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으로 인생아픔 치유, 남 위한 ‘큰 우산’ 발원

▲ 가수 우순실.  <사진=이강식 기자>

모진 칼바람을 피해 몸을 움츠리고 때를 기다리고 있던 식물들이 하나 둘씩 깨어나는 봄이 성큼 다가왔다. 겨우내 추위로 메말랐던 사랑의 감정은 봄 햇살을 타고 사르르 흘러내린다. 누구에게나 우산이 돼 주었던 그리움과의 재회를 꿈꿔 보지만, 재회의 인연은 그리 쉽지 않다. 그래도 35년 간 우리에게 옛 추억이 되어준 사람이 있어 위안을 삼는다. 1982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잃어버린 우산’으로 동상을 수상한 가수 우순실 씨.

그의 집 초인종을 누르니 화려한 모습의 연예인이 아닌 중학생 남자아이를 키우는 워킹 맘 ‘우순실’이 반긴다.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의 집 거실 한 켠에는 막내아들의 애장품인 피규어가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아들과 함께 조립한다는 그는 “그저 가볍게 여겼던 모든 것들이 특별하고 귀중한 존재”라며 아들의 애장품을 소개했다. 얼굴엔 아들에 대한 애정 어린 미소가 번진다. 이런 애정은 아마도 먼저 떠나보낸 큰 아들에 대한 애틋함 때문인 것 같다.

딸 부잣집 막내딸의 꿈

경기도 안양 외곽 마을, 딸 부잣집으로 소문난 사진관에 다섯 번째 막내딸이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막내딸이 자신의 얼굴을 익히기도 전에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죽음은 양반집 규수였던 어머니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놨다. 집에서 살림만 하던 어머니가 딸 다섯을 키우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장사뿐. 어머니는 성냥을 가득 담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장사를 다녔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안양 중앙시장에 포목점을 차렸다. 무명과 베를 팔아 홀로 다섯 아이를 키워냈다. 어머니의 정성 덕분에 막내딸 우순실은 7080세대를 대표하는 가수가 됐다.

그의 어머니는 올해로 92세가 됐다.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성냥을 팔았던 어머니를 떠올리던 그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자식에겐 늘 부족한 부모인 것 같아서 항상 미안해요. 우리 엄마도 이 마음으로 사셨겠죠. 가끔 엄마의 빈자리를 상상하면 벌써부터 눈앞이 막막해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순실은 옹알이를 할 때부터 동네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이미자 씨의 ‘동백아가씨’와 ‘섬마을 선생님’을 곧잘 흥얼거렸다고 한다. ‘말보다 노래를 먼저 배웠다’는 큰언니의 말처럼 가수로서의 기질이 다분했다. 동네 우물가에 물을 기르러 갈 때면 어른들은 ‘노래 한 곡하면 물을 길어줄게’라며 노래를 청할 정도로 그의 존재감은 이미 유명가수이자 동네의 자랑이었다.

중학교 시절 영어시간엔 “한 단원이 끝날 때마다 팝송을 부르라”는 선생님의 요청에 한글 발음으로 가사를 적어 부르기도 했고, 고등학교 교련시간엔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 불려나와 혜은이 씨의 ‘제3한강교’를 부르곤 했다. 서정적인 발라드부터 흥겨운 트로트까지 다양한 장르를 섭렵할 정도로 끼가 넘쳤던 그. 지금도 대중의 마음을 좌지우지하는 그만의 절절한 감정 선은 가정형편상 외롭게 지내야 했던 유년시절에 기인한다.

그는 유년시절부터 항상 혼자 집을 지켰다. 어머니는 집안의 유일한 가장이었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들은 각자의 직장과 학교생활로 바빴기 때문이다. 당시 외로웠던 그를 달래준 유일한 의지처는 노래였다. 하교 후 집으로 돌아온 그를 반기는 건 언제나 TV와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뿐이었다. BGM(Background Music)을 틀어 놓고 국어 교과서에 실린 시를 낭독하기도 하고, 시나리오 대본을 보며 1인 다역의 열연을 펼치기도 했다는 우순실 씨는 “혼자 집을 지키는 일이 외로워서 했던 놀이들이 모두 가수의 씨앗을 틔우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잃어버린 우산’의 고군분투기

인생살이가 편할 수만은 없다. 모진 세월의 풍파를 겪고, 이를 극복했을 때 행복의 향기는 진하다. 그의 인생도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19살 때, 노래가 좋아 막연하게 가수의 꿈을 키웠지만 대학이라는 더 넒은 세상에서 정식으로 노래를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대학에서는 노래를 배울 수도, 가르치는 곳도 없었기에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배웠던 피아노를 살려 한양대 작곡과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생활 시작부터 유명세를 탔다. 입학 후 올림픽체육관에서 열린 신입생 환영회에서 ‘한 오백년’을 불러 이목을 끌었다. 갓 20살 여대생이 한 오백년이라니, 한국의 ‘한(恨’)이 고스란히 녹아든 곡을 부른 그의 선택은 어쩌면 자신의 화려한 데뷔를 예지한 것은 아니었을까?

