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유적 간직한 백제부흥군 최후 격전지

▲ ◇우금산성은 백제부흥군이 나당연합군과 일전을 벌였던 역사현장이다. 우금암 옆 우금산성.<부안군청 제공>

서해안에는 산과 바다를 모두 탐방할 수 있는 변산반도국립공원이 있습니다. 전북 부안에 위치한 국립공원은 불연(佛緣)이 깊은 곳입니다. 절벽 아래의 부사의방(不思議房)에서 신라의 진표율사가 3년 동안 수행한 뒤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을 친견한 능가산 의상봉도 변산반도국립공원 내에 있죠. 그리고 능가산 아래의 내소사,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개암사 등 많은 불교유적과 문화재가 즐비합니다.

근래에는 변산반도국립공원 내에 둘레길인 마실길이 열려 지역민들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고 합니다. 부안군은 삼한시대에는 마한(馬韓) 54개국 중 지반국(支半國)이었다가 백제에 속하게 됩니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신라에 복속됩니다. 부안에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산성이 여럿 있지요. 그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우금산성을 찾아 떠나봅니다.

우금산성의 정확한 축조연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여러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자웅을 겨루던 시기인 삼국시대에 축조됐습니다. 둘레는 3,960m, 면적은 198,875㎡(약 6만 265평)라고 합니다. 산 전체를 두르고 있어 어느 코스에서 올라도 산성의 일부를 볼 수 있습니다만, 천 년 고찰 개암사(開巖寺)에서 시작되는 우금암코스를 추천합니다. 개암사 뒷산을 빙 두르고 있는 산성이기 때문이지요.

개암사를 먼저 참배하고 우금산성에 올라도 좋고, 산성을 본 뒤에 편안한 마음으로 사찰을 둘러보아도 좋습니다. 개암사를 바라보면 쪼개진 듯한 커다란 바위가 눈에 띕니다. 우금암(울금바위)입니다. 이 우금암까지 올라야 우금산성을 볼 수 있습니다. 우금암을 정면에 두고 개암사 오른편으로 난 마실길을 따라 오르면 개암사 차밭이 탐방객을 반깁니다.

겨울에도 푸른 찻잎을 보며 눈을 맑힌 뒤, 숨을 고르고 산길로 향합니다. 평지를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돌계단과 흙길을 번갈아 오르다보면 숨이 차올라 잠시 쉬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30여 분을 오르면 개암사에서 봤던 우금암에 이릅니다.

우금암 오른쪽은 낙석 위험 때문에 변산반도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요. 우금산성에 가려면 우금암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야 합니다. 샛길을 따라가면 우금암 아래쪽에 커다란 굴 두 개를 볼 수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34 ‘산천(山川)’조에는 이 우금암에 대해 ‘우진암(禹陳巖), 변산 꼭대기에 있다. 바위가 둥글면서 높고 크며 멀리서 보면 눈빛이다. 바위 밑에 3개의 굴이 있는데, 굴마다 스님이 살고 있으며, 바위 위는 평탄해 올라가 바라볼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중 하나는 원효 스님이 수행하던 곳이라고 전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부안현 불우조’에는 “원효방(元曉房), 신라 때 중 원효(元曉)가 거처하던 곳인데, 방장(方丈, 사찰 주지스님이 거처하는 방)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 우금암을 뒤로 돌아가야 우금산성이 나옵니다. 산길을 걷다가 주위를 살펴보면 곳곳에 흰색 돌이 무더기를 이루며 흩어져 있습니다. 우금산성은 1974년 9월 24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됐습니다. 현재 산성에는 수구(水口) 등 시설과 석축이 비교적 잘 남아 있습니다. 성벽은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해 쌓았다고 합니다. 산성 내에는 묘암사지, 정관암지, 칠성암지 등 사찰 터와 건물지, 남장대지와 북장대지, 암문지, 남문지, 서문지, 동문지, 북문지 등의 터가 남아 있습니다.

부안군과 전주대학교박물관이 우금산성을 발굴한 뒤 발표한 〈부안 우금산성내 건물지 발굴조사 보고서(扶安 禹金山城內 建物址 發掘調査 報告書)〉에 따르면 발굴 당시 건물대지 주변에는 백제시대부터 근세에 이르는 기와편, 토기편 등이 뒤섞여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제시대의 삼족토기편,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당초무늬 암막새, 청자, 분청사기 등도 발굴돼 백제 시대 때부터 산성 내에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묘암(妙岩)’ 명문 기와가 출토돼 묘암사의 존재를 확인하게 됐다고 합니다.

옛 백제의 영광을 되살리려던 백제부흥군이 나당 연합군에 맞서 격전을 벌였던 우금산성의 흔적인 것이지요. 이 우금산성에 대한 기록은 각종 문헌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大東地志) ‘성지’조에 ‘우금성(禹金城), 우금암(禹金巖) 기슭에 있다. 둘레는 10리(4㎞)인데, 묘향사(妙香寺)가 그 안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죠.

