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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로 배우는 불교 4. 아미타삼존내영도
  • 이승희 홍익대학교 불교미술사 박사
  • 승인 2016.03.07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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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묘관수행 통해 아미타불 극락 인도 깨달아

   
▲ ‘아미타삼존내영도’, 고려 14세기, 견본채색110.0×51.0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아미타삼존불이 내영한 순간을 극적으로 묘사한 고려후기의 유일한 작품이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아미타삼존내영도’다(그림). 아미타불의 육계주에서 나온 빛은 화면의 오른쪽 아래에 왕생자를 비추고, 본존보다 약간 앞에 나와 있는 관음보살은 연화대좌를 앞으로 내밀 듯 허리를 굽혀 왕생자를 대좌 위에 태우려 하고 있다. 아미타불의 오른편에 자리한 지장보살은 삭발한 스님인 성문의 모습으로 무명(無明)을 깨치려는 듯 밝은 빛을 내는 여의보주를 오른 손바닥에 올리고 왕생자를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다. 내영하는 공간에는 어떠한 경물(景物)도 표현하지 않고 어둡게 처리하여 내영의 순간만을 깊이 각인시키고 있다. 화면 하단의 붉은 색의 화기란에는 어떠한 글귀도 적혀있지 않아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불보살의 비례와 유려한 자세, 주(朱)ㆍ녹청(綠靑)ㆍ군청색(群靑色)의 주조색을 올린 후 형상과 법의의 문양 등을 금니(金泥)로 섬세하게 마무리한 점 등에서 14세기 중반 경의 전형적인 불화양식이 감지된다.

 

지난 호에 같은 시기 조성된 일본의 ‘아미타내영도’를 살펴보았다. 고요하고 깊은 산속, 침잠된 어둠 속 작은 전각 안에 앉아 아미타불의 내영을 기다리는 왕생자 그리고 흰색을 주조로 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아미타불과 25보살. 구름의 머리는 왕생자를 향한 채 긴 꼬리는 하늘로 치켜 올라가 아미타성중이 빠른 속도로 내영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아미타불의 뒤에서는 큰 북을 울려 아미타불의 내영을 알려 극락왕생에 대한 기대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먼 타방에서 인간계로 임종인을 맞이하러 오는 내영의 순간을 역동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아미타삼존내영도’는 정적이고 고요하다. 극락왕생에 대한 기대와 같은 격한 감정을 느낄 수 없다. 아마도 가장 큰 원인은 타방세계에서 인간세상으로 아미타삼존을 옮겨주는 공간의 이동을 상징하는 구름이 표현되지 않아서 일 것이다. 또한 배경을 암시하는 어떠한 경물도 표현하지 않고 배경을 어둡게 처리한 점도 내적인 고요함을 느끼게 해주는 요소일 것이다.

14세기 동일한 시기에 조성된 고려와 일본의 ‘아미타내영도’가 이처럼 다르게 표현된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인들이 추구했던 정토왕생과 내영에 대한 인식은 어떠했을까?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임종에 이르러 원묘요세(圓妙了世, 1163~1245)와 그의 제자 천인(天因)이 나눈 문답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대사는 을사년(1245년) 여름 4월에 원문(院門)의 일을 우두머리 상좌 천인에게 부탁하고, 별원(別院)에 물러 나와 고요히 앉아 오로지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하기를 구하였다. ……천인이 묻기를 “임종할 때 정(定)에 든 마음이 곧 정토인데, 다시 어디로 가시렵니까?”하니, 요세가 대답하기를 “이 생각에 동함이 없다면 바로 이 자리에(정토가) 나타나는 것이니, 나는 가지 않아도 가는 것이요, 저들(아미타불과 보살들)은 오지 않아도 오는 것이다”하고, 말을 마치자 즉시 염불을 거두고 선정(禪定)에 든 것 같았다.”(최자(崔滋), 〈동문선(東文選)〉 권117, 〈만덕산백련사원묘국사비명(萬德山白蓮社圓妙國師碑銘)〉)

요세가 말년에 별원(別院)에서 왕생을 구하며 염불하였던 임종행의(臨終行儀)를 기록한 위의 글에는 정토에 대한 그의 인식이 잘 드러난다. ‘정(定)에 든 마음이 곧 정토’라는 말은 수행을 통해 고요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면, 마음속에 있는 정토를 인식할 수 있다는 ‘유심정토관(唯心淨土觀)’을 피력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가지 않아도 가는 것이요, 저들은 오지 않아도 오는 것이다’라는 말은 아미타불의 내영을 마음속으로 감득(感得)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요세는 한때 지눌(知訥, 1158~1210)의 정혜결사에 몸담아 조계선(曺溪禪)을 닦기도 하였으나 결국 결별하고 강진을 무대로 백련결사운동을 일으켰다. 선종에서 추구하는 정토관이나 천태의 정토관은 ‘유심정토 자성미타(唯心淨土 自性彌陀)’로 동일하지만 정토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은 의견이 달랐다. 지눌은 정혜쌍수 돈오점수(定慧雙修 頓悟漸修)를 수행의 요체로 삼았다. 그러나 대중에게는 너무나 요원한 방법이었기에 원묘요세는 죄에 대한 참회와 염불ㆍ예불ㆍ〈법화경〉의 독송 등을 수행의 요체로 삼아 대중을 포섭했다.

대중을 기반으로 성장한 백련결사였지만, 원묘요세가 제시했던 정토관과 수행법은 오히려 원(元)간섭기 귀족사회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사건은 충렬왕이 왕실의 원당으로서 1284년에 천태사찰인 묘련사를 창건한 일이다. 사찰의 창건과 함께 촉발된 천태지의(天台智, 538~597)의 〈관무량수경소(觀無量壽經疏)〉에 대한 연구는 귀족사회에 아미타극락정토를 16관으로 나누어 관상하는 16묘관수행(16妙觀修行)을 확산시켰다. 16묘관수행은 선관수행(禪觀修行)과 유사하다. 청정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관상해 마음속에 정토를 느끼고 스스로 미타의 성정을 갖추고 있음을 깨닫는 수행법인 것이다.

16묘관수행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수행자는 아미타불이 마치 눈앞에 현신(現身)한 것과 같은 시각적인 환상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들에 대한 기록은 고려후기 전래된 천태승 종효(宗曉, 1151~1214)의 〈낙방문류(樂邦文流, 1200년)〉에서 볼 수 있다.

이승희 홍익대학교 불교미술사 박사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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