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소리 외길… 닿은 곳이 불교더군요”

 

‘명창’은 오로지 인간의 목소리로 득음의 경지에 오른 소리꾼에게 하사되는 귀한 칭호다. 수많은 소리꾼 중에서 어떤 소리꾼을 명창이라 할 수 있을까? 단연 소리의 기량이 탁월해야하고 전통성과 역사성을 지녀야 한다. 또 내세울만한 개성적인 판소리 더늠(창자가 독창적으로 만든 대목)과 소리 발전에 공헌한 바가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걸 갖춘 명창의 삶은 우리가 상상하는 연예인과 같이 화려한 모습과는 조금 거리가 먼 의외의 소박함이 있다.

우리의 전통가락인 국악을 즐겨 듣는 이가 드문 요즘 시대에 ‘퓨전 국악’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국악의 보급 발전에 앞장서고 있는 국악인 박애리 씨에게 명창이란 칭호는 과찬이 아니다. 소박함과 단아함을 갖춘 그의 미소와 차분한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내공은 그의 소리 인생을 여실히 대변한다.

소녀 명창 탄생
꽃비가 내리는 따스한 봄날, 그와의 인터뷰를 위해 궁중문화축전 준비로 분주한 경복궁을 찾았다. 번잡한 도로와 빌딩 숲을 지나 광화문에 들어서자 고즈넉한 옛 고궁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경복궁 모퉁이에 자리한 아름드리 은행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청량한 봄 하늘을 바라보니 마음의 한 켠을 비울 여유가 찾아온다. 수백 년 자리를 지켜온 옛 궁궐의 담장과 은행나무, 한국의 정취는 따스한 봄바람이 되어 코끝을 스친다.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대금ㆍ가야금 연주에 국악인 박애리 씨가 한 곡조 뽑아주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판소리ㆍ기악ㆍ농악 등 한국의 전통예술 기량을 펼치는 전주 대사습놀이는 전국 명창들의 총집합장이다. 이 화려한 명성은 조선후기 때부터 지금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1994년 전주 대사습놀이에서 비범한 음색을 가진 소녀 명창 한 명이 국악계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그 주인공이 바로 2016년 판소리 대중화와 함께 국악계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박애리(40) 명창이다.

판소리가 무엇인지, 소리가 어떤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던 9살짜리 막둥이는 엄마 손에 이끌려 목포 시립국악원에서 국악을 처음 만났다. 소극적이고 몸집도 작았지만 욕심만큼은 컸던 소녀는 운명처럼 만나게 된 소리공부를 시작하면서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목포시청의 말단 공무원으로 평생 가족의 생계를 꾸려온 아버지와 빠듯한 살림에 4남매를 건사해야 했던 어머니.

그저 평범할 뿐 소리꾼이 전무한 집안에서 명창이 나오리라곤 가족들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싹을 알아봐준 은인은 수업료 2천원으로 연을 맺은 국악원 선생님이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선생님은 어머니에게 “애리의 소리가 아주 좋아요. 다른 아이들과 함께하니 목소리가 묻혀 잘 들리지가 않네요. 개인레슨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라며 본격적인 소리공부를 제안했다.

개인 강습비 3만원. 31년 전 3만원이라는 금액은 큰 부담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막내딸의 소리공부를 위해 기꺼이 생활비를 쪼갰다. 그렇게 소리꾼 박애리는 판소리라는 길에 자그마한 발을 내딛게 됐다.

그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제12회 전주 대사습놀이’부터다. 당시 17세의 나이로 학생부 판소리부문 장원을 차지했다. 전주의 소문난 귀명창들이 모인 대사습놀이에서 장원에 등극하니 ‘요즘 보기 드문 큰 명창이 나왔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심사위원들은 심청가중 ‘박씨부인 유언 대목’을 부른 그에게 “타고난 음색과 음역대가 끝이 없고 대사 전달이 매우 안정됐다”라는 평가를 했다.

