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의례와 결합해 신라-고려 전승
조선 민간서 명맥, 일제 이후 되살아나

▲ 2012년 부처님오신날 제등행진 당시 천태종 장엄등 행렬. <금강신문 자료사진>

연등(燃燈)은 등불을 밝히는 것이며, 연등회(燃燈會)는 불을 밝힘으로써 공동체의 바람을 기원하는 의식이다. 밝음과 풍요와 정화를 상징하는 불을 통해 벽사기복(邪祈福)하는 고래의 풍습과, 부처님께 등 공양을 올리며 스스로 무명에서 깨어나기를 다짐하는 불교적 의미가 만나 연등을 매개로한 전통축제로 전승되어왔다.

 

이러한 연등회의 의미는 고대로부터 이어져 고려시대에는 왕실에서 주도하는 국가의례로 체계화되었고, 조선시대와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사찰과 민간의 대표적인 불교축제로 이어졌다. 연등회를 설행한 시기는 정월보름(上元: 1.15), 이월보름(2.15), 사월초파일(4.8) 등으로 전개되다가 조선 후기부터 초파일로 일원화되었다.

현대로 접어들면서 연등회는 종교를 초월해 감동을 주는 전통축제이자 거리문화축제로 자리매김하게 되어 201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행하는 문화재로서 연등회뿐만 아니라 석가탄신일을 즈음하여 전국에서 펼쳐짐으로써 연등회의 가치는 더욱 증폭된다. 따라서 범국가적 축제였던 고려·조선시대의 연등회가 맥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국내는 물론 세계인의 주목과 사랑을 받고 있다.

연등과 연등회의 기원

의식이나 놀이로써 불을 밝히는 연등행위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보편적 상징성을 지녔으며, 특히 불교문화권에서 널리 성행되어왔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며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自燈明法燈明)”는 가르침을 남겼듯이, 등을 켜서 어둠을 밝히는 것은 무명을 밝히는 지혜를 상징한다. 따라서 연등은 세존 당시부터 중요한 공양의식으로 행해졌다.

이에 초기경전인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 연등공양의 공덕을 다루었고, 대승경전의 성립과 함께 연등공양은 육바라밀의 하나인 공덕바라밀을 실천하는 방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연등공덕만을 다룬 <불설시등공덕경(佛說施燈功德經)>이 성립되는가하면, <현우경(賢愚經)>에 실린 빈자일등(貧者一燈)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가난한 여인 난타가 부처님께 바친 초라한 연등 하나가 왕이 바친 수많은 화려한 연등이 비바람에 다 꺼진 후에도 밝게 빛나, 정성스러운 마음에서 우러난 연등의 공덕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께 올리는 일상공양으로서 연등이 중요한 불교행사가 있을 때 대규모의 축제적 연등회로 확대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고대 인도와 서역의 연등회 모습은 5세기 초 구법순례에 나선 중국 동진의 법현(法顯) 스님이 남긴 기록에서 살필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 인도에서는 석가탄신일 등이면 장엄하게 꾸민 거대한 행상(行像) 수레에 불상을 모시고 가두행렬을 하였다. 이때 왕과 백성들이 꽃과 향을 바치고 밤새 연등과 기악·연희로써 공양하였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정월보름에 등을 밝히는 옛 풍습이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자리 잡아 등절(燈節)이라 부르기 시작한 데는 불교의 영향이 크다. 사월초파일 무렵에 인도연등회의 영향을 받아 행한 행상공양의 기록이 6세기부터 등장하고, 7세기 전후에는 정월보름 연등이 활성화되어 대로에 등을 밝히고 축제를 즐겼다. 이때 등수(燈樹)라 하여 거대한 나무를 세워 가지마다 수백·수천 개의 등을 밝혔고, 이 모습이 부처님을 찬탄하는 돈황벽화에 그려져 있어 불교와 깊이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713년(당 현종 2)에는 당 현종이 호승(胡僧) 파타(婆)의 건의로 정월보름에 연등회를 열어, 3일간 통행금지를 풀고 성문을 개방하여 수만 개의 등불을 밝혔다. 이때 왕과 신하들이 근정루로 행차하여 관등(觀燈)하고 궁중연희와 가무 등을 즐겼다고 한다. 중국의 상원연등회는 불교와 도교가 결합된 양상으로 송대까지 이어졌다.

