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정토신앙, 〈법화경〉 근거한 성불 지향

▲ <영상회상변상도>, 高麗 1286년, 종이에 인쇄, 21.0 X 45.6cm, 삼성미술관 Leeum.

고려후기 ‘영산회상변상도’ 하단에 표현된 아사세왕은 아버지를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참회를 통해 구원 받아 성불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상징적 인물이다(550호 15면 그림 참조). 이 아사세왕 도상은 특이하게도 고려 13~14세기에 조성되었던 ‘영산회상변상도’에만 한시적으로 등장하는데 과연 그 이유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도상(圖像, Icon)은 종교, 신화 및 그 밖의 관념체계 상 어떤 특정한 의의를 지닌 미술품에 나타나는 인물 또는 형상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도상 안에는 그 도상이 등장하는 시대의 역사ㆍ사회ㆍ문화 뿐 아니라 종교적인 신앙과 사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아사세왕 도상을 포함하고 있는 ‘영산회상변상도’는 〈묘법연화경〉(이하 〈법화경〉)의 사상적 요체 뿐 아니라 고려후기 사회의 불교 신앙과 사상, 불교의식을 포괄하는 문화적 상징성도 함의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법화경〉과 아사세왕 도상을 당시의 문헌과 연결해서 살펴본다면 고려후기 사회 불교문화의 한 단면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법화경〉은 모든 불교경전 중 가장 넓은 지역과 많은 민족들에 의해서 읽혀졌던 대승경전의 꽃이자 대승의 교리를 완전하게 구비하고 있는 경전이다.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에 불교의 승단은 분열을 거듭하면서 기원 전후한 시기에 소승불교(小乘佛敎)와 대승불교(大乘佛敎)로 정리되었다. 부처님의 입적 이후에 분열되었던 승단을 중심으로 성립한 소승불교는 업보의 자기 책임을 바탕으로 한 자주적 노력을 강조하며 아라한을 향하는 출가수행이 필수 요건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 승단 밖에서 일어난 새로운 불교운동인 대승불교는 자리행(自利行)만을 고집하여 점차 대중의 지지를 상실해 가고 있던 아라한 중심의 불교에서 이타행(利他行)을 강조한 보살 중심의 불교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뛰어난 가르침의 비유적인 용어인 대승의 큰 뜻이 담긴 〈법화경〉에는 모든 중생을 빠짐없이 구제하고자 다양한 비유와 이야기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파하고 있다.

〈법화경〉을 읽다보면 나약하고 어리석을 뿐 아니라 이기적이기까지 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이해와 인간 본성에 대한 근원적인 믿음이 기저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법화경〉에서는 모든 인간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으며 누구나 부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성불(成佛)의 믿음을 가르친다. 또한 다양한 방편으로 가르침을 베풀어 미명에 싸인 인간들이 결국 깨달음에 이를 수 있도록 돕는다.

고려후기에는 특별히 〈법화경〉에 의지한 예참의식이 성행하였다. 예참은 부처님이나 보살님에게 예배하고 죄를 참회하는 수행법으로, 고려후기에 이러한 참회의식이 성행하였던 배경에는 강진에서 일어난 백련결사운동의 영향이 크다. 백련결사를 이끌었던 원묘요세(圓妙了世, 1163~1245)는 1232년 보현도량을 개설하면서 대중들이 함께 수행할 수 있는 실천행으로서 ‘법화삼매 구생정토(法華三昧 求生淨土)’를 제시하였다. ‘법화삼매’는 법화삼매참법(法華三昧懺法)을 줄인 말로서, 〈법화경〉에 의지하여 인간의 여섯 가지 죄의 근원(眼, 耳, 鼻, 舌, 身, 義)의 인연에 따라 지은 죄를 참회하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의식이다. 법화삼매참법은 천태지의(天台智, 538~597)가 쓴 〈법화삼매참의(法華三昧懺儀)〉라는 의식집에 근거하여 행해졌는데, 고려의 실정에 맞게 변형된 의식집이 13~14세기 널리 간행되기도 하였다.

법화삼매참법의 의식과정을 살펴보면 고려후기에 〈법화경〉에 의한 정토신앙이 형성되었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법화참법이 행해질 때 의식의 중요과정 중 하나가 〈법화경〉의 독송이며, 의식의 끝에는 ‘목숨이 다 할 때 극락국에 왕생하여 아미타불을 받들어 모시고 십지(十地)의 훌륭하고 영원한 즐거움을 수행’하기를 발원하고 있다. 고려후기 사회에서는 〈법화경〉 독송이 정토왕생을 위한 중요한 실천행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법화경〉에 의한 정토왕생담이 상당히 성행하였다는 사실은 요원(了圓)이 쓴 〈법화영험전(法華靈驗傳)〉(1378년)에서 살펴볼 수 있다. ‘송나라의 승려 가구(可久)는 늘 〈법화경〉을 외웠던 결과 정토에 왕생하였다’. ‘소암법사(紹庵法師, 898~970)가 〈법화경〉 2만 번 암송하고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하였는데 갑자기 땅에서 연꽃이 났다’는 등의 왕생담은 실제 고려인들의 신앙생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나이가 많아 벼슬에 물러난 사람들이 법화사(法華社)를 조직하여 다달이 육재일에 만나 〈법화경〉을 읽고, 아미타여래에게 공양하며 정토에 회향하고자 정진했다’는 이야기나 ‘송경의 낙타교 동쪽 마을에 연화원(蓮華院)이라는 절에서도 육재일에 〈법화경〉에 의지하고 정토에 회향하는 의식이 베풀어졌다’는 기록들을 통해 여럿이 결사를 조직하고 〈법화경〉에 의지한 정토수행을 규칙적으로 행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고려후기의 정토신앙은 〈아미타경〉, 〈무량수경〉, 〈관무량수경〉으로 대표되는 정토삼부경보다는 〈법화경〉에 그 근간을 두고 있으며, 참회를 통한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법화경〉에 근거한 성불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13세기 이후부터 유독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며 손쉽게 꺼내 읽을 수 있는 작은 크기의 소자본(小字本) 형식의 〈법화경〉 간행이 성행하였다는 사실이나(도), 13세기 후반~14세기에 귀족 사회에서는 금자의 〈법화경〉 사경이 널리 행해졌던 것도 이러한 정토문화의 특징적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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