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에 전하는 진리의 원음을 듣다

삶과 죽음 공존하는 항하에서 ‘마음 비우기’ 수행
시원한 풍경의 영축산에서 부처님 설법 장면 상상
나라를 못 지키면 종교도 사라지는 게 세상 이치

▲ 기원정사 여래향실.

여섯째 날부터는 불교성지순례다. 아우랑가바드에서 뭄바이를 거쳐 바라나시(Varanasi)에 도착했다. 바루나강(Varuna River)과 아시날라강(Asi Nala River)이 합쳐지는 곳이다. 강 이름을 합치면 바라나시가 된다. 역사보다 오래된 도시며 인도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 중 하나라고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구상에서 가장 더러운 곳이라 한다. 그래서 성(聖)과 속(俗)은 불이(不二)라고 하는가?

갠지스강의 아침 풍경
이제 약간의 기대를 갖고 부처님이 성도하시고 처음 5명의 비구에 설법하신 장소인 사르나트(Sarnath , 녹야원)로 향했다. 날씨는 뜨거웠고, 녹음이 푸르른 곳이라 저쯤에선가 사슴 몇 마리가 걸어 나올 듯한 곳에 쵸유칸디 영불탑과 다메크탑이 서 있었다. 아쇼카대왕이 세운 이 탑들 외에는 건물 흔적만 남아있다. 그 찬란했을 유적들이 아쉽게도 다 사라졌다. 이슬람 세력들이 세긴 셌나 보다.  녹야원에서 부처님의 설법모습은 이제 산치대탑과 아잔타 석굴, 그리고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아직 다른 성지들이 남아있는데 갠지스강도 이번 기회에 봐야한다. 다음날 새벽에 드디어 갠지스강에서 배를 타 촛불 하나씩 띄우면서 불타는 강변의 화장터를 바라보았다. 땔감이 없어서 시체를 조금만 태워서 갠지스강으로 보낸다고 하는데 여기 문화니 할 말이 없다. 날이 밝아오니 강변의 가트(Ghat)에서 몸과 옷가지를 씻고 있는 많은 힌두교도들이 보였다. 내친김에 화장터 맞은편 항하사에서 일출까지 보았다.

여기오니 한국의 봉이 김선달이 왔는지 그 넓은 항하사에서 항하사를 퍼서 팔고 있었다. 그런 항하사를 사왔으니 우리 일행은 항하사만큼의 돈을 두고 그냥 온 거다. 그래도 미련일랑 버리고 비워야 사는 거다. 마음은 비워도 먹어야 또 순례를 할 수 있으니 아침공양을 위해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 행선지는 예부터 많은 성인이 성도를 이루시고 부처님께서 대각을 이루시고 그리고 가장 보고 싶었던 명당터 보드가야(Bodhga ya)다. 버스의 에어컨은 벨트가 끊어지고, 타이어는 펑크가 났어도 다른 차로 갈아타고 일행은 성스러운 땅에 도착했다. 성스러운 땅을 보려하니 방해가 없을 수 있나.

성도(成道)하시기 전에 고타마 싯다르타는 왕자 신분을 버리고 카필라성(왕궁)을 나와서 사냥꾼과 옷을 갈아입고, 바이샬리와 라즈기르에서 스승을 만났고, 설산에서 고행을 하시는 등 수많은 고행을 하셨지만 위없는 절대 진리는 터득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보드가야 근처에 있는 정각산에서 대각(大覺)을 이루려고 하다가 산신들의 시기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곳 용왕의 간곡한 부탁으로 그림자만 남겨놓고 보드가야로 와서 대보름에 정각(正覺)을 이루셨던 것이다.

그 후 7주간 대각성지 보드가야에서 선정에 드셨고, 선정을 마치신 후에 사르나트로 가셔서 첫 설법을 하셨다. 보드가야에는 보리수 나무와 방추형의 대정사(스투파, 높이 약 52m)가 소리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 일행도 대각성지의 금강보좌와 가까운 곳에 자리를 만들고, 그 위에 모기장을 펴고 성지의 기운을 느끼며 석가모니불 정진에 들었다. 입에서는 뜻하지 않게 관세음보살이 염송된다. 마음 놓고 고성(高聲)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안 될까. 이대로 밤을 홀딱 새우면 안 될까. 밤 10시가 되면 쫓겨난다고 하니 아쉬움과 성스러운 기운을 뒤로 하고 탑돌이를 하며 자리를 떴다.

