상과 예술·종교·언어·문학·민속·미술·고고학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루면서도 매우 흥미롭고 감동적인 읽을거리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일연 스님은 무엇 때문에, 어떻게 우리 민족사의 보고(寶庫)로 불리는 〈삼국유사〉를 찬술했을까? 분당 대광사(주지 월도 스님)가 5월 22일에 개최한 인문학특강에서 고운기 교수(한양대, 시인)가 그 의문을 풀어 주었다.

오늘 저는 ‘일연과 삼국유사’를 주제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일연(一然, 1206~1289)은 13세기 고려시대의 스님입니다. 고려는 어떤 나라인가요? 며칠 전 TV에서 “고려는 최수종이 세워서 유동근에게 망한 나라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봤는데, 정말 그런가요? 고려시대는 우리역사에서 불교가 가장 흥했던 나라입니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니까요. 그 다음 시대인 조선과는 정반대였던 것입니다.

일연 스님은 그런 고려시대에 국사를 지내신 분입니다. 고려는 500여 년을 유지한 나라인데, 그동안 불교가 아주 흥성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고려시대에 여러 국사가 계셨지만 살아서 국사를 지내신 분은 열여덟 분에 불과합니다. 500여 년 동안 말이지요. 국사는 한 시대 종교인으로서 가장 높은 분이에요. 일연 스님은 그 열여덟 분 중의 한 분입니다. 당대의 고승이라는 의미지요. 그런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라는 책을 남기셨습니다. 물론 여러분들도 <삼국유사>라는 책에 대해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니까 한 번쯤은 배우셨을 겁니다.

일본에서 경전으로 추앙 받는 저술
우리나라에는 ‘팔만대장경’이라는 귀한 대장경이 있는데, 일본에서 그 팔만대장경을 보완하여 ‘대정신수대장경’을 만들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그렇게 보완한 대장경 속에 바로 이 <삼국유사>를 포함시켰습니다. 일본에서는 이 책을 경전의 차원으로 높여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정작 그 책의 주인인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대접을 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스크린에 보이는 이 책이 바로 <삼국유사> 원본입니다. 두 권으로 된 이 책은 16세기에 인쇄된 책인데, 지금 우리나라에 있는 게 아닙니다. 일본에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의 장수들이 한국 책들을 싹 쓸어 갔죠? 이 책도 그때 가져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일본의 나고야에 있는 도쿠가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약 150가지의 이야기가 9개의 주제로 나뉘어 실려 있습니다. 일연 스님은 13세기에 사셨던 분입니다. 그 13세기가 어떤 시대였는가 하면 ‘무신정권’의 시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군인들이 나라를 다스렸다는 점이 아닙니다. 당시가 중국 대륙에 인류역사상 가장 큰 나라를 이룩한 몽고와 전쟁을 하던 시기라는 것입니다. 작은 반도의 고려는 그렇게 큰 나라와 20여 년간 전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고려라는 나라는 어땠겠습니까? 나라가 겨우 연명하는 고난의 시대였던 겁니다. 일연 스님은 그렇게 모든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는 시대를 살았던 분입니다.

원효 스님과 같은 고향 출신
일연 스님은 1206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본명은 김견명(金見明)이구요. 신라의 원효 스님과 같은 고향입니다. <삼국유사>에는 원효 스님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지역적 연고 때문에 ‘고향사람 키워주기’를 한 걸까요? 그런 건 아니죠. 원효 스님이 그만큼 불교사에 있어서 영향력이 큰 스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연 스님은 원효 스님을 대단히 존경했습니다. 무엇보다 동향 사람이니까 남들이 알지 못하는 원효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원효 스님과 같은 고향사람이어서 나만이 알고 있는 원효 스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밝히며 원효 스님의 이야기를 쓴 것입니다.

그렇게 유명한 원효 스님이지만, 요즘같이 통신이나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그 시대에는 고향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저의 할머님만 해도 전남 고흥 분이신데, 평생 고흥을 벗어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분이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두루 알 수는 없는 거죠. 다른 지역 이야기를 방물장수를 통해서나 들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 점을 생각할 때 고려시대의 일연 스님은 동향사람이기 때문에 <삼국유사>에 원효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보다 많이 기록할 수 있었던 겁니다. 경산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이야기들 말입니다.

예컨대, 원효 스님은 부모님들이 급한 일이 있어 출타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거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만삭의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갑자기 산기를 느껴 길에서 출산을 해야 했던 겁니다. 아버지가 두루마기를 벗어 밤나무 가지에 텐트 치듯이 걸쳐 놓고 말입니다. 원효 스님은 고대광실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길에서 태어나신 겁니다. 원효 스님은 평생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부처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당시 신라불교는 귀족들만 믿고 있었습니다. 의상 스님만 해도 왕족이었습니다. 하지만 원효 스님은 길에서 태어나셨으니까, 광대들의 뒤웅박을 두드리면서 가난하고 무지한 백성들을 찾아다니며 부처님 가르침을 전했던 겁니다. 그렇게 하여 많은 백성들은 물론 심지어 원숭이들까지 부처님의 법을 들었다는 것이 일연 스님의 기록에 나옵니다.