우리나라의 연등회도 이미 신라시대부터 설행되어, 경문왕 6년(866)과 진성여왕 4년(890)의 정월보름에 임금이 황룡사로 행차하여 등을 구경했다[看燈]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따라서 고려의 국가행사로 설행되기 전부터 이미 사찰에서는 상원연등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력(佛敎曆)과 무관한 시기에 사찰에 등을 단 것은 중국불교의 영향이 크겠지만, 이와 나란히 민간에서도 정월보름에 불의 민속이 자생적으로 성행하고 있었던 점이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나라 연등회의 기원은 대보름에 불을 밝혀 풍농과 밝은 새해를 비는 고유의 농경의례와 불교의례가 결합된 문화로 전승되었다.

국가의례로 설행

전통연등회를 거론할 때면 고려연등회를 떠올리듯이 고려시대에는 왕을 정점으로 한 국가가 연등회의 강력한 전승주체로 등장한다. 고려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 26년(943년)에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요, 팔관은 천령ㆍ오악ㆍ명산ㆍ대천ㆍ용신을 섬기는 것”이라는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내려 연등회의 성격을 뚜렷이 천명한 바 있다. 이에 연등회는 팔관회(八關會)와 함께 불교에 뿌리를 둔 대규모 국가의례로 정착되어 고려시대 전 왕조에 걸쳐 설행되었다.

정월보름(상원)에 행하던 연등회는 성종 대에 일시 중단되었다가 1010년(현종 원년) 현종이 즉위하면서 부활되어 날짜를 이월보름으로 변경하였다. 이월보름은 열반절(涅槃節)이자, 민간에서 이월초하루를 머슴날이라 불렀듯이 이월은 겨울추위가 물러가고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되는 철이었다. 따라서 이월보름 연등회는 풍농기원의 농경제와 열반절이라는 두 의미가 만나 전승기반을 공고히 하게 되었고, 몇 차례 정월보름과 교체ㆍ중복되는 가운데 지속되었다.

<고려사>에는 국가의례로서 행한 연등회의 의식절차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연등회는 14일의 소회(小會)와 15일의 대회(大會)로 나누어 왕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소회일은 궁궐에서 행하는 편전의식과, 태조의 진영을 모신 봉은사(奉恩寺)에서 행하는 배알의식으로 이루어진다. 대회일은 궁궐연회가 중심이 되어 편전의식, 진설 및 좌정의식, 연회의 3부로 구성하여 군신 간에 차와 주식을 비롯해 차·술·꽃 등을 나누게 된다.

이틀간의 편전의식에서는 백희가무(百戱歌舞)의 공연이 펼쳐졌다. 이때 채붕(彩棚)과 산대(山臺)를 가설하고 춤과 극, 음악과 노래, 기예와 놀이를 행하여 연등회와 팔관회의 백희가무는 종합예술이 발전할 수 있었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특히 소회일 오후에 봉은사 행향(行香)에 나선 왕의 행렬은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수천 명의 의장대를 거느리고 봉원사를 오가는 화려한 대규모 행렬에는 춤과 음악과 놀이가 행해졌고, 환궁 무렵이면 가로를 따라 등산(燈山)과 화수(火樹)로 장식하고 등불을 높이 밝혀 대낮처럼 환하였다.

연등회를 행하는 이틀 밤 동안에는 통행금지를 없애고 개경 전역에 수만 개의 등불을 밝혀두어 이를 즐기는 관등행사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백성들은 밤늦도록 거리를 돌아다니거나 야산에 올라 불야성의 축제를 즐기기도 하고 사찰에 연등을 하면서 복을 빌었다. 궁중에서도 대회일의 공식행사를 마친 뒤에 등석연(燈夕宴)이라는 잔치를 열어 관등을 즐겼다.

이처럼 국가의례로서 고려연등회는 불교이념과 농경의례를 기반으로 하여, 건국시조인 태조를 기리는 가운데 다양한 축제적·제의적 요소를 갖추어 설행되었다.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계층 간의 결속을 다지는 사회통합적 성격의 고유한 국가축제로서 문화적 역량을 다져나갔다.

