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2560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법요식 및 각종 봉축행사가 마무리돼 가고 있다.
올해에도 아쉬움이 남는다면 부처님오신날이 해마다 의례적인 행사에 치우쳐 있다는 점이다. 요식적이거나 행사 위주의 봉축만으로는 부처님이 사바세계에 오신 참뜻을 알릴 수 없다. 우리가 부처님오신날을 찬탄하는 이유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생사의 굴레로부터 해방되어 영원한 자유와 행복을 성취할 수 있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가르침을 보다 더 많은 중생들에게 알려 구제를 도모하는 일이 부처님오신날을 기리는 참뜻이라 할 것이다. 

부처님오신날에 대한 기념은 뜻을 기리는 것이지 화려한 이벤트가 능사는 아니다. 다시 말해 전통등 전시회 등 이벤트나 의례에만 지나치게 집중하게 되면 부처님은 사월초파일 딱 하루만 우리에게 왔다 가는 형국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불교사상과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는데 보다 더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날마다 부처님이 우리 곁에 오게 되고 날마다 좋은 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불전에 이르길 “정토는 모두 여래의 행원(行願)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예토는 오로지 중생들의 공업(共業)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는 중생들의 업연(業緣)이 쌓이고 연결돼 세상의 모든 현상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업(善業)이 모아지면 우리 사회는 한결 밝아질 것이고, 반대로 악업(惡業)이 축적되면 분란과 갈등이 야기된다.

불교에서는 개인적으로 받는 업을 별업(別業)이라 하고 공동으로 받아내는 업을 공업이라고 한다. 예토를 정토로 바꾸기 위해선 공업이 매우 중요하다. 우주만유(宇宙萬有)가 평등한 경지로 나아가야 하며 우리가 본래 구족(具足)하고 있는 불성(佛性)을 갈고 닦아 빛내야 정토의 세계가 열린다. 

중생들의 행복과 자유란 교리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무명의 타파에서 해답을 제시하고 있지만 사회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평등과 평화가 기본적인 요인으로 꼽힌다. 즉 사회적 측면에서 평등은 신분과 지위를 가르는 것을 가리킨다면 평화는 마음의 평정을 뜻한다. 평등과 평화의 구현은 중생들의 공업으로 이루어내야 할 공동과제라 할 수 있다. 

삼독심이 상존하고 있는 사바세계에서 차별이 존재하는 한 증오와 다툼은 끊이지 않는다. 평화를 무시한 채 눈앞의 이익에 몰두해 갈등과 대립을 부르는 사회는 번영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늘 분란과 충돌을 야기함으로써 깊은 상처만 양산할 뿐이다. 불교는 교리적으로나 교단의 성격상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이며 평등을 절대적으로 제안하는 종교다. 그래서 절대 평화이며, 절대 평등의 종교라 할 수 있다. 

지난 해 네팔에서 대규모 지진이 발생한 데 이어 올해에도 일본과 에콰도르에서도 강진이 발생했다. 이란과 시리아 등 세계는 여전히 전쟁과 폭력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모든 것이 인간의 욕심이 빚고 있는 참화에 해당한다. 인간의 이기주의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무분별하게 남용된 자원개발은 지구를 멍들게 하고 있을 뿐 아니라 편협한 국가 종교 문화관은 일촉즉발의 전쟁위기를 고조시킴으로써 인류를 두려움과 공포 속으로 밀어넣고 있다.
 
부처님이 이러한 사바세계에 오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부처님은 맹목적으로 사바세계에 나투시는 것이 아니다. 중생들이 누려야 할 자유와 행복을 갖고 오시는 것이다. 이 선물을 받고 안 받고는 부처님의 뜻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 또한 우리가 그 선물을 받았음에도 활용하지 못해 고통 받고 있을 뿐이다.

예토를 정토로 가꾸는 것은 우리의 공업이다. 그러므로 공업중생으로서 매일 매일을 좋은날로 가꿔야 한다. 매일 매일이 좋은날로 부처님오신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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