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지자대사 깨달은 곳
최근 주목 받아 불사 진행 중

▲ 중국 하남성 광산현에 위차한 정거사 관음전 입구에 ‘대한불교천태종’ 스님들의 정거사 방문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현수막 아래 송나라 진종 황제가 썼다고 전해지는 ‘칙사범천사(敕賜梵天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정거사(淨居寺)는 중국 하남성 남부의 작은 도시 신양에서 서남쪽으로 약 25km 떨어진 중국 중앙에 위치 하고 있다. 중국 남쪽과 북쪽이 만나고 있는 대소산(大蘇山)에 위치한 고찰이다. 그래서 정거사 대웅전은 중국 북쪽의 양식과 남쪽의 양식이 혼재되어 독특한 건축 양식을 보여 준다고 한다.

남북조 시대의 명승 혜사(慧思, 515~ 577)대사가 암자를 짓고, 수행하며 제자들을 교화한 곳으로 전해진다. 그 증거가 되는 유적이 정거사 뒷편 대소산 석벽에 새겨진 ‘혜사마애석각’이다. 기록엔 ‘대소산에 거주해 혜사가 개석(開石)한다. 갑술(甲戌) 3월 25일’이라고 적혀 있다.

혜사 스님은 북제의 혜문(慧文)으로부터 일심삼관의 묘법을 받고, 스스로 법화삼매를 증득했다. 그 후 여러 곳을 순례하며 교화에 힘쓰다 554년 대소산에 들어왔다. 석벽에 새겨진 갑술년이 554년이니, 그 해에 혜사 스님은 제자들과 대소산에 들어와 글귀를 새긴 셈이다. “혜사가 이곳에 와서 손가락으로 석벽에 글을 쓰니 손끝에서 빛이 나와 글씨가 새겨졌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정거사에는 ‘칙사범천사(敕賜梵天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는데, 이것은 송나라 진종 황제가 쓴 것이라 한다.

최근 정거사는 뒤늦게나마 주목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천태산 국청사는 천태대사 이후 ‘천태종의 본산’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정거사야말로 천태지자대사가 혜사 스님으로부터 처음 법화삼매를 깨닫고, 일심삼관의 천태묘관과 법화삼대부를 펴게 한 계기를 마련한 천태종의 시원지이기 때문이다. 중국 측 책자에도 대소산 정거사는 ‘천태종의 발상지(發祥地)’라고 기록돼 있다.

천태지자대사가 혜사를 찾은 것은 23세 때(560년)다. 혜사 스님은 그의 비범함을 보고 흔쾌히 제자로 맞아들였다. 천태지자대사는 ‘법화경’을 독송하다 “여러 부처님은 다같이 찬탄한다. 이것이 참된 정진이며, 이것을 참된 법을 가지고 공양한다고 이른다”는 대목에 이르러 마침내 법화삼매를 증득하고 초선다라니를 얻어 스승의 인가를 받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대소산 개오’다. 그 뒤 천태지자대사는 7년간 대소산에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거사는 한 때 승려 수가 1000여 명이 넘었고, 승방이 1000여 칸이나 됐다고 한다. 그러나 수차례에 걸친 재난으로 훼손과 중건을 거듭해야 했다. 현재 사찰은 많이 쇠락했었지만, 문화재적으로 가치가 있는 비각과 시문 등 유물이 남아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을 붙들고 있다. 중국 정부도 정거사 일대를 성급(城級) 문화재 보존지구이자, 여행지구로 지정하고 개발 및 복구를 진행하고 있다.

1400여 년 역사의 정거사는 선당, 법당, 방장실 등 청대 고건물 59칸이 전해진다. 중심건물인 대웅보전(대불전)은 청대 건축양식으로, 30개에 달하는 둥근 기둥이 독특하다. 지붕을 덮은 기와는 사찰 내부에서 훤히 보인다. 특히 대웅보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은 명대 양식을 그대로 취하고 있다.

왕조권 대소산문화연구회장은 "하남성은 물론 중국 내 사찰 중에서도 명대의 양식과 문화재 등이 남아있는 사찰이 흔치 않아 정거사를 제대로 복원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 정거사 일주문.
▲ 일주문을 지나면 정거사와 그 뒤로 공사중인 철탑이 보인다.
▲ 정거사 관음전의 모습.
▲ 관음전 내부의 관세음보살상.
▲ 관음전 뒷편에 있는 대웅보전. 현재는 붕괴 위험으로 출입이 통제돼 있다.
▲ 대웅보전 안 불상.
▲ 정거사 곳곳에 불사가 진행되고 있다.
▲ 정거사 앞에 있는 비석을 구경 중인 불자들.
▲ 정거사 옆에 위차한 박물관에 있는 불상.
▲ 정거사에 있는 비문들.
▲ 혜사대사가 계를 주었다고 전해지는 1400여 년 된 은행나무.
▲ 아미타정근을 하며 은행나무 주변을 돌고 있는 중국 불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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