민간축제로 정착

고려시대에는 국가의례로서 정월보름·이월보름에 행한 연등회 외에 사월초파일 연등이 있었다. 석가탄신일은 불교의 대표적인 명절로, 사찰과 민간에서는 대규모 연등회는 아니더라도 이른 시기부터 등을 밝히며 경축하는 순수 불교행사를 행해온 것이다. 본격적인 규모의 초파일연등회는 1245년(고종 32)에 무신 최우(崔瑀)가 개최한 사례를 시작으로 하여, 점차 궁궐과 관료의 집에서 개인적 차원으로 설행되었다.

고려 말의 기록을 보면 민간에서는 이미 초파일연등회를 명절처럼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에는 공민왕이 사월초파일에 연등을 하고 궁전 뜰에서 아이들의 호기희(呼旗)를 구경한 뒤 포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초파일이면 집집마다 등을 달았기에, 수십일 전부터 아이들이 장대에 종이를 오려붙인 깃발을 만들어 성안거리를 돌아다니며 소리쳐 쌀과 베를 구해 그 비용으로 삼았는데 이를 호기라 부른다고 하였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국가의례로서 연등회는 폐지되었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상원연등과 초파일연등이 이어졌다. 이에 태조와 세종은 사찰을 제외한 일체의 연등·관등을 금하도록 하였다.

이후 상원연등은 점차 대보름의 불 민속으로 통합된 반면, 초파일연등은 국가의 통제와 무관하게 민간의 세시풍속으로 정착하여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활발히 전승되었다.

1800년대의 <동국세시기>를 통해 조선시대 초파일연등 풍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초파일을 등석(燈夕)이라 부르면서, 민간에서는 며칠 전부터 등간(燈竿)을 세운 다음 꼭대기에 꿩의 깃털로 장식하고 여러 색깔의 천으로 깃발을 만들어 매달았다. 아울러 집안의 자녀수대로 등을 달고 남보다 크고 높은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시가에 늘어선 가게마다 등간을 높이 세워 오색찬란하고 기이한 수십 종의 등을 팔았고, 이를 구경하려는 이들이 몰려들었다. 그 가운데 영등(影燈)은 등 안에 갈이틀을 만들고 종이로 사냥하는 모습이나 동물모양을 오려 붙여, 바람이 불어 돌 때마다 비쳐 나오는 그림자를 구경하게 만든 것이다.

사치를 좋아하는 이들은 대나무 배를 강가에 띄우고 돛대를 실어 등간을 만든 다음, 일월권(日月圈)으로 장식하거나 회전등을 매달아 바람에 빙빙 돌도록 하였다. 또 화약을 종이에 싸서 등간에 매단 등줄 사이에 달아놓고 불을 붙이면 활을 떠난 화살같이 흩어져 내려오는데 그 찬란한 불꽃이 비가 오는 것 같았다.

연등놀이를 하는 날 저녁에는 야간통금이 해제되어 장안의 남녀들이 남북의 산기슭에 올랐고, 장안 바깥에서도 노파들이 서로 붙들고 와서 잠두봉에 올라 등을 달아놓은 장관을 구경하였다. 어떤 이는 악기를 들고 쏘다니며 놀아 장안은 사람의 바다를 이루고 불야성을 이루어 밤새도록 떠들썩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더 이른 시기에 발간된 <용재총화>에는 호기풍속에 대해 “물고기 껍질로 북을 만들어 길거리를 몰려다니며 등불 켤 기구를 얻으러 다닌다”고 하였다. 깃발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며 북을 쳐 호기를 알리고 왕을 비롯한 대중이 이를 구경한 점으로 보아, 노래와 춤 등의 연희도 따랐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전통시대의 초파일은 ‘연등’이 핵심을 이루면서 누구든지 자유롭게 참여하고 즐기는 대규모 축제의 장으로 전승되어왔다.

 근·현대의 연등회

근대에 들어서도 다양한 모습의 초파일연등이 전개되었다. 초파일이 다가오면 갖가지 등을 만들어 종로 네 거리에 등시(燈市)가 서는가 하면, 1920년대의 기록에서 “한성의 육방거리에 오색등을 달고 부잣집에서는 채색한 사다리를 세워 층마다 등을 달아 마치 하늘의 총총한 별을 보는 것 같았다”고 하여, 조선시대의 초파일풍습을 연상케 한다.