설악산 진전사에서 출가
일연 스님은 만 13세 되던 해에 스스로 출가를 합니다. 출가를 위해 찾아간 곳이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라는 절입니다. 설악산의 아주 깊은 곳에 위치한 절인데, 당나라로 가서 35년 유학을 하고 선불교를 배워서 돌아온 도의(道義) 선사가 지은 절입니다. 당시 신라는 교학 중심의 불교였는데 도의 선사가 선불교를 배워 와서 전파를 하려고 하니 그게 뜻대로 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중국에서도 그랬지만, 신라 불교는 아주 생소한 선불교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의 선사는 이 깊은 산속에 절을 짓고 제자를 기르고자 했는데, 딱 한 명의 제자를 길렀습니다. 그 한 명의 제자가 다시 딱 한 명의 제자를 기릅니다. 그 제자들이 9산 선문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일연 스님은 바로 그러한 진전사로 출가를 하여 22세까지 이 절에서 공부를 합니다. 그리고 과거 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합니다. 이후 대구 비슬산으로 내려와 지내게 됩니다. 무려 22년을 비슬산에 있는 절에 머물며 공부를 했습니다. 그 시기가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몽고와의 전쟁을 치르던 때입니다. 전쟁이라는 엄청난 고통의 시간을 자기수행의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71세에 왕을 만나 국사에 책봉
이후 44세 되던 때에 남해의 어느 절에 주지를 맡는데, 말하자면 그게 첫 직장인 셈입니다. 일연 스님은 84세까지 장수를 하신 분인데, 첫 직장을 44세에 얻었습니다. 요즘 청년실업 문제가 아주 심각하지요? 하지만 너무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일연 스님도 늦게 자리를 얻어 국사라는 최고의 자리까지 오르셨으니 말입니다.

일연 스님은 71세에 청도 운문사로 갑니다. 한 생애를 정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운문사에 들어가셨을 텐데, 뜻밖에도 당시 왕[충렬왕]이 경주에 와 있다가 주변의 큰스님을 모시고 싶어 했습니다. 신하들은 일연 스님을 추천했고, 일연 스님은 왕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1년 동안 경주에서 왕을 모셨는데, 왕은 개성으로 돌아가면서 일연 스님에게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당시 여러 권력자들이 일연 스님을 모시겠다고 해도 다 거절했는데, 왕의 청은 거절할 수 없었겠죠? 그래서 개성으로 갔고, 77세 되던 해 여름에 고려의 국사에 책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해 가을에 일연 스님은 왕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고향에 홀로 계신 95세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비록 출가수행자라 할지라도 자식으로서 마지막 효도를 하겠다는데 왕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을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다음해 봄까지 6개월 동안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78세 때부터 열반에 들 때까지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썼습니다.

<삼국유사>는 어느 젊은 시절에 뚝딱 써 낸 책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일생의 수행과 지식을 다 동원해서 쓴 책입니다. 그럼에도 어려운 논리나 엄청난 학식을 담은 책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 150여 편을 모아 놓은 겁니다. 그런 이야기책을 쓰는데 팔십 생애가 다 필요했을까 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그런 시간의 경험과 지혜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책이 바로 <삼국유사>입니다.

노모를 기준으로 얻은 보편성
저는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일연 스님이 노모를 모셨다고 했는데, 바로 그 시간에 무엇을 하셨을까요? 가을에서 봄까지 효도관광을 다녔을 리는 없고, 아마 어머니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드리지 않았을까요? 천일야화처럼 말입니다. 어머니는 경산을 벗어난 적이 없는 분이지만, 아들인 자신은 이런 저런 곳을 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들었으니까 많은 이야기를 들려 드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드리는데 어머니가 재미있게 들으시면 합격! 재미없게 들으시면 불합격! 이렇게 95세의 어머니를 기준으로 고대로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들을 정리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바로 <삼국유사>라는 책으로 편찬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삼국유사>의 첫 독자는 바로 저자인 일연 스님의 어머니였던 것이라는 얘기죠. 이게 왜 중요한가하면, 시골의 촌로이고 배운 것이 없는 95세의 노모가 이해하고 재미있어 한다면 세상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바로 <삼국유사>의 보편성이고, 그 보편성의 위대함이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일연 스님의 마음이 하나의 저술로 남아 있어서, 그것이 우리 민족의 힘이 되고 미래가 된다는 점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경북 군위 인각사에 모셔진 일연 스님 성상.
일본 도쿠가와 박물관 소장 <삼국유사>. 16세기 인쇄본이다.
고운기 교수.

고운기 교수는
연세대학교에서 국문학 석사와 박사를 취득했으며, 일본 메이지 대학교 문학부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1983년 동아일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돼 다수의 시집을 냈다. 특히 일연과 <삼국유사> 연구에 몰두하여 다수의 인문교양서를 냈다.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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