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년 백제 스러지던 날
황금빛 용봉은 땅 속에 숨어들고
서기 660년 6월. 계백의 5,000 결사대는 신라군에 맞서 잘 버텨냈지만 결국 황산벌에서 전멸하고 만다. 이어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13만 대군과 신라의 5만 군사가 연합해 사비성으로 밀어닥쳤다. 의자왕은 사비성을 탈출했고, 귀족들은 달아났다. 성에 남아 있던 차남 태가 왕위에 올라 항전했지만 결국 항복을 하고 만다.
당나라 군대가 사비성을 함락하던 그때, 백마강 건너 능산리 왕릉 일대에도 군사들이 들이닥쳤다. 특히 당나라 군사들은 보물을 약탈하기 위해 한쪽에서는 궁궐을, 다른 한쪽에서는 사찰로 내달렸다.
백제 백성들은 나당연합군을 피해 쫓기다가 칼에 맞아 쓰러졌고, 백마강에 몸을 던져 죽음을 맞았다. 그 처참한 모습은 강 건너 능사에서도 보였다. 절에 있던 대중들도 도망치기에 바빴다. 긴박했던 그 순간, 성왕의 제사를 담당하던 한 스님이 서둘러 법당으로 달려갔다. 법당에는 불상을 비롯해 진귀한 유물들이 많았지만, 그는 주저 없이 향로를 집어 들었다. 향로를 옻으로 된 그릇에 넣고, 다시 비단으로 감싼 다음 밖으로 달려 나왔다.
스님은 서둘러 절에서 필요한 물품을 만드는 공방으로 달려갔다. 공방 앞에는 나무로 만든 수조가 있었다. 스님은 옆에 뒹구는 기와조각으로 수조 바닥을 팠다. 물이 고여 있던 바닥이어서 진흙땅은 잘 파졌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백성들의 비명 소리와 당나라 군사들의 고함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스님은 비단에 싼 향로를 땅에 묻었다. 혹시나 향로가 손상될까봐 그 위에 기와조각을 덮었다. 다시 흙을 덮고는 수조에 물을 채웠다. 고개를 들자 저만치서 칼을 뽑아든 당나라 군사가 달려오고 있었다.
1300여 년 전 백제가 패망하던 날, ‘백제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 국보 제287호)가 땅에 묻히던 상황을 자료를 토대로 그려봤다. 백제는 사비성 밖에 왕릉을 조성했다. 향로가 발굴된 사찰은 도성과 왕릉의 중간 지점이다. 발굴 후 국립부여박물관은 이 절이 왕릉을 관리하고, 세상을 떠난 왕들의 복을 비는 제사를 주관했을 것으로 짐작된다며 ‘능사(陵寺)’라고 이름을 붙였다. 능사는 남북이 90m, 동서가 80m 규모의 사찰이다.
능사에서 발굴된 향로는 백제의 수준 높은 금속공예기술과 눈부신 예술적 역량을 보여주는 우리 고대문화의 결정체다. 학계에서는 중국 박산향로를 기원으로 하면서도 백제의 독창성이 물씬 담겨진 걸작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농부의 제보와 발굴
금동대향로가 발굴된 곳은 부여 능산리 고분군(사적 14호) 인근이다. 1993년 국립부여박물관이 절터에 속한 공방지(工房址)에서 금·금동·유리 등 다양한 재질의 유물과 함께 출토했다. 2년 뒤 이 절터 목탑지에서 창왕명사리감(국보 제288호)이 출토되는데, 이 사리감으로 인해 향로의 출토지가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 재위(554∼598) 때 세워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두 유물은 이보다 10여 년 앞서 발굴될 수도 있었다. 1981년 이곳은 계단식 논이었다. 당시 농사를 짓던 농부가 연꽃이 그려진 와당을 주웠다며 국립부여박물관에 신고했다. 2년 뒤에는 농사를 짓는데 지하에 커다란 석재가 묻혀 있더라는 제보도 있었다. 이런 제보가 본격적인 발굴로 이어지진 않았다.
