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생각’하는 불자로 멋진 100세 인생 살자

 

<심상사성 금강경> 필자가 불교를 말로만 알던 시절에 쓴 금강경 해설서 제목이다. ‘심상사성(心想事成)’. 마카오 포르투갈 중국음식점 메뉴에서 본 저 글귀는 지난 15년간 필자에게 화두였다. ‘마음에서 생각이 일어나니 일이 이루어지더라!’ 라는 말이다. 이번 연재가 4회 차인데, 이 글과 인연이 되는 많은 분들이 이렇게 일으킨 생각이 다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 간의 연재를 마무리하고 싶다.

먼저 ‘사성(事成)’은 ‘일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우리는 많은 일들을 마주하면서 산다. 더 정확히는 절에 다니면서 기도하는 각각등보체(各各等保體) 심중소구소망(心中所求所望)이 다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어떤 때는 아이가 건강해지는 일이 일어나길 바라고, 어떤 때는 아이가 공부 잘하길 바라고, 어느 순간에는 돈을 많이 버는 일이 일어나길 바라고, 어느 때는 건강해지길 바라고, 또 어느 때는 승진하거나 합격하거나 결혼하길 바라거나 아이를 갖길 바라는 일들이 모두 이뤄지길 바란다. 더 자세히는 어떤 문제, 남과의 다툼, 소송, 이혼, 정년퇴직, 명예퇴직 등 생로병사가 길목 길목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이뤄지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일으킨다. 필자 역시 그랬다.

삶의 굴레, 벗어나려면

그런데 어떤가? 그래서 기도도 하고 108배도 하고 사경도 하고 독경도 하고 천도재도 지내고 연등도 달고 인등도 달고 불사도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는 등 착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런 것이 이뤄지더라도 잠시뿐이고 그 다음에 다른 문제가 오면 절하기엔 몸이 늙었고 사경하기엔 눈이 침침하고 봉사하기엔 경제가 부족하고 불사하기엔 생활비조차 못 내고 매달 돌아오는 세금과 카드빚을 돌려막기도 바빠진다. 그때서야 종교를 바꾸기도 하고, 다음 생을 기대하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염하기도 한다.

그런 악순환을 벗어나시라고 이 글을 쓴다. 그 악순환을 벗어나는 것은 부처님의 연기법을 응용하면 된다. 부처님께서는 십이연기를 가르치셨다. 무명(無明)에서 행(行)이 일어나고, 행이 일어나니 식(識)이 일어나고, 식이 일어나니 명색(名色)이 생기고, 명색이 발동하니 육입(六入)이 들고 일어나고, 육입이 난동을 부리니 촉(觸)이 발동하고, 촉이 설쳐대니 수(受)가 일어난다. 즉 다시 말해 자기 맘에 드는 것 갖고 싶어 하고, 가진(受) 다음에는 사랑(愛)에 빠지고, 사랑에 빠지니 영원히 취(取)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고, 욕망을 취하니 생김이 나타나고, 존재 유(有)의 생김이 나타나니 같이 살게 되고, 같이 생(生)하며 살다보니 어느 날 노사(老死), 즉 늙고 죽음의 이별이 온다는 것이다.

이것을 벗어나는 방법도 가르치셨는데 그 방법은 십이연기의 역순(逆順)이다. 이것은 해탈(解脫)의 비법(秘法)이기도 하다. 먼저 늙고 죽지 않으려면 태어나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이미 태어난 우리이므로 생을 살되 다른 생을 살면 된다. 즉 육신이 아니라 법신의 나로 살아가는 생을 말한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의법출생이라고 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어렵다면 소유하지 않으면 된다. 그래서 법정 스님께선 무소유(無所有)를 그렇게 가르치셨다. 이것마저도 어려운 사람은 취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누라도 자식도 다 버리는 출가(出家)가 등장한다. 그것도 어렵다면 몸이 출가하는 ‘신(身)출가’ 대신 마음이 출가하는 ‘심(心)출가’도 있다. 필자의 목표는 여기다. 이것은 어렵지 않다. 내 자식만큼 남의 자식을 사랑하면 된다. 그럼 내 남편 대신 남의 남편을 사랑해도 되나요? 물론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취하는 것을 버리기 어렵다면 사랑하지 않으면 된다고, 사랑하지 않으려면 애시 당초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않으면 된다.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애당초 접촉금지 하면 된다. 그래서 ‘남녀칠세부동석’이다. 접촉금지도 어렵다면 육입(六入), 즉 보고 듣고 말하지 말고 육근 경계를 닫아버리면 된다. 육근 경계를 닫는 방법은 간단하다. 명색을 취하지 않으면 된다. 즉 3살 이전의 아기처럼 순수해지면 된다. 순수해 지려면 식(識이) 맑아야 하고, 식이 맑아지려면 바른 8정도의 행을 하면 되고 그러면 드디어 무명이 밝음으로 된다. 바로 ‘나무아미타불’의 아미타 부처님 광명의 세계, 혹은 일광보살 월광보살이 지켜주시는 동방약사여래 같은 44대원이 그 자리에서 나타난다.