죽림정사와 나란다대학 터
다음날은 역시나 성스러운 땅인 영축산으로 이어졌다. 어디에서 읽었던가. 법화삼매에 이르면 영축산에서 부처님께서 대중에 묘법연화경을 설법하시는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영축산에 서서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영축산의 시원한 풍경을 만끽하면서 내려오는 길에 폐허가 된 빔비사라왕의 감옥터를 지났다.

가까운 곳에 네누반 비하르(죽림정사)가 있었는데 가는 길에 온천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 온천에는 손님들이 제각기 물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계층에 따라 윗 계층에서 쓰던 물을 받아써야 한다고 한다. 외국인은 중간 계층 정도의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가이드는 온천욕 할 사람을 물었지만, 대중으로부터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죽림정사 터에 도착했다. 왕 빔비사라는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편히 머물고 설법하실 장소를 찾다가 이곳을 발견하고 당시 대부호였던 칼란다(Kalanda)로부터 기증받아 사원을 만들었다. 지금은 정사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대나무 숲과 칼란다 장자의 연못만이 남아있다.

다음에 이어지는 나란다(Naland a) 대학도 온전한 유적이 아니다. AD 5세기 황제 쿠마라 굽타에 의해 최초 설립된 이 대학은 서기 12세기 회교의 침입이 있기 전까지 왕성하였던 당대 최대의 대학이였다고 한다. 당시 이 대학에 입학하고자 많은 학생들이 재수, 삼수, 심지어는 10년을 공부하는 학생도 있었고, 나란다 대학생이라고 하면 사회에서 대우가 좋았다고 한다. 온전한 건물은 한 채도 없었으나 다른 건물에 비해 기숙사와 목욕탕이 상태가 좋았고, 일행의 관심을 끌었다. 

열반의 길 대승의 길
아홉째 날은 바이샬리(Vaishali)를 순례했다. 부처님이 가시는 곳마다 해를 끼치려는 자들이 있었으나, 바이샬리만은 아무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 지역의 평원에는 밀과 보리가 황금들녘을 만들며 추수를 기다리고 있었고, 옥수수와 바나나가 군데군데 녹색들을 만들고 있었다. 예부터 농산물이 풍부한 고장이라 상업이 발전했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무, 배추, 그리고 오이 등의 채소를 운반하는 모습이 눈에 자주 보였다. 부처님이 바이샬리에서 지독한 가뭄이 들어 많은 사람이 기근과 질병으로 죽는다는 소리를 들으시고, 이곳으로 오셔서 주문을 외워 비를 내리고 질병을 사라지게 하시니, 이곳의 리차비왕이 부처님을 위해 대림정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바이샬리는 최초 비구니 승가와 동자승(라후라)이 허락되었던 곳이고, 부처님 열반의 길이었고, 대승이 시작된 곳이며, 재가불자를 위한 2차 결집이 있었던 곳이다. 또, 부처님의 재사리를 봉안했던 사리탑의 흔적이 남아있고, 유마거사의 집터도 있고, 당시 미모로 유명한 명기 암라팔리의 집터도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부처님의 일화는 많으나 온전한 유적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부처님의 유적들이 손실이 많아서 매우 안타깝지만, 여기서 순례를 그만 둘 수는 없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던 쿠시나가르(Kushinagar)에서 열반당(니르바나 템플)을 방문하고 와불상에 가사를 입히는 의식을 거행했다. 부처님은 왕사성에 얻은 병이 깊어지고 있었는데, 쿠시나가르를 지날 쯤 지극한 불자였던 대장장이인 춘다의 마지막 공양(썩은 돼지고기)을 받게 되면서 돌이키기 힘든 상황에 이르렀다고 한다.