‘판소리계 유망주’로 인정받은 그는 1996년 ‘제12회 동아국악콩쿠르’ 판소리부문 금상 수상을 통해 또 한 번 ‘차세대 명창’이라는 별칭을 얻는다. 인간문화재 정철호 선생은 그의 소리를 듣고 “성음(聲音, 음색)이 정말 곱고 좋다. 내가 오늘 너의 소리를 듣고 내 귀를 씻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정당한 노력의 대가를 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을까. KBS ‘불후의 명곡’외 다수의 방송 출연과 국립창극단 프리마돈나를 지낸 그의 삶은 탄탄대로를 달려왔을 거라 예상되지만 그에게도 추억이 돼 버린 피나는 노력의 시기는 분명 존재했다.

소리를 향한 갈망
당시 1~2년 차이로 대학에 입학한 언니들과 오빠가 있었기에 소녀 애리가 예술 중ㆍ고등학교에 입학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학업과 소리를 병행해야 했던 그의 오랜 바람은 명문 예고 진학도, 고액의 레슨도 아닌 그저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퇴직을 앞둔 아버지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에 딸을 홀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과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그의 서울 상경을 막았다. 한 번도 부모님 속을 썩인 적 없는 막둥이가 처음으로 본인의 꿈을 위해 아버지에게 맞섰다. 부모님과 오랜 갈등이 있었지만 그가 위기에 처 했을 때 늘 구원투수가 돼 주었던 어머니가 그의 대학진학에 힘을 실어줬다. 아버지의 눈을 피해 어머니는 “애리야 걱정하지 마. 엄마가 어떻게 해서든 꼭 보내줄게”라고 그를 다독였다. 그렇게 그는 19살이 되던 해 그토록 바라던 서울로 상경했다.

조금이나마 가사에 도움이 되기 위해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중앙대학교 한국음악학과에 입학했다. 우여곡절 끝에 진학한 대학교였기에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학업과 소리공부에 몰두했다. 부모님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 드리기 위해 성적우수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고, 크고 작은 대회에 출전해 받은 상금으로 무사히 대학 4년을 마쳤다.

4년간 부모님 그늘 없이 지낸 대학생활이 고단했던 탓일까. 청아하고 높디높은 음색을 자랑했던 그의 소리에 적색불이 켜졌다. 감기 기운과 피로감으로 목이 잠기더니 갑자기 높은 음을 소화하지 못하게 됐다. 대학 3학년 시절, 소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다던 변성기가 찾아온 것이다.

꾀꼬리 같았던 그의 목소리는 쇳소리를 연상시키는 탁한 소리로 변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던 그는 “변해버린 내 목소리를 듣는 것도 괴로웠지만, 누가 내 목소리를 들을까봐 더 노심초사했었죠. ‘내가 다시 소리를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과 함께 소리를 안 하면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앞이 캄캄했어요”라고 지난날을 떠올렸다.

사실 그를 더 가슴 아프게 했던 건 변해 버린 목소리가 아닌 그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국악계 유망주였던 그의 변화에 사람들은 “애리가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 목이 넘어갔데, 앞으로 소리하긴 힘들겠는데”라며 그의 작파(作破, 소리꾼이 개인적인 사정이나 성음을 잃어 고수로 전향하는 일)소식을 수군댔다.

그는 “소리 외에 다른 진로를 생각하는 것조차 너무 슬펐습니다. 항상 극단적인 생각을 머리 끝에 매달아 놓을 정도였죠.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당시 심정을 회고했다.

벼랑 끝에 내몰린 그의 옷깃을 잡아 준건 무형문화재 박승희 명창이었다. 박승희 명창은 변해버린 그의 목소리를 듣고 “아가, 내가 너의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어디서 저런 애가 나왔나’하고 혀를 내둘렀는데, 지금 들어보니 너의 목소리가 많이 상했구나. 목이 안 좋을 땐 끝이라 생각하지 말고 잠시 쉬어가면 된다”고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진심어린 그 조언에 그는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게 됐다.