1920년대부터 승속이 등을 손에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제등행렬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야간의 제등행렬도 성행하였다. 한편 일제는 1937년에 초파일을 양력으로 치르도록 강제하고, 하나마쯔리(花祭)를 내세워 초파일문화를 일본화 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였다. 광복 후 초파일을 음력으로 환원하고 연등행사를 비롯해 전통 봉축행사를 복원해나가는 한편 강연회·음악회 등의 다양한 문화행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55년 초파일에 행한 제등행렬은 연등회가 현재의 모습으로 탄생하게 된 단초가 되었다. ‘조계사-종로3가-을지로3가-시청-중앙청-안국동로터리-조계사’를 도는 거리에 만등(萬燈)을 달고 곳곳에 아취를 세워 분위기를 돋우었으며, 이후 제등행렬은 더욱 활성화되었다. 1975년 석가탄신일이 국가공휴일로 지정되어 더욱 많은 인원이 연등행사에 참여하였고, 이듬해에는 제등행렬 장소를 옮겨 여의도광장과 조계사를 연결하였다.

1996년부터는 봉축기획단을 꾸리고 초파일행사의 내용과 성격을 재편하여, 전통연등회와 현대거리축제를 결합한 다채로운 행사로 자리를 잡아나갔다. 제등행렬 장소도 여의도에서 동대문운동장으로 변경하고, 행렬종착지에서 해산하지 않고 놀이마당으로 연결함으로써 본격적인 거리축제로 거듭나게 되었다. 아울러 외국인의 참여를 이끌고 등 만들기와 전시, 놀이마당과 불교체험마당 등을 신설해 현재 연등축제의 기본 틀을 갖추었다.

이에 연등회가 지닌 가치를 널리 알리고 체계적으로 전승보전하기 위해 2007년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지정계획을 세워 학술보고서를 발간하였고, 2008년과 2009년에는 ‘연등회의 역사와 전통’ 및 ‘연등회의 문화재적 가치와 한중일 연등축제의 비교’에 대한 국내·국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연등회 전통성 규명을 위한 특별좌담회’를 열었다. 이러한 노력 끝에 2012년에 연등회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지정 1주년을 기념해 ‘연등회의 종합적 고찰’에 대한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오늘날 중요무형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된 연등회는 크게 세 가지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첫째, 관불의식(灌佛儀式)과 이운의식(移運儀式)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운동장에서 진행하는 어울림마당이다. 이곳에서 행렬에 참여할 모든 인원이 모여 법요식을 행한 뒤 노래와 율동으로 부처님오신날의 기쁨을 함께 나누게 된다.

둘째, 동대문-종로-광화문을 연결하는 거리를 각 종단과 불교단체에서 자율적으로 만들어온 다채로운 행렬등과 장엄등을 가지고 참여하는 연등행렬이다. 약 두 시간 동안 5만 명이 넘는 인원이 단체별로 화려하고 다양한 등을 밝혀든 행렬은 일대장관을 이루며, 아울러 전통 연희와 놀이를 선보임으로써 불교종합예술의 장을 펼치게 된다. 셋째, 행렬을 마치는 종각사거리와 광화문광장에서 대중과 함께 다양한 놀이마당을 벌이는 회향식이다.

전통연등회와 현대축제를 결합한 연등회에 해마다 수십만 명이 운집하여 진정한 대동축제이자 세계축제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면모는 범국가적 축제였던 고려·조선시대 연등회의 맥을 이은 것이자, 스스로의 등을 밝혀 나와 이웃을 함께 밝혀나가는 불법의 축제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연등회의 가치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2011년부터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에 있다.

 

 

 

▲ 2015년 동국대 운동장에서 열린 연등회의 연등법회와 어울림 한마당. <금강신문 자료사진>

 

▲ 1975년 부처님오신날 제등행진 모습.  <사진제공=연등회보존회>
▲ 청계천 등 전시회(2015년).  <금강신문 자료사진>
▲ 1976년.  <사진제공=연등회보존회>
▲ 1996년.  <사진제공=연등회보존회>
▲ 1997년. <사진제공=연등회보존회>
▲ 1999년.  <사진제공=연등회보존회>
▲ 2000년. <사진제공=연등회보존회>
▲ 2002년.  <사진제공=연등회보존회>
▲ 2003년.  <사진제공=연등회보존회>
▲ 2004년.  <사진제공=연등회보존회>
▲ 2005년.  <사진제공=연등회보존회>
▲ 2006년.  <금강신문 자료사진>
▲ 2008년.  <금강신문 자료사진>
▲ 2012년.  <금강신문 자료사진>
▲ 2014년.  <금강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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