교수들과 학생들은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임아’로 시작하는 노랫말을 절절하게 표현한 그의 구성진 가창력에 찬사를 보냈다. 그때 만난 인연이 ‘잃어버린 우산’의 작곡가 오주연이다. 같은 과 동기인 오주연은 “너 진짜 노래 잘한다. 우리 대학가요제 나가볼래?”라며 제안을 했고, 그때부터 새내기 두 소녀의 대학가요제 출전기가 시작됐다.

대학교 2학년이 되던 해,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1982년 MBC 대학가요제의 본선무대에 설 기회가 생겼다. 걱정할 일이라곤 공연을 준비하는 일 뿐, 그러나 일은 다른 곳에서 터졌다. 대학가요제 본선을 코앞에 남겨두고 맹연습을 해도 모자랄 시간에 그는 매일 교수들을 설득하기 위해 캠퍼스를 헤매야 했다. 작곡과 학생이 클래식이 아닌 대중가요로 방송에 나가겠다고 하니 교수들은 ‘대학가요제를 나가고 싶으면 학교를 자퇴해라’는 엄포를 놓기도 하고 ‘졸업 후에 얼마든지 꿈을 펼칠 기회가 있다’는 설득도 해왔다. 교수들의 뜻은 매우 완강했다. 당시 대학가요제 담당 PD가 찾아와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명문대에 입학해 항상 자랑거리였던 막내딸의 퇴학소식은 어머니에겐 큰 근심이 되었을 것이다. 평소 부드러운 성품으로 고집 한 번 부리지 않고 자란 딸의 집념에 어머니는 “너는 끼가 없어서 가수는 안 어울린다”며 반대표를 던졌다. 그 시절 어른들은 딸자식의 얼굴이 전국으로 방영되는 것을 낯 뜨거운 일로 여겼을 테고, 퇴학이라는 소식에 또 한 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반대의 압박이 심해질수록 가수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절실해졌고, 결국 학교를 그만둘 각오로 무대에 올라 동상의 영예를 안았다.

하얀 스커트에 핑크색 블라우스를 걸친 풋풋한 여대생은 실연한 사람의 애절한 감정을 여실히 보여줘 뭇 여성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그해 그에겐 ‘혜성같이 나타난 디바’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0살.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출전한 무대였기에 학교의 반응이 어땠냐는 질문에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학교에 들어서니 ‘고작 동상 받으려고 그 난리를 쳤냐’는 소리를 들었다”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결국 그는 대학가요제에 나갔다는 이유로 제적 통보를 받았다. 그렇게 2년 간의 한양대 작곡과 생활을 접고 추계예술학교(현재 추계예술대학교) 국악과에 편입했다. 서양음계인 화성학을 배우던 학생의 국악과 편입은 어머니도 이해할 수 없는 별난 선택이었다. 당시 인지도가 없는 학교로 편입해 핀잔을 받았다는 그는 “국악을 배우게 된 건 저의 음악활동에 있어 전화위복이 됐죠. 편입의 확신을 준 건 국악과 학생의 청아한 목소리와 음색이었어요. 지금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동요됐죠”라고 회고했다.

 불교, 새로운 인생의 원동력

그는 1982년 대학가요제 이후로 대표곡 ‘잊혀지지 않아요’, ‘꼬깃 꼬깃해진 편지’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가수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데뷔 9년차가 되는 해, 두 살 연하인 남자의 따뜻한 마음 씀씀이에 반해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결혼 후 그는 공식적인 활동은 차츰 정리했지만 틈틈이 CM송을 부르거나 가수들의 코러스 작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너무 행복한 결혼생활 탓에 이마저도 중단했다. 누가 그랬던가, 너무 행복하면 하늘이 시기한다고.

