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읽는다 '흙' - 흙의 존귀, 종교를 만난 흙

땅은 문화권을 초월해 어머니로 인식
나라마다 만물 탄생시킨 ‘지모신’ 숭배
지장보살, 고대인도 대지의 신에서 유래
불복장·점안 의식으로 흙에 생명 부여
흙과 멀어지면 종교적 심성도 옅어질 것

흙으로 조성한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아미타불.<사진제공=영주 부석사>

대지, 인류와 만물의 어머니
외국에 추방되어 있던 어느 혁명가의 연금이 풀린 날, 기자들은 그에게 ‘귀국하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할 것인지’ 물었다. 그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어머니 땅에 입맞춤할 것이다. 가난하고 작은 조국이지만 우리에겐 모든 것이다. 결코 그 땅을 잊은 적이 없다.”

혁명가의 말처럼 땅은 문화권을 초월하여 어머니로 인식된다. 땅은 생명이 나는 원천이기에 인간은 스스로의 삶을 일컬어 “땅에서 태어나 땅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하곤 한다. 하늘이 신의 영역이라면, 대지는 인류의 부모인 것이다. 인간을 가운데 두고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을 인식하는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우주와 존재의 표상으로 삼듯이, 인간의 종교적 심성 또한 땅과 하늘을 향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나라마다 인류와 만물을 탄생시킨 어머니로 지모신(地母神)을 모시고 있다. 그리스신화에서 땅을 인격화한 가이아(Gaia)는 모든 신과 인간의 근원에 해당하는 존재이며 고대 그리스인들이 가장 숭배한 지모신이다. 한국의 신화와 설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신들도 만물의 생성과 육성을 맡은 지모신으로, 천신(天神)과 대응하는 존재인 동시에 천신까지도 포용하는 위상을 지녔다.

불교에서 죄고(罪苦)에 빠진 중생을 남김없이 구하려는 서원을 이루고자 자신의 성불까지 미룬 지장보살은 이러한 지모신적 존재라 할 수 있다. 범어를 한역한 ‘지장(地藏)’의 명칭에서 ‘대지에 함장(含藏)된 덕’이라는 뜻을 읽을 수 있듯이, 지장보살 또한 고대인도에서 숭배하던 대지의 신에서 유래된 존재이다. 이는 지장보살의 덕이 중생을 향한 대비(大悲)의 모성과 다르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무한한 희생과 포용으로 모든 생명을 잉태하고 성장시키는 대지의 덕목이 모성의 근원적 힘과 상통한다고 여긴 것은 동서양을 막론한 보편적 심성이었다. 석가모니는 “금생의 부모만이 부모가 아니고 수없이 나고 죽는 무량겁동안 부모 아닌 것이 없다”고 하였다. 연기의 도리를 깨달아 일체중생이 나의 생명을 있게 한 존재임을 아는 것, 그것은 곧 대지의 자비심이다.

오체투지(五體投地)를 가장 신성하고 겸허한 종교의식의 하나로 보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머리와 전신을 땅에 맞닿는 행위는 신적 존재에 대한 숭배를 넘어서서 인류에 대한 겸허한 애정이며,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종교적 심성의 발로이다.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1984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땅에 입을 맞춘 것도 인류에 대한 입맞춤과 다르지 않다. 땅이 지닌 상징은 인류를 품은 어머니로서 보편의 종교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존 던(John Donne)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누구도 그 자체로서 완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일부이다. 만약 유럽대륙의 한 줌 흙이 바다에 잠긴다면 대륙 전체의 손실이다…… 한 인간의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그것 또한 나 자신의 일부를 잃는 것. 모든 대륙에 우리는 포함되어 있다. 그 누구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를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므로.”

성물로 탄생한 흙
흙은 모든 고체의 원형이요, 조형물의 근원이 되는 자연 질료이다. 아득한 원시시대부터 인류는 재앙을 물리치고 풍요로움을 가져다줄 신적 존재를 갈구하면서, 성스러움을 간직하고자 흙이나 돌로 성물(聖物)을 빚었다. 무덤 속의 토우(土偶)에서부터 탑과 성상에 이르기까지 종교적 대상을 흙과 돌로 빚고, 흙에서 자라난 나무를 다듬어 조성하였다.

이러한 자연의 질료가 성스러운 종교적 대상으로 거듭나는 데는 일정한 의식이 따른다. 불교에서는 불복장(佛腹藏)과 점안(點眼)의 의식으로 흙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사람의 뱃속에 오장육부가 있어 생명을 유지하듯 불상에도 장기에 해당하는 상징물을 넣고, 눈동자를 그려 넣는 상징적 점안으로 신성성이 완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에 증명법사는 붓을 높이 들고 마음속으로 관(觀)하며 눈에 점을 찍듯이 점필(點筆)을 한다. 흙에 생명이 불어넣어져 부처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탄생불을 씻어주는 관불(灌佛)에 이어, 마침내 불상은 사부대중의 예배를 받는 신앙의 대상으로 불단에 좌정하게 된다.

그런가하면 <조주록(趙州錄)>에서는 “흙으로 만든 토불(土佛)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목불(木佛)은 불을 건너지 못하며, 쇠로 만든 금불(金佛)은 용광로를 건너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는 불상의 의미를 직시하도록 명쾌하게 밝혀준 대목이기도 하다.

불교에서 불상을 조성한 이유는, 깨달음을 이룬 부처의 상을 보며 그 삶을 본받고 경배하기 위함이다. 성찰도 마음공부도 없이 불상 앞에서 절과 염불만으로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우상숭배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스스로의 불성을 깨달아 ‘내가 곧 부처’가 될 수 있기에, 부처와 나는 주체와 객체로 굳어진 상대적 존재 또한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바는 흙에 생명을 불어넣어 부처가 되는 이치이며, 부처는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이치이다. 보잘것없는 흙덩이라도 지극한 신심과 원력으로 정성을 다하면 부처로 거듭날 수 있고, 만인이 숭배하는 부처도 결국 한 줌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로 흩어지는 존재에서 부처라고 예외일 수 없다. 부처는 신이 아니라 바로 개개인의 중생을 떠나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상이 우상인지 성상인지의 문제는 불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상을 대하는 마음에 달려있다.

이러한 가르침은 불교만의 것이 아니라 보편의 진리이기도 하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머리에 재를 얹는 의식을 치른다. 사제는 신자들의 머리에 재를 뿌리며 읊조린다.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라틴어로 흙은 후무스(humus)이며, 이 단어에서 사람(homo)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누구나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인식은 동양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겸손(humilitas)이라는 단어 또한 흙과 어원이 같으니, 존재에 대해 바른 성찰을 하는 이라면 겸허하지 않겠는가.

흙에서 배워야할 종교적 심성은 흙을 만지고 밟는 일상에서 싹트고 자라난다. 문명화ㆍ현대화될수록 흙과 멀어지고, 존재의 근원과 교감하는 종교적 심성도 옅어져가는 것이 아닐까. 흙의 의미도 모른 채 스스로 독실한 종교인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글 : 구미래 불교민속연구소장

흙으로 구운 벽돌로 조성한 34m 높이의 인도 사르나트 다메크 스투파.
흙으로 구워 만든 불두(태국).
구미래 불교민속연구소장.

구미래
불교민속으로 문학박사를 취득했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학술연구교수, 중앙대학교 외래교수, 조계종 총무원 성보보존위원, 한국불교민속학회 연구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존엄한 죽음의 문화사>(모시는사람들, 2015), <한국불교의 일생의례>(민족사, 2012), <한국인의 죽음과 사십구재>(민속원, 200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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