능산리 절터의 발굴은 능산리 고분군을 찾는 방문객을 위한 주차장 건설이 계기가 됐다. 주차장 공사에 앞서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를 유적을 확인하기 위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92년 시굴조사에서 건물터와 불탄 흔적, 금속유물 조각들이 나와 금속제품을 만드는 공방이 있던 자리로 추정됐는데, 몇 차례 걸쳐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금동대향로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만약 시굴조사를 근거로 주차장 공사를 강행했다면 금동대향로는 포클레인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발굴 당시 향로는 녹이 슨 흔적조차 없었다. 청동도 세월이 흐르면 부식된다. 하지만, 그 긴 세월동안 진흙 속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부식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학계는 농부들의 제보로 이곳이 능산리 고분군과 관련된 절터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만 하고 있었다. 중국 병마용이 우물을 파던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것처럼 능사의 터도 농부의 제보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세계 최대, 최고의 걸작
향로는 사찰에서 향을 피워놓는 도구다. 동양의 인도, 중국 등 여러 나라에서는 종교의식, 개인적 수양, 냄새 제거를 목적으로 향을 피웠다. 금동대향로는 이름대로 청동으로 주조해 그 위에 금을 도금했다. 높이가 61.8cm, 무게는 11.85kg이다. 동양 최대 규모. 향로에 등장하는 동물과 문양에 대해서는 해석이 다양한데, 먼저 소장하고 있는 국립부여박물관의 견해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향로는 뚜껑과 몸체, 받침이 별도로 주조돼 있다. 아래로부터 수중생물 즉, 음(陰)의 대표격인 용을 받침으로 해 그 위 몸체에는 연꽃을 중심으로 물과 관련된 동물을 연꽃잎에 배치했다. 뚜껑에는 산과 나무 외에 지상의 동물과 인물상 등이 등장하고, 정상에는 양(陽)을 대표하는 봉황을 두고 있어 음양의 사상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이런 구성은 천제(天帝, 봉황)와 오제(五帝, 다섯 마리의 새)가 주재하는 소우주의 신산(神山)으로, 용이 승선(昇仙)을 연결시켜 준다는 한나라 때 유적지인 마왕퇴 1호분의 승선도나 박산향로에 보이는 사상적 전통과도 관련이 있다.”
박물관 측은 덧붙여 한 대 이후 오랜 시차를 두고 백제에 출현함에 따라 백제적 요소가 더욱 가미됐고, 도교와 불교적 요소가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사례로 무령왕릉 출토 동탁은잔과 왕비 베개, 능산리 동하총 벽화, 부여 외리 출토 무늬벽돌 등을 제시하고 있다.
봉황인가, 극락조인가, 천계인가
학계의 의견을 반영한 국립부여박물관의 견해와 다른 주장은 크게 두 가지다. 그 핵심은 향로 가장 위에 있는 봉황의 진위다. 사재동 충남대 명예교수는 봉황이 아니라 극락조라고 주장한다. 또 중국 불교고고학자 원위청(溫玉成) 용문석굴연구소 명예소장은 이 새를 중국 고문헌에 등장하는 천계(天鷄)라고 주장한다.
사재동 명예교수는 이 향로에 대해 불교의 핵심적 상징인 반용이 물어 올린 연화의 대좌 위에 불교의 총체적 이상세계인 극락정토 연화장세계를 찬연하게 조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수 학자들이 주장하는 음양오행과 도교적 영향을 받았거나 도교와 불교의 습합이란 주장에 대해 연화장세계는 도교, 무속, 음양오행사상 등 삼라만상을 포괄하고 있으므로 백제 불교에 융합, 동화되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능사를 창건한 위덕왕과 아버지 성왕 모두 불심이 대단했던 만큼 성왕을 기리며 조성한 향로의 제작에는 당대 고승대덕과 불교공예가 참여했을 것이고, 이전 백제의 향로는 물론 중국의 향로까지 참고했을 뿐이란 것이다.
원위청 명예소장은 봉황이 아니라 천계라고 주장하는 학자다. 봉황의 특징은 머리 위에 두 가닥의 깃털이 있고, 꼬리 부분에 아름다운 꼬리 깃털이 있어야 하는데, 금동대향로의 경우에는 닭벼슬과 긴 꼬리가 두드러져 한 마리의 수탉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참고로 천계는 세상의 닭 중에서 왕으로 불리는 상상의 동물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소리를 신호 삼아 세상의 닭들이 차례대로 시간을 알리는 울음소리를 냈다고 한다.