또 다른 기록에는 삼한말기에 위만에게 패한 준왕이 전라북도 금마(金馬, 현 익산)에 도읍을 정하고 그 해 세상을 떠났고, 마한의 효왕(孝王) 28년(기원전 86년)에 개암동으로 와서 부하인 우(禹)장군과 진(陣)장군에게 산성을 쌓게 하고, 이를 우진산성(禹陣山城)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산성 계곡에 왕궁(王宮)을 짓게 하고, 동쪽은 묘암사(妙岩寺), 서쪽은 개암사(開岩寺)라고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명문장가 이규보의 시에 ‘위금산성(位金山城)’이라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문헌비고〉에는 ‘우진(禹陳)이라는 고성은 삼한시대에 우(禹)·진(陳) 두 장군이 성을 쌓고 주둔하였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백제 의자왕은 660년 나당 연합군에 항복합니다. 수도함락 직후 흑치상지 등은 임존성(任存城, 현재 예산 대흥)을 거점으로 3만 명의 병력을 수습해 당군을 격퇴, 200여 성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복신(福信), 도침(道琛) 스님 등은 주류성을 주 무대로 백제유민을 규합해 백제부흥을 도모합니다.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하고 있을 때 의자왕의 종형제인 왕족 복신(福信)과 도침(道琛) 스님은 왜에 가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扶餘豊)의 귀국을 도와 주류성을 근거지로 삼아 군사를 모으고 나당연합군에 대한 공격을 전개합니다.

662년 왕에 추대된 부여풍은 일본에서 원병을 거느리고 귀국, 나당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하지만 백제부흥군 지도층의 내분이 일어납니다. 복신은 도침 스님을 살해한 뒤, 휘하 군사를 대부분 장악해 부여풍마저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부여풍에게 살해당하고 맙니다. 이때 신라의 김유신 장군과 당나라의 소정방이 이끄는 나당연합군은 백제부흥군을 공격하게 되고, 결국 백제부흥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개암사 ‘법당중창기문’에 따르면 백제 멸망 직후 개암사를 창건한 묘련 스님의 제자 도침(道琛) 스님이 무왕의 조카 복신(福信)과 함께 이 지역에서 백제부흥운동을 펼쳤습니다. 개암사는 원효방(元曉房)의 본사로서 백제부흥운동 당시 구심축을 이룬 장소였습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개암사는 백제 멸망의 현장을 지켜본 역사의 산 증인이 되겠네요.

이같은 아픔을 지켜본 곳은 개암사 뿐만은 아니겠지요. 앞에서 언급했던 내소사와 부사의방 등 고승들이 주석했던 사찰들에서는 백제 부흥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백제유민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염불소리가 끊이지 않았겠지요.

〈동국여지승람〉에는 진표율사가 주석한 부사의방에 대해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 신라 때 진표(眞表) 스님이 살던 곳인데, 100 척 높이의 나무 사다리가 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면 방장(方丈)에 이를 수 있고, 그 아래는 모두 무시무시한 골짜기다. 쇠줄로 그 집을 잡아 당겨서 바위에 못질하였는데, 세상에서는 바다의 용이 만든 것이라 한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몇 해 전 이 부사의방을 취재하러 간 적이 있었는데, 기록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몇 시간을 헤맨 끝에 찾아낸 부사의방은 천 길 낭떠러지 위의 작은 공간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행했을 진표율사를 떠올리니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부안에는 우금산성 외에도 백제부흥을 항전했던 산성이 또 하나 있습니다. 개암사에서 20㎞ 가량 떨어진 백산면 용계리에 있는 사적 제409호 백산성(白山城)입니다. 백산성은 테뫼식(산 윗부분을 테를 두른 것처럼 쌓은) 토성이며, 주변이 낮아 우뚝 솟은 것처럼 보이지만, 해발 47.4m의 낮은 산성입니다.

이 산성은 부여풍이 일본에서 구원군을 이끌고 올 때 맞이한 곳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663년 나당연합군에 맞서 백강구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고 맙니다. 백산성이 무너지자 나당연합군은 곧장 주류성으로 진격했고, 백제유민들은 고구려와 일본으로 망명길에 올랐다고 합니다. 특히 백산성은 조선 고종 31년(1894년) 3월 동학농민군이 집결해 전열을 재정비하고, 혁명의 불길을 당긴 우리나라 근대사의 흐름에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라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의미 있는 역사의 현장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큰 의미를 지닌 유적지라고 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저 국가에서 정한 유적지일 뿐입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항일의 상징인 3ㆍ1절이 지났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바로 보고, 되새겨 보는 역사의 현장에 가 보시길 권합니다.

▲ 우금산성 항공사진.<부안군청 제공>
▲ 우금산성 내건물지.
▲ 백산성 정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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