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껍질로 말 탄 스님 어리석음 일깨워

 

통일 신라의 불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고려 왕조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거의 250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전 100년과 후 150년으로 구분되는 두 기간 동안에 각각 다른 특징을 보입니다.

전기는 불교사상이 건전하게 발전한 시기였고, 후기는 그 전기 불교가 차차 퇴락, 쇠퇴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불교가 일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언제나 혼란한 시기가 되면 새로운 사상이 싹트기 마련이지요.

삼국 중에 가장 후진적이었던 신라는 자체의 역량이 부족함을 깨닫고 당나라라는 외세의 힘을 등에 업고 통일대업을 이루었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좋은 점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불교 역시 안정된 환경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문화까지 더 보태어 내면적인 심화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결과가 있기까지는 훌륭한 고승들의 배출과 그들의 끊임없는 교학적 연구, 교화 활동 등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때 활동한 대표적 고승으로는 원효·원측·의상·경흥 스님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그리 알려지지 않은 스님이 바로 경흥(憬興)이라는 스님입니다. 

경흥 스님은 성이 수씨이며, 웅천주 사람으로 그는 18세 때 출가하여 삼장에 통달하고 이름을 신라 전역에 떨쳤습니다. 681년 문무왕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신문왕을 부르더니 경흥 스님을 부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경흥법사는 국사가 될 만한 사람이다. 내 명을 잊지 말도록 해라.”

신문왕은 즉위 하자 곧 경흥 스님을 국로(國老)로 봉하였습니다. 말하자면 국사이지요. 그는 많은 이적을 통해 대중을 교화하였습니다. 널리 알려진 원효 스님보다 오히려 더 자유분방한 모습입니다.

그가 삼랑사에서 병을 얻어 한 달 동안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일입니다.

“부처님 법의 그 끝자락도 알지 못했는데, 이리 빨리 죽게 생겼구나.”

낙심한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죽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으나 불법과의 인연이 짧음이 한탄스럽다!”

그러한 때 한 비구니 스님이 찾아왔습니다.

“이러한 지경을 당한 내가 누구를 만나겠느냐?”

그는 찾아온 비구니 스님의 면담을 거절하고 혼자 고요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리석은 경흥이여! 눈과 귀를 모두 닫고 부처님 법을 운운하는 못난 경흥이여!”

경흥 스님은 그 말을 듣고 법당 마당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러자 그 비구니 스님이 지그시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법사의 병은 근심 때문이니 약으로 치료할 수는 없고 무조건 웃어야 합니다!”

경흥 스님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대는 나를 현혹하지 말라. 내 고요히 〈법화경〉의 말씀을 밤낮으로 되새겨도 모자란 시간인데 웃다니?”

“눈을 닫고, 귀를 닫고도 〈법화경〉의 뜻을 알 수 있겠소? 〈법화경〉의 가르침은 그대같이 경직된 자에게는 열려 있지 않소. 부처님은 결코 어려운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그 순간 경흥 스님은 자신을 되돌아보았습니다. 〈법화경〉을 독송한다는 핑계로 대중을 멀리했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다른 이들의 말에 귀 기울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내가 열한 가지의 가면을 쓰고 춤을 출 것이오.”

“......?”

그리고 법당의 앞마당은 곧바로 한바탕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비구니 스님은 갖가지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춤을 추었습니다. 물론 많은 대중들도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비구니 스님의 춤사위에 깔깔거리며 박수를 쳤습니다.

덩실.

덩실.

비구니 스님은 마치 한 마리 학처럼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비구니 스님이 춤을 마쳤을 때 경흥 스님은 자신도 모르게 대중들과 함께 일어나 박수를 쳤습니다. 그 순간 그의 병은 감쪽같이 나았습니다. 사실 그는 잘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병이 깊었던 것입니다.

그가 문득 자신의 병이 나았음을 깨닫고 그 비구니 스님에게 합장을 하였을 때는 이미 그 비구니 스님은 남항사로 들어가 숨어 버렸습니다. 비구니 스님이 가지고 있던 지팡이만 관세음보살님 그림 앞에 놓여 있었던 것이지요.

관세음보살님이 비구니 스님의 모습으로 와서 경흥 스님의 병을 고쳐준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경흥 스님의 행적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에게는 거침이 없었습니다. 결코 부처님의 가르침이 문자에만 있지 않음을 절감한 것이지요. 하여 그의 생각은 늘 일반 대중들과 함께였습니다.

“부처님은 대중들 속에 계신다.”

“부처님은 혼자 계시지 않는다!”

하여 그는 예전과는 다르게 왕궁 안팎을 마구 드나들었습니다. 그 어떤 곳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날도 경흥 스님 일행이 동문 밖에서 대궐로 들어갈 채비를 차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화려한 말과 안장에, 멋진 신과 갓을 제대로 갖춘 경흥 스님 일행은 누가 봐도 위엄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누구도 경흥 스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길 가는 사람들도 그 기세에 눌려 길을 비켜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게 서시오!”

그 주인공은 몹시 어수룩한 차림의 스님이었습니다. 그는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등에는 마른 물고기가 가득 든 광주리를 지고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경흥 스님의 일행 중 한 사람이 그를 꾸짖으며 말했습니다.

“그대는 누구시기에 우리의 발길을 막는 것이오?”

그 스님이 빈정대듯 말했습니다.

“발길을 막은 것이 아니라. 말길을 막았겠지?”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스님의 삼태기 속에서 견딜 수 없는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경흥 스님의 일행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은 승복을 입은 사람인데 어찌 그리 깨끗하지 못한 물건을 지니고 있는가?”

일행은 그 스님을 격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그 스님이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산 고기를 두 가랑이 사이에 끼고 다니는 것과 시장의 말린 고기를 등에 지고 다니는 것은 어느 것이 더한 것인가?”

그 때 마침 문을 나오던 경흥 스님이 그 말을 들었습니다. 경흥 스님은 얼른 사람을 시켜 그 스님을 쫓아가게 했습니다. 스님은 남산 문수사 문 밖에서 광주리를 버리고 숨었는데, 그가 짚었던 지팡이만이 문수보살님 상 앞에 있었습니다. 광주리 속을 보니 그가 가지고 있던 마른 고기는 다름 아닌 소나무 껍질이었습니다.

스님을 쫓아갔던 사람이 달려와 이 사실을 아뢰니 경흥 스님이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문수보살님께서 내가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을 경계한 것이구나.”

그 뒤로 경흥 스님은 죽을 때까지 말을 타지 않았다고 합니다. 평생 아무리 먼 길도 걸어서만 다녔습니다. 그는 언제나 대중과 동고동락하는 삶을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지요. 

오래 전, 통일 신라 때는 스님이 큰 벼슬인 시절이 있었습니다. 무조건 존경받고, 무조건 존귀하며, 무조건 부처님의 법을 독점하는 그런 때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부처님은 절대자이면서도 절대 절대자가 아니니까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통일신라 때와 다르게 지금 우리나라 안에는 수많은 스님들이 제2, 제3의 경흥 스님을 자처하며 수행하고 있으니까요. 어린 아이들과 노는 스님, 악기를 부르며 무대에 서는 스님 등 다양한 형태의 스님들이 즐비하니까 말입니다. 그 분들께 합장 올립니다. 응원 드립니다. 늘 대중과 함께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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