원 소장은 금동대향로의 천계에서 나타나는 긴 꼬리는 백제 특산인 ‘꼬리 긴 닭(長尾鷄)’에서 유래됐다고 주장하면서 천계와 천계의 부리 아래 둥근 알, 발로 움켜쥔 타원형 알을 모두 백제의 건국과 연결시킨다. 백제를 세운 온조왕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주몽)의 셋째 아들이다. 전설에 따르면 온조왕의 할머니가 되는 유화는 ‘크기가 닭과 같은 어떤 기운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아기를 잉태했다거나 ‘햇볕이 따라다니며 비추어’ 임신을 한다. 그 후 다섯 되 크기의 알(훗날 동명왕)을 낳는다. 향로의 두 알 중 발아래 타원형 알이 동명왕을 의미하고, 부리 아래의 둥근 알을 ‘천란(天卵)’이라고 해석한다. 즉, 천계와 두 알은 백제 왕조의 뿌리를 의미한다는 게 그의 견해다.
향로 꼭대기의 새가 봉황인지, 극락조인지, 천계인지는 해석이 분분하지만, 알을 백제 왕조와 연결시킨 부분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덧붙여 천계의 아래 다섯 방향에 한 마리씩 있는 작은 천계를 백제 전역을 나눈 5방(方)으로 해석하고, 향로 상반부에 겹쳐져 있는 산을 ‘봉래산’이나 ‘도삭산’이 아닌 백제가 개국한 ‘금마산(金馬山)’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머리를 돌려 활을 쏘는 사람이 명궁으로 알려진 동명왕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가설도 제기하고 있다.
나당연합과 김춘추의 원한
금동대향로가 땅에 파묻히면서 백제의 700년 역사는 막을 내린다. 주제에서는 벗어나지만 신라는 왜 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를 멸망시켰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통일에 대한 여망도 있었겠지만, 의자왕에 대한 김춘추의 원한도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기 641년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즉위 후 단기간에 권력 기반을 다진다. 그는 이듬해 신라를 상대로 연이어 승전보를 올린다. 642년 8월 의자왕은 장군 윤충에게 군사 1만 명을 줘 신라 대야성을 치게 한다. 대야성의 성주 품석은 결국 처자식을 데리고 나와 항복을 한다. 하지만 윤충은 그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 사비성으로 보낸다. 의자왕은 말 20필과 곡식 1000석을 주어 윤충의 공로를 치하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백제 멸망의 한 가지 단초가 된다.
대야성의 성주 품석은 김춘추의 사위다. 즉, 항복을 하며 무릎을 꿇었다가 참수를 당한 아내가 김춘추의 딸이 되는 셈이다. 김춘추는 첫 부인과의 사이에 고타소(古陀炤)라는 딸을 두었는데, 몹시 귀여워했다고 전한다. 그런 딸이 죽은 것이다. 〈삼국사기〉 ‘선덕여왕 11년조’는 딸의 죽음을 전해들은 김춘추가 충격을 받아 기둥에 기대어 온종일 눈도 깜빡이지 않고 눈앞에 사람이 지나가도 모를 지경이었다고 전한다. 이 일을 계기로 김춘추는 복수의 화신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 이후 왜국과 당나라로 청병을 하기 위해 동분서주 했다.
딸 고타소가 죽은 지 6년 후인 648년 드디어 김춘추는 당 태종과 만나 나당연합군 결성을 허락받는다. 그리고 654년 5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백제, 아니 의자왕을 향한 원한의 칼을 뽑아든 것이다.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7년조’에는 “의자의 아들 융이 대좌평 천복 등을 거느리고 나와 항복하니 후일 문무왕이 되는 법민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침을 뱉으며 말하길 전에 네 아비(의자왕)가 내 누나(고타소)를 무참히 죽여 옥중에 묻어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심장이 떨리고 머리를 아프게 했다. 오늘 너의 목숨이 내 손아귀에 달렸구나”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복동생 법민의 원한을 통해 김춘추의 원한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앞서 의자왕에게는 41명의 왕자가 있었다고 서술한 바 있다. 그 중 한 왕자가 서기 660년 백제 멸망직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미야자키 현 남향촌에 유민들과 함께 자리를 잡고 백제마을을 만들었다. 마을 사람들도 신사에 백제왕을 상징하는 신체(神體)를 모셔두고 이를 신성시했다고 한다. 그렇게 1300년이 흐른 1993년 10월 26일. 남향촌 사람들은 보자기에 신체를 모시고 망명한 백제 왕자의 고국이자 선대왕들의 무덤인 부여 능산리 고분을 찾았다. 1330년 만의 귀향이었다. 이들은 능산리 고분에서 선대왕들을 위한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바로 그날, 인근에서는 능산리 절터를 발굴하는 개토제가 열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 달 보름이 지난 12월 12일 선대왕들을 위해 향을 사르던 금동대향로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드라마틱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