쿠시나가르에 도착한 부처님은 두 그루의 사아라나무 사이에 누우셨고 이곳에서 아난다에게 제행무상(諸行無常)하니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삼아 수행정진(修行精進) 게을리 하지 말라는 말씀을 남기고 열반에 드셨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사인연이 이곳에서 끝났던 것이다. 이곳을 순례하는 동안에 말 못할 엄숙함이 우리 일행을 압도했고, 부모와 이별하는 어린아이의 심정 같았다.

숙연함도 잠시이고 벌써 인도의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수다타의 집터가 있고, 앙굴리마라의 토굴터가 있으며, 기원정사가 있는 스라바스티(Sravasti, 사위성)로 향했다. 이제 여행의 끝을 향하면서 우리 일행의 심정에도 변화가 생길 때가 되었다. 이럴 때 초발심 자경문의 ‘늘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도업이 항상 새롭고, 항상 경사스럽고 다행한 마음을 내면 마침내 물러나지 아니하리(長起難遭之想 道業恒新 常懷慶幸之心 終不退轉)’라는 말이 떠오른다.

수행자에게는 마음에 변화가 있을게 무엇이 있겠는가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이 정도되면 마음은 준비가 되리라 믿고, 기원정사를 살폈다. 사리불의 사리탑과 여래향실 터를 둘러보았고, 부처님의 설법대를 구경하였다. 가슴높이의 설법대는 아직도 부처님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 했다. 여기의 보리수 나무는 대각성지 보드가야의 금강보좌 보리수에서 왔다. 아난존자가 스라바스티에서 마등가의 주문에 걸려 마귀도에 떨어지려는 것을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구해냈는데, 이에 아난존자는 부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이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아난존자의 애절함과 애틋함이 보이는 듯하다.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
마지막 불교성지, 경사스러운 장소인 룸비니(Lumbini)가 남았다. 룸비니는 인도국경을 넘어 네팔에 있다. 네팔은 생활물자를 전적으로 인도에 의존하기 때문에 국경에는 출입국관리소를 지나려는 수많은 대형 트럭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긴 시간의 가다 서다를 반복하여 성지에 도착했다. 부처님이 세상에 오신 곳이며, 평화를 설법하신 곳이다. 아쇼카왕의 기념비가 있고, 마야데비정사도 있으며, 구룡못과 무우수(無憂樹)가 있다. 무우수는 마야데비 부인이 해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던 중 룸비니 동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게 되는데 갑자기 산기를 느껴 동쪽으로 뻗은 사아라나무 가지를 붙잡고 왕자를 순산하게 되는데 그때 사아라나무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한참을 앓던 이가 쑥 빠진 느낌이다. 여기는 1달러를 외치는 아이들과 장사치들이 많이 줄어서 갑자기 조용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까지 부처님의 성지를 모두 순례했다. 성지의 온전한 유적과 유물이 사라지고 불교도가 사라진 인도는 나를 참으로 안타깝게 만들었다. BC 1500년경부터 서북인도에 들어오기 시작한 아리아인들이 브라만교 전성시대를 열다가 BC 6세기에 출현한 불교가 마우리아왕조(아쇼카대왕)에 의해 전성기를 가졌다. 브라만교에 뿌리를 둔 힌두교가 불교를 수용하고 변천과 성장을 거듭하여 굽타왕조 때 다시 전성기를 가졌다. 나란다 대학을 보더라도 이때까지도 남아있던 불교는 이후 이슬람 세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인도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고 현대에까지 이어져 오게 된 것이다.

여기서 뼈아픈 교훈들이 되살아난다. 국가를 지키지 못하면 기존의 종교도 또한 지키기가 어렵다. 우리의 역사도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다. 아시아의 몇몇 불교 국가들을 더 둘러보고 한국불교의 방향과 미래를 조금이나마 점쳐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음 편은 아시아 여러 국가들을 둘러본다.

▲ 룸비니.
▲ 녹야원 다메크탑.
▲ 영축산 <밥화경> 설법터에서 정진하는 순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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