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 부딪힌 산업문명
불교적 가치 통해
융합적 대안 모색해야

시장은 단순한 경제 개념이 아니다. 시장은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다. 세상을 경제나 정치가 지배한다고 보는 이들은 삶의 표면에 머물기 십상이다. 정치와 경제가 움직이는 밑절미에 ‘생활양식’으로서 문화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을 최고 가치로 내세운 세월이 반세기 넘게 이어지면서 ‘시장문화’는 한국인의 삶을 사실상 좌우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인력시장’이란 말은 사람을 시장에서 사고파는 대상으로 여긴다. ‘신문시장’이란 말도 여론을 형성하는 공론장을 사고파는 대상으로 삼는다. 심지어 대학가에도 시장의 논리가 퍼져가고 있다. 대학 총장의 ‘가치’는 그가 얼마나 돈을 끌어왔는지, 얼마나 건물을 증축했는지 따위로 평가되기 일쑤다.

무릇 시장을 지배하는 논리는 이윤과 경쟁이다. 더 많은 이윤을 위해서라면 사람의 생명도 하찮게 여길 수 있다. 이미 영혼 깊숙이 시장문화를 받아들인 교수와 언론인들도 적극 가담한다. 연구비 수주의 이익을 챙길 수 있고 조직 내 서열 경쟁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신문과 방송은 ‘노동시장 유연화’나 ‘명예퇴직’이란 말을 무람없이 쓴다. ‘유연화’라는 부드러운 말 뒤에 숨은 것은 노동자들의 ‘목’를 자르는 해고의 칼바람이다. ‘명예퇴직’은 사람을 모욕적으로 내쫓으며 붙인 불명예의 포장지다.

시장문화의 폐해가 늘어나면서 대안문화를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그 대안을 불교에서 찾을 수 있다. 언뜻 시장문화와 불교문화는 전혀 별개처럼 다가올지 모른다. 세속과 산중으로 나누어 그 사이에 심연이라도 놓인 듯 여기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아니다. 불교의 깨달음을 그림으로 형상화한 ‘십우도’를 보더라도 확인할 수 있다. 깨달음의 가장 마지막 단계는 ‘입전수수’다. 입전수수(入廛垂手)의 전(廛)은 가게, 곧 시장을 이른다. 수(垂)는 손을 드리운다는 뜻이다. 중생이 생생하게 숨 쉬는 시장으로 들어가 손을 내밀라는 가르침이다. 중생을 제도하러 속세로 나아가는 모습은 “露胸跣足 入廛來 抹土塗灰 笑滿玖(맨가슴 맨발로 시장에 들어서니, 흙먼지 덮어써도 얼굴 가득 웃음)”에서 묻어난다.

가게가 곰비임비 늘어서있는 시장은 상업주의와 이윤추구가 넘치는 마당이다. 드리울 수(垂)자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있다. 기울다, 쏟다, 베풀다가 그것이다. 가장자리나 변두리의 뜻도 있다. 그 모든 게 함축된 게 ‘수수’다. ‘변두리’에 손을 드리워 베푸는 일, 그것이 수수다. 깨달음이 갈수록 절실한 곳, 그곳이 시장임을 일찍이 불교의 혜안은 간파한 게 아닐까. 당장 오늘의 시장을 보라. ‘시장 만능주의’ 외길에서 오직 이윤만 추구해온 미국 경제가 2008년 금융위기를 맞은 뒤 지구촌 경제는 장기침체 국면에 들어갔다.

글로벌 차원에서 새로운 문명이 인류가 풀어야 할 시대적 과제로 떠올랐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근거로 삼은 서양의 산업문명은 한계에 이르렀다. 탐욕을 넘어서는 문화는 시장에 붓다의 손을 드리울 때 가능하지 않을까. 시장문화에 맞서 불교가 인류 역사에 새로운 삶의 양식, 곧 새 문화를 창조해내려면, 불교적 가치에 근거한 융합적 대안을 모색하는 데 지혜를 모으고 그 과정을 불교 언론이 확산해가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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