‘그래! 뭐 꾀꼬리 같은 목소리만 소리를 할 수 있어? 맑고 고운 소리가 안 되면 구성진 소리를 내면 되지! 국문학적으로 연구의 필요성이 충분한 판소리를 더욱 연구해서 제대로 알고 부르는 진짜 소리꾼이 되자!’고 작심했다. 시원한 소리를 내뱉지는 못하지만 ‘진짜’ 소리하는 사람으로 남고자 노력해온 그는 중하성음(낮은 음)을 수련했다. 상청(고음)을 잃은 대신 구성지고 야무진 시김새(판소리의 발성기교)를 만들어 냈고 창극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력과 발음에 열중했다.

그의 소리는 안정을 찾아 국립창극단에 입단했지만 폭풍우가 지난 그의 목소리는 회복되지 않았다. 청아하기만 했던 목소리는 아이의 목소리부터 할아버지 목소리까지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를 구사할 수 있게 됐다. 한 때는 큰 아픔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소리꾼이 겪어야 하는 당연한 성장통이었음을. 그때 겪은 결핍과 갈등이 지금의 박애리를 만들었다.

대타의 여왕, 한류스타로
국립창극단 간판스타의 지금의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그가 극단에서 처음 맡은 배역은 심청이 친구 10명 중 1인이었다. 당대 명창들에게 인정받은 그였지만 내노라하는 국악인이 모인 극단에서는 그저 단원 박애리였다. 실력자들이 즐비한 극단생활은 치열한 전쟁터와 같았다. 2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안정된 직장과 월급으로 또래 친구들과 여가생활을 즐길 법도 하지만, 그는 항상 연습실에 남아 부족한 연기에 공을 들였다. 또래들과 안 어울려 ‘왕따’라는 풍문까지 돌 정도로 연습에 매진했던 그.

프리 마돈나’라는 수식어는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국악전공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꿈 꿨을 국립창극단에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입단한 그는 마음을 느슨하게 둘 여유가 없었다. 꽃이 피었는지도 모른채 봄을 보내고,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지도 모른채 겨울을 맞았다. 그렇게 1~2년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작품에만 열중했던 그를, 선배들과 선생님들은 ‘늘 연습실에 있는 애’라고 불렀다. 선생님들이 부득이하게 무대에 설 수 없게 될 때면 대타로 무대에 오른 건 항상 대기조 박애리였다. 단역이든 주연이든 배역을 가리지 않고 기회가 생기면 바로 달려가 빈자리를 채웠다. 공연 1시간 전이라도 선배가 부르면 달려가 망설임 없이 대타를 섰다.

언제, 어떤 노래와 배역을 요청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언젠가 있을 공연을 위해 그의 하루하루는 연습의 연속이었다. 소리만큼은 그 누구보다 큰 욕심을 가졌던 그는 ‘그 곡은 못하는데요. 거긴 못갈 것 같아요’라는 말을 생각하는 것조차 기피했다. 이런 그의 고지식함에 팝핀현준 씨와의 결혼 발표를 들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박애리가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었냐”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이름 석자 보단 ‘국립창극단 단원’으로 불리던 시절, 국악인 박애리를 알릴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2003년 MBC 한류 드라마 대장금의 주제곡 ‘오나라’ 녹음에 참여하게 됐다. 사실 처음부터 그를 위한 곡은 아니었다. 어린이들의 소리가 필요한 제작자는 당시 국립극장 어린이 판소리 교실을 담당했던 그에게 아이들 섭외요청을 해왔다. 녹음 당일 제작자는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주는 그의 소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같이 녹음하자는 제안해 왔다.