신혼의 단꿈에 흠뻑 젖어 있을 쯤, 존재자체가 기쁨이었던 첫째 아들이 뇌수종을 갖고 태어났다. 2005년 아들이 태어 난지 13년 되는 해에 아들과의 짧은 인연이 끝났다. 큰 아들의 죽음이 잊혀 지기도 전에 찾아온 남편의 사업 실패와 경제적인 압박, 결국 영원한 동반자라 생각했던 남편과 남이 되었고 여자의 몸으로 29억이라는 큰 빚을 안게 되었다.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티 없이 맑은 현재의 얼굴에선 전혀 찾아보기 힘든 암울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노래가 좋아 무대에 올랐던 가수의 공연은 빚을 갚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됐다. 이런 상황은 싱어송라이터 수식어가 붙었던 그의 자존감을 무너뜨렸다. 3살짜리 막내아들을 데리고 다니며 공연을 해야 했던 생계형 가수의 삶을 수년간 견뎌야 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그의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지인이 명상과 기체조를 권유했다. 속는 셈치고 시작한 명상과 기체조는 몸과 마음에 희망이라는 에너지를 불어 넣어 줬고, 그는 자신감을 조금씩 회복해 나갔다. 기체조를 통해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는 그는 “당시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죠. 정말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아픔을 통해서 삶의 진정한 의미는 작은 행복에서 시작한다는 작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어요. 이젠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불교, 그가 새롭게 살고 있는 제2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원동력이다. 과거 아픈 아들을 위해 교회를 열심히 다녔던 그는 2008년 아는 지인의 손에 이끌려 양평 용문사를 찾게 됐다. 그 곳에서 주지스님을 만나면서 불자로서의 삶을 살게 됐다. 스님의 부탁으로 시작한 산사음악회는 전국 각지 사찰에서 공연하는 행보로 이어졌고, 불자 가수로서 다양한 재능기부 활동을 펼치는 와중에 좋은벗 풍경소리 이종만 실장을 만났다.

이 실장과의 인연은 ‘연등회의 노래 9’ 앨범제작으로 이어졌다. 그의 30여 년의 가수 공력이 어김없이 녹아든 곡 ‘벗이어 오라’, 2014년 4월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예정됐던 연등회 회향한마당 공연은 세월호 침몰 사고로 취소돼 아쉬움을 남겼고, 2015년은 ‘광복 70주년 기념’행사 일정으로 또 한 번 그의 노래를 듣지 못했다. 드디어 올 5월 7일에 열릴 연등회 회향한마당에서 흥겨운 축제에 활력을 불러 넣어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듯하다. 환희 가득한 그의 무대가 기대된다. 불자 가수라는 호칭이 아직은 쑥스럽다는 그는 “불교를 통해 좁았던 저의 생각의 폭이 넓어졌고 모든 존재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어요. 부처님이 세운 ‘중생구제’의 원력이 얼마나 깊고 무한한지 깨달았죠. 부처님의 말씀처럼 소중하지 않는 존재는 없습니다. 작은 인연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 나를 필요로 하는 무대가 있다면 언제 어디든 노래하며 살고 싶어요”라고 바람을 전했다.

노래로 보리심 구현

매주 일요일 오후 9시, 백운호수에 위치한 라이브 카페에는 7080세대 대표 가수 우순실의 노래가 그리워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그 분들을 위해 공연을 해온지 벌써 10년차가 됐다는 그, 동행했던 3살짜리 아들이 벌써 중학생이 됐으니 공무원 생활을 하는 것 같다고 한다.

‘공연에는 차등이 없다’는 소신을 갖고 있는 우순실 씨. 자신의 노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무대가 없는 요양병원과 복지관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픈 어르신들과 몸이 불편한 이들의 코앞에서 노래를 할 때면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쁨과 행복감이 그의 삶을 이끌어 주는 가장 큰 힘이라고.

언제나 나와 남을 사랑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그는 음악계도 두루 살피고자 ‘한국음악발전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발전소는 음악인이란 길을 다져준 원로 음악인들과 앞으로 그 길을 걸어오게 될 후배들을 위해 가수 최백호 씨를 중심으로 몇 명의 가수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다. 그에게 최근 진행 사업을 묻자, 아이처럼 들뜬 표정으로 “관공서와 맺은 업무협약으로 앞으로 더 많은 인디밴드들에게 녹음실과 음반제작을 지원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진정한 삶의 의미는 작은 행복에서 시작한다’고 말하는 우순실 씨. 아팠던 세월이 있었기에 대중들에게 더 좋은 노래와 무대를 선사할 수 있음을 믿고, 지난 날 모든 기쁨과 아픔들은 지금에 그를 있게 한 필연이자 자연스러운 인연의 흐름이라고 한다. 35년 전 ‘잃어버린 우산’으로 대학가요제 무대에 올랐던 겁 없던 소녀들이 올해 뜻을 모아 53년   동안 그들이 살아온 진짜 인생 이야기를 노래에 담는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노래로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꿈인 ‘불자 우순실’. 그의 우산이 세상 온갖 불행을 맞아주는 행복의 우산으로 발현되길 기원한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