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과의 관계에서 보여주기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대개 허례허식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가정과 가정이 인연을 맺게 되는 결혼식에 있어서 들어가는 비용은 부모들의 허리를 휘게 할 만큼 고가로 치러지고 있어 사회적 문제로 부상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고비용을 지출하게 되므로 자식 혼사를 치르고 난 부모들이 ‘실버-푸어’ 신세로 전락한다는 보고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자 정부에서도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습니다. 여성가족부는 고비용이 치러지는 결혼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작은 결혼식’ 확산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난 5월부터 현직 웨딩플래너 등이 참여하는 ‘작은 결혼식 재능기부 전담팀’을 만들어 신랑 신부의 결혼비용 부담을 줄여주고자 안내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우리나라가 고비용 결혼문화를 만들어낸 데에는 겉치레를 중시하는 관습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사람과의 관계맺기도 사실 겉치레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겉치레로 이뤄지는 사람관계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불신과 반목을 부르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뿐입니다.

〈장자〉 ‘응제학’편을 보면 ‘조탁복박(雕琢復朴)’이란 말이 있습니다. 즉 “화려한 꾸밈을 깎아내 순박함으로 돌아가자”는 말인데 이 말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꾸미거나 수식(修飾)하지 말고 본래의 내 모습을 소중히 여기며 참나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이와 비슷한 교훈을 안겨주고 있는 고전으로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예덕선생전’이 있습니다. 〈연암집〉권8 별집(別集) ‘방경각외전’에 실려 있는 소설로서 박지원의 초기작품입니다. 이 소설에서 박지원은 ‘선귤자’와 제자의 대화를 통해 양반들의 허욕과 위선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선귤자는 제자 각목에게 “이익을 따지거나 아첨에 의해 맺어지는 벗은 진정한 벗이 아니다. 벗을 사귈 때는 진실한 마음으로 사귀고 도의(道義)를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인격을 갖추지 못하고 예법만을 중시하는 양반들보다 똥을 치우면서 가난하게 사는 엄행수가 더 깨끗하고 향기롭다는 교훈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나치게 자기를 과시하려고 하거나 자신을 인정받으려고 하는 경우 인격장애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입니다. 다시 말해 타인의 존경과 관심의 대상이 되기 위해 끝없이 집착하는가 하면, 내면의 충실함보다는 겉치레에 상식 이상의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자기애성 인격장애’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람들은 대부분 내적 수양이 절대 부족할 뿐 아니라 오로지 바깥을 향한 관심과 경계가 다른 이들과 비교해 훨씬 높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에 대한 평가도 결코 겉만 보고 이루어져선 안 됩니다. 겉모양이 화려해도 그 본성이 속물적이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교만이 가득 차 있다면 인품의 향기가 날 리 만무합니다.

신라 효소왕 때 있었던 일화입니다. 효소왕이 망덕사(望德寺)를 지어 낙성법회를 봉행할 때 친히 참석하였습니다. 그때 초라한 납의(衲衣)를 입은 비구가 왕에게 자기도 그 법회에 참석하고 싶다고 청했습니다. 왕은 행색이 남루하고 누더기 가사를 입은 비구가 못마땅했지만, 그 청이 너무 간절하여 출입을 허하고 말석에 앉도록 했습니다. 그리곤 비구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밖에 나가거든 사람들에게 국왕이 참석한 법회에 동참했다고 말하지 말라” 그러자 비구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폐하께서도 다른 사람에게 진신 석가를 친견했다고 말씀하지 마세요.”

〈삼국유사〉에는 또 이런 일화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보삼장(寶三藏)이 어느 날 새로 창건된 일왕사 낙성법회에 참석하려 했으나 허름한 옷차림의 농부행색인지라, 경비가 들여보내주지 않았습니다. 보삼장은 집으로 돌아가 아주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법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식이 끝나고 연회가 베풀어졌습니다. 보삼장은 음식을 먹지 않고 자기 옷에 쏟아 부었습니다. 사람들이 의아해 하며 이유를 물었습니다. 보삼장은 “내가 오늘 여기에 온 것이 아니고 이 옷이 여기에 왔으니 마땅히 음식을 옷이 먹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외양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그릇된 이들을 일깨워주는 말이었습니다.

불교에선 수행을 통해 다섯 가지 안목을 차례로 성취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육안(肉眼)으로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보게 되는 안목입니다. 둘째는 심안(心眼)으로 보통 사람이 볼 수 없는 곳까지 보는 경지입니다. 셋째는 혜안(慧眼)으로 모든 미혹과 번뇌가 사라졌을 때 가질 수 있는 안목을 말합니다. 넷째는 법안(法眼)으로 사물의 진실한 모습, 우주만물의 당체(當體)를 직시할 수 있는 경지의 눈인 것입니다. 다섯째가 불안(佛眼)으로 대자대비가 적정에 다달아 모든 중생의 크기를 관찰하고, 이에 맞춰 제도할 수 있는 가르침을 주게 되는 부처님의 눈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겉치레란 진실을 가리는 거짓의 형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겉치레에 속지 않도록 안목을 키우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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