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을 따라가며 순리의 길을 보다

▲ 산치대탑.

종교인에게 성지순례는 어떤 의미일까? 성지라는 단어와 순례라는 단어가 갖는 경건성은 일반적인 여행과 사뭇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성인(聖人)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을 찾아가는 그 자체가 수행이며, 경배와 찬탄 그리고 뉘우침과 다짐으로 마음을 새롭게 돋우는 것이 성지순례의 목적이자 보람일 것이다. 매년 진행되는 천태종 스님들의 성지순례 역시 성지를 순례하며 수행자로서의 내면을 다지는 수행의 일환이다. 금년 성지순례는 부처님의 법향이 감도는 인도와 네팔 그리고 태국과 대만을 거쳐 오는 16일의 장정이었다. 그 순례의 기록을 3차례에 나누어 연재한다. 글을 통해 스님들의 순례에 동참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편집자〉

무질서 속의 질서를 보는 것이 성지순례의 참맛
산치대탑의 조각 부처님 생애 전하는 귀한 유산
중생의 고통 살피지 않으면 ‘불교’ 지킬 수 없어

성지순례(聖地巡禮)를 다녀왔다. 순례일정은 이동하는 날을 제외하고 인도에서 10일, 네팔에서 1일, 태국에서 1일, 그리고 대만에서 3일이었다. 맡은 소임이 있는 승려로서, 수행자로서 16일의 성지순례는 결코 가벼운 기회가 아니었다.

인도는 불교가 탄생한 곳이지만, 지금은 불교의 흔적만 남아있는 나라로 기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회는 자주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중했고, 부처님의 행적(行蹟)을 따라 순례를 하면서 성자(聖者)의 가르침을 생각하고 참회의 시간을 가져보고 싶었다.

아, 여기가 인도구나

인도는 날씨가 덥기 때문에 한국의 추운 3월을 피할 수 있어서 기대가 되었다. 인도는 다양한 문화를 가진 나라로 기억하는데 사고의 틀을 깨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여행처가 아닌가 싶다. 내게도 그런 기회가 오면 좋을 듯싶다.

첫날은 구인사를 출발해서 인천황룡사에서 1박을 했다. 다음날 아침 황룡사 신도님들의 따뜻한 접대와 축하의 열기가 식기도 전에 우리 일행은 비행기에 올라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를 갈아타고 델리 인디라 간디공항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였고 곧바로 호텔로 이동하였다. 여기는 모두 운전석이 오른쪽이고 왼쪽 차선으로 움직이는데 며칠간 당황스러운 일들을 겪었다. 버스를 탈 때는 습관적으로 앞쪽에서 볼 때 왼쪽으로 가는데 갈 때 마다 그곳에는 문이 없었다. 공항에서 갑자기 더워졌음을 실감하고 ‘아, 여기가 인도구나’라고 생각했다. 한국도 따뜻했으면 하는 생각과 함께 하루가 저물었다.

셋째 날은 얇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인도의 더위는 수행의 의지까지도 집어삼킬 듯이 다가왔다. 이제는 인도의 구석구석을 살필 여유가 생겼다. 인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약간의 역사도 알 필요가 있다. 인도를 정치적으로 통일을 이룬 왕조는 마우리아왕조(BC 321년 ~ BC 185년), 굽타왕조(AD 380년 ~ AD 606년), 무굴왕조(AD 1526년 ~ AD 1858년) 등 세 왕조뿐이다. 무굴왕조 멸망 이후에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1947년 8월 15일에 독립하여 인도는 주권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종교적 대립으로 인해 힌두교의 인도와 이슬람교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불교의 스리랑카로 나뉘어졌다. 불교는 마우리아왕조의 아쇼카대왕에 의해 크게 발전하고, 마우리아왕조가 무너진 뒤 쿠샨왕조의 카니슈카왕 때 불교를 보호하고 포교에 힘쓰게 된다. 굽타왕조 때는 힌두교가 대두되고 인도 고유문화가 발전한다. 무굴왕조는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한 이슬람 제국이다.