마찬가지다. 부자 되는 방법도 성공하는 방법도 거꾸로 가면 쉽다. 어떤 일은 바라지만 일(事)은 그냥 일어나는 법이 없다. 기도건 착한 일이건 우리가 급할 때 보면 이미 생각을 일으킨 다음이다. 그럼 우리는 어떤 한 생각을 일으켜야 할까?

큰 생각에 걸맞는 힘

그 생각이 ‘심상사성’의 두 번째 글자인 ‘상(想)’이다.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바라는 일이 100억을 갖게 되는 일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나려면 그 사람은 ‘100억을 어디에 쓸 것인가?’ 정도의 생각은 해야 한다. 가령 우리나라 재벌 집에서 아버지 재산이 5000억이라고 해보자. 그런데 자녀가 ‘아버지 저 100억만 주세요!’ 한다고 하면, 그 아버지가 줄까? 필자 생각에는 그 아버지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어디다 쓰게?’ 만약 그 아버지 질문에 자녀가 아버지가 납득할 만한 대답을 하면 줄 것이다. 처음에 10억 주었다가 하는 것 봐서 40억 주고 그 다음에 ‘정말 잘 하네’ 싶으면 나머지 50억 주고, 경우에 따라서는 ‘300억 정도 더 주랴?’ 할지도 모른다. 그냥 아버지가 말없이 100억 주는 법은 없다. 그런 아버지라면 애당초 5000억 가진 아버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정도 질량의 돈을 가진 분이면 그 정도 돈에 걸 맞는 ‘생각하는 힘’이 있으신 분들이기에 그렇다.

마찬가지다 100억을 갖는 일이 일어나려면 그 100억이 소요되는 ‘큰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한다. 필자는 모 불교방송국에서 ‘부자양성 프로젝트 44’라는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그 44 라는 숫자는 우리처럼 일반 중생이었던 시절에 일곱 분의 약사여래님께서 하신 ‘큰 생각 44가지’를 말한다. 쉽게 말해서 100억이라는 ‘돈 에너지 E’를 담으려면 그에 걸 맞는 ‘MC(Mental Consiousness)’ 정신적 의식! 즉 생각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조상님이 감응을 하시건, 산신이나 용왕신이 감응을 하시건, 화엄성중님이 감응을 하시건, 관세음보살님이 감응 하시어 ‘E=MCC’ 가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생각하는 힘’이다.

사심인가? 공심인가?

그러면 마지막 남은 마음, 즉 그 마음(心)은 무엇인가?

우리의 무명은 어디에서 자라나는 것일까? 바로 마음이다 그래서 마음을 밭이라고 해서 마음 밭, 즉 심전(心田) 이라고 한다. 마음은 크게 보면 네 가지고, 작게 보면 세 가지다. 먼저 세 가지를 보면 첫째, 사심(私心) 둘째, 공심(空心) 셋째, 무심(無心)이다. 그리고 공기업 사기업 할 때의 공심(公心)이 추가되면 네 가지 마음이 된다.