아이들의 순수하고 청아한 목소리에 구성진 그의 소리가 가미된 완성곡은 그야말로 한류 열풍의 대표곡이 됐다. 그는 드라마 대장금이 한류 드라마로 우뚝 서게 되면서 해외 공연과 각종 행사 등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이 후 SG워너비의 ‘아리랑’이라는 곡의 피처링 작업을 시작으로 국악에 대한 대중의 귀를 사로잡기 위한 끊임없는 작품활동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소리만 고집하는 일부 사람들의 입장에선 ‘외도를 하고 있다’고 평할지는 모르지만, 그가 판소리에 녹인 인생의 농도는 누구보다 짙다. 대중가요에 국악의 맛을 가미하는 그만의 획기적인 콜라보레이션은 현재 공연계를 주름 잡고 있다. 매번 새로운 콘텐츠를 연구해 자신의 모든 소리를 쏟아내는 그의 진솔함은 익히 알려져 있다. 언제나 필요한 것을 관객에게 내어 줄 수 있는 ‘준비된 비단장수’같은 소리꾼이 되고 싶다는 그는 “나를 불러주고 사랑해주는 대중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일은 모든 무대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불명은 ‘선명심(善明心)’
무대를 향한 그의 진심과 맑음은 불교계까지 전해졌다. 19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은중송’에 심장이 크게 요동쳤던 그는 소리를 계기로 불교와 인연의 매듭을 묶었다. 불자로 익히 소문난 그도 과거에는 유아세례를 받은 천주교인이었다. 어머니의 지병으로 성당을 다녔지만 소리공부가 깊어질수록 판소리의 뿌리가 되는 불교 사상에 매료되면서 자연스럽게 불자로서 거듭났다.

평소 법정 스님의 ‘진정한 진리란 종교 너머에 있는 것이다’라는 글귀를 좋아한다는 그는 “‘내 종교’, ‘남의 종교’라는 생각을 갖고 편을 가르기 보단 자연스럽게 마음이 흐르는 곳에 머무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종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불교공연계에서 활동하는 불자 소리꾼들은 수두룩하다. 그럼에도 작게는 산사음악회부터 스님들의 다비식까지 그를 찾는 이유는 찬불가를 대하는 그의 성심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찬불가를 수천 번 불러왔지만 찬불가 ‘찬미의 나라’를 부를 때면 아직도 온몸에 전율이 돋는다는 그는 2015년 5월 8일 남양주 봉선사에서 공연한 인연으로 ‘선명심(善明心)’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착하고 밝은 마음으로 음성공양을 하면 모든 사람이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뜻을 지닌 법명은 봉선사 주지 스님이 지어주었다. 당시 건강이 안 좋아 공연이 무사히 끝내기만을 학수고대한 그에게 주지 스님은 ‘따뜻한 차 한 잔 하자’는 제안을 했다. 스님의 소박한 방안을 둘러보다 본인도 모르게 ‘스님 저도 법명을 갖고 싶어요’라고 청을 올렸다. 공연의 여운이 남은 탓일까, 향긋한 차의 향에 취해서였을까.

새내기 선명심 보살은 “불교의 편안함과 불법이 좋아 불자가 됐지만, 자신 있게 ‘불자’라고 말하기엔 껄끄러웠었죠. 반쪽만 불자 같은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선명심’이란 법명을 받고 난 후 ‘저는 불자입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닌다”며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새벽 도량이 주는 그 청량함이 좋아 매년 봉축행사가 기다려진다는 그는 올해 부처님오신날에도 부처님의 진리를 홍포하기 위한 발걸음을 재촉한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백양사에서 홀로 홑겹 소복 차림으로 무상게를 부를 때도, 살인적인 스케줄로 목이 잠겨 수심이 깊을 때도, 불법을 노래하는 순간만큼은 모든 아픔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그. 아마도 불법을 향한 그의 신심이 부처님께 전달된 것은 아닐까. 앞으로 더욱 빛날 그의 행보에 부처님의 가피(加被)가 항상 함께하길 기원한다.

▲ 2011년 백년가약을 맺은 박애리와 팝핀현준(남현준)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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