인도의 역사를 생각하는 사이에 델리 시내의 외국 대사관 관저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도로 양변으로 푸른 잔디밭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대사관들이 이어졌다. 첫째 줄은 강대국들 관저이고, 둘째 줄에 북한대사관 관저가 있으며, 한국은 수교를 늦게 맺어 셋째 줄에 있다. 버스는 인도 정부청사 건물들 사이를 달려서 국회의사당과 대통령궁 앞을 지나쳤다. 높이가 42m나 되는 인디아게이트에 도착했다. 인디아게이트는 영국이 1차 대전 때 전사한 9만 명의 인도병사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로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장사치들과 구걸하는 애들을 만났는데 날씨도 더운데 좀 성가셨다. 많은 개들이 도로 위에서 누워 자는 게 아니라 자빠져 잤다. 개들은 저녁 9시면 잠에서 깨어나 설치는데, 못 본 척 피하는 게 여러모로 이익이라 했다. 부정적인 게 아니라 인도에 적응하는 거다. 인디아게이트에 이어서 마하트마 간디의 집과 박물관을 방문하였지만, 이곳은 인연이 없는지 오전 9시에 여는데 아직 개방을 안했다.

시간이 없었다. 델리에서 좀 떨어진 도시 아그라(Agra)로 가야했다. 세계문화유산인 타지마할과 아그라성이 있는 곳이며, 무굴제국의 수도였다. 카오스 이론에서 무질서 속에서 질서가 정연하다고 했던가? 아그라가 아니 인도가 그렇지 않을까? 온통 널려있는 쓰레기와 썩은 시궁창 물들, 개와 소, 그리고 사람이 어울려 있는 이 도시에서 다음날에 축제가 시작된다고 했다. 홀리(Holi)는 힌두교도들이 수확이 끝난 후 봄이 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축제이다.

아그라성과 타지마할

아그라 시내 한쪽에 아그라성이 붉은 색을 띄며 웅장하게 서 있었다. 붉은 벽돌사이로는 개미 한 마리도 못 지나가게 튼튼하게 쌓았단다. 겉보기에 웅장하지만 사실 좀 을씨년스럽다. 그래도 황제가 살던 황궁인데 어딘가 화려하고 아늑한 공간이 자리할 것이라고 한 가닥 기대를 걸었다.

성 주변으로 해자가 파져 있고 이중 성벽으로 만들어진 요새다. 우리 일행은 비둘기들이 공중에서 끊임없이 던져주는 선사품들을 양산과 온몸으로 막으며 들어갔다. 가장 화려한 곳은 역시나 황제 침전이 아닐까. 무굴 제국의 5대 황제 샤자한(Shah Jahan, 재위 1592~1666)이 거주한 장소인 하스 마할(Khas Mahal, 침전(寢殿))은 정교한 대리석들로 치장되고 화단, 수로, 분수 등을 설치하였다. 타지마할에서도 보게 되지만 하얀 대리석을 붙이고 홈을 파서 검은색 대리석을 무늬로 넣었다. 어느 세월에 이런 작품을 만들어 궁전을 세우고 타지마할을 세우나, 사실 개인적으로 기가 막힌다. 그 시간과 돈으로 국민을 먹여 살렸으면 복지국가가 되었을까? 이렇게 하니 말년에 고생한 거야. 실제로 황제 샤자한은 왕정의 재정파탄을 이유로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바로 옆 건물, 8각형의 커다란 탑인 무삼만 버즈(Musamman Burj)에 유폐 당한다. 거기서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성 너머로 보이는 타지마할 무덤을 바라보다가 죽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무덤에 가보았다. 왕비 뭄타즈 마할은 15번째 아이를 낳으려다 세상을 떴는데, 샤자한은 그 부인을 추모하기 위해 이 무덤을 만들었다. 여기 들어가려면 몸수색을 두 번 당하고 무덤 안에서는 플래시를 터뜨리면 안 된다. 무덤 크기는 경주에 있는 왕릉들 보다 더 크다. 무덤 앞 정원의 길이만 300m이고, 22년 동안 만들었다고 한다.