한국불교는 어찌 보면 조선시대 600년간의 탄압과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왜색 칠하기가 가미되고, 해방이후에는 서양종교에 다시 그 힘을 잃어 어찌 보면 부처님 당시의 가르침과는 많이 다르다. 스님들께서 탁발을 하시는 것도 아니고,   화가 스님도, 가수 스님도, 악기연주하시는 스님도, 사업하시는 스님도 계시다. 또 요리하시는 스님도 계시고, 무술하시는 스님도 계시다. 개그맨 스님, 축구하시는 스님, 골프, 농구 등 다양한 스님이 계시다. 정당에 가입해서 정치하시는 스님도 계시고, 환경운동하시는 스님 등 참으로 다양하다. 나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시대상황에서 존재하는 진여(眞如)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불교가 위대한 것은 아직도 대부분의 스님들이 ‘공평한 마음(公心)’ 혹은 ‘비어있는 마음(空心)’으로 사시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재가자들은 필자를 비롯해서 사심이 우선한다. 사심(私心)이라는 것은 사악한 사심(邪心)이 아니라 각각등보체 사적인 욕망이 우선하는 사심이기에 절대 나쁜 마음이 아니다. 독립군들도 집에 생활비는 보내주어야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절대 ‘사’가 ‘공’에 앞서지는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위인들을 보면 선공후사(先公後私) 하시던 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을 사심의 마음 밭(田)에 심는가? 공심의 마음 밭에 심는가? 마음에 따라 ‘씨앗’인 생각, 상(想)의 성장이 달라진다. 식구 두 사람인 사람이 100억을 벌겠다는 생각이나 상상을 하는데, 실제 100억이 생기면 95억은 은행에 넣어두고 VIP 대접 받고 3억은 집사고 2억은 차사고 하고 싶은 경우가 태반일 것이다. 이런 생각이라면 5000억 가진 아버지가 자녀에게 100억을 주지 않듯이 법계도 이런 사람에게 100억을 주는 일이 없다. 돈은 ‘법계의 에너지’이기에 그렇게 낮은 질량의 상상에 빨려오거나 반연(攀緣)되는 법이 없다.

100세 인생, 당당하고 부유하게

우리는 이제 생각하는 힘을 가져야 한다. 어떤 소원도 좋다. 자녀 결혼도, 돈도, 떼인 돈을 받는 것도, 빚을 갚는 것도, 큰 집 사고 새 차 사고 병 고치고 오래 살고 등. 그러나 우리는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왜 그 것이 필요한지를. 그리고 어느 마음 밭에 그 씨앗을 심어 파종하고 길러내고 열매를 맺을지를 알아야한다. 그래야 100세 아니라 120세를 살아도 당당하고 멋진 삶이 될 것이다.

이것을 알게 되면 ‘심상사성’, 즉 마음에서 상상을 하면 원하는 일이 이뤄진다! 라는 말이 되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되기도 한다. 곧 모든 것이 오직 마음이 조성해 놓는 것이다! 라는 말이다. 그러나 어느 마음이란 말인가? 100층짜리 빌딩을 남의 땅에 짓겠다는 말인가? 사막에 짓겠다는 말인가?

미국이 금리를 올리지도 내리지도 못하고, 유럽은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하려 하고, 일본은 이미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하고, 중국은 급성장의 진통을 앓고 있다. 우리나라에 종합주가지수 3000을 가져다 놓겠다는 대통령 공약은 이미 대통령 본인도 포기하신 듯하다. 지금은 공산주의가 무너진 다음에 자본주의가 무너져 가고 있다는 소리이다. 돈이 돈을 버는 것이 자본주의 인데, 마이너스 금리가 도입되었다는 것은 이미 돈의 패러다임과 그 흐름이 달라졌다는 소리다. 앞으로는 성공의 공식과 빈부의 공식이 달라진다. 아는 것이 힘인 시대는 같으나 지식의 힘보다는 지혜의 힘이 승패를 좌우할 것이다. 종교를 불교로 가진 사람들이 승천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기도하는 방법도 바뀌어야 한다. 과거에는 빌면 받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아니다. 빈다고 복을 주는 시대는 지났다. 과거에는 믿기만 해도 용서받는 시대가 분명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시절에는 우리가 지식과 힘이 없어서 통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 큰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면 부모님을 돌보는 일이 법계의 이치다. 개인도, 나라도, 사회도, 국가도, 누가 누구에게 빈다는 말인가? 과거에는 정부가 기업도, 종교도, 개인도, 돌봤다. 그러나 지금은 기업과 개인과 종교가 국가를 돌봐야 한다. 이것을 불교신자들이 제일 먼저 하고 이것을 불교단체가 제일 먼저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분이 제일 먼저 그런 분들이 되시라는 저의 말은 어차피 사홍서원(四弘誓願)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 아닌가?

헉헉대는 한국과 한국 경제와 끓는 냄비속의 개구리 같은 세계 경제를 구하는 것이 사홍서원 실천하는 것 보다 훨씬 쉬운 것이라는 사실을 필자가 안지는 약 3년 전 일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푸는 것은 부처님의 지혜를 배우는 우리들뿐이라는 것도 안지는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 동안 졸고를 읽어주신 독자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독자님들이 행복하고 풍족하고 부유한 100세를 맞이하시기를 바라고 제 자신과 가족에게도 바랄뿐입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