무덤 옆에 흐르는 야무나 강으로부터 습기가 올라와 대리석들이 깨어지지 않고 원형을 보존하며 이중으로 지어진 돔의 건축기법은 과학으로 풀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게 끝이 아니다. 무덤 건물 가까이에 가서 보면 하얀 대리석으로 온통 덮고, 대리석에는 무수한 홈을 파서 다른 색깔의 대리석, 보석, 그리고 준보석으로 무늬를 넣었다. 샤자한이 구인사에 왔으면 무상(無常)의 진리(眞理)를 배우고 국민들에 보살행을 했을 것을... 여기까지는 불교유적지가 아니라서 그런 거야. 씁쓸한 마음을 뒤로 하고 이제부터는 불교 유적을 순례할 차례다.

탑과 석굴에 새겨진 역사

아그라시에서 산치 불교유적지가 있는 보팔(Bhopal)까지는 기차로 이동했다. 기차에서는 현 지역주민과 대화도 나누고 했지만, 비교적 위생상태가 좋지 않아서 즐겁지 않았다. 그래도 혼자 여행한다면, 기차를 이용할 거다. 숨이 헉헉 막히는 오후에 일행은 산치의 불교유적지에 도착했다. 세계문화유산인 산치의 불교유적지는 아쇼카 대왕이 대업을 이루고 자식들과 함께 부인이 묻힌 곳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투파(산치대탑)를 건설한 장소이다. 90m 높이 언덕위에 지름 36.6m, 높이 16.5m의 탑이다.

사실 눈으로 볼만한 광경은 별로 없지만, 산치대탑의 조각내용이 후대에 역사적 싯다르타의 행적을 고증한 훌륭한 문헌적 자료가 되었다고 하니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이다. 부처님에 관한 일화가 부처님 성지에서는 볼 수 없고 산치대탑과 앞으로 가야할 아잔타와 엘로라 석굴에서만 볼 수 있다니 애석한 일이기도 하다. 외부세력으로부터 국가를 지키지 못하면 고유의 문화와 종교는 이렇게 말살되고 만다. 그래서 애국불교가 중요한 것이다.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서 세계문화유산인 아잔타 석굴을 관람했다. 29개 석굴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부 구조와 벽화들은 소승불교시대와 대승불교시대를 달리한다. 대부분 비하라(Vihara, 승려거처) 양식으로 조각, 벽화 그리고 채색이 이루어졌다. 부처님의 녹야원 설법모습, 마야데비가 어금니 6개 달린 코끼리 꿈을 꾼 그림, 순다리(Sundari) 그림, 화장을 하고 있는 공주의 모습, 술을 권하며 연인을 유혹하는 왕자의 모습, 깨달음을 얻고 집으로 돌아온 붓다가 아내와 아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모습, 그리고 부처님과 관련된 자타카(Jataka)의 장면들이 묘사되어있다. 여기서 수행했던 승려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러한 수행처를 만들려면, 그 시대는 틀림없이 불교가 융성한 시대여야 한다. 지금은 인도에서 불교가 매우 미약하다는 것이 안타깝다. 불교의 융성한 시대도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미약해지는 시대의 유적지가 엘로라(Ellora) 석굴사원이다. 아잔타 석굴에서 100km 떨어진 34개의 석굴 중에서 12곳은 불교 사원, 17곳은 힌두교 사원, 5곳은 자이나교 사원으로 지어졌다. 아잔타 석굴의 마지막 시기와 엘로라 석굴의 처음 시기는 중첩된다. 여러 종교가 혼합되어지는 모습에서 불교의 쇠퇴를 읽을 수 있다. 이후로는 다시는 인도에서 불교가 융성해지는 시대는 없었다. 애석하다. 다음날은 그 애석함을 가지고 폐허가 된 불교성지인 바라나시(Varanasi)로 날아갔다. 이제부터는 진짜 부처님의 성도에서부터 열반에 드실 때까지의 행적을 순례할 차례다.

▲ 엘로라 석굴.
▲ 타지마할.
▲ 아잔타 석굴 앞에선 순례단.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