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적 삶은 끝, 부처 같은 삶 시작하자

 

요즘은 제사상이나 차례상에 조기 대신 부서를 놓는 집안도 많다. 그 이유는 부서가 조기는 아니지만 조기를 닮았기에 조기대접을 해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부처님은 아니지만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면 부처님 대접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처럼 만 중생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와 내 가족과 내 주변을 위해 여유롭게 살도록 하자! 우리가 태어나면서 법계(法界)로부터 받았다는, 요즘시세로 100억 정도의 자가보장(自家寶藏)을 금광 개발하듯이 개발하여 나와 내 주변에 자리(自利) 이타(利他)의 실천으로 나누어 줄 수 있는 부자가 된다. 부처님 방식대로 부자가 되는 것은 우리 불자들이 다 아는 내용이다. 그 곳에 이르기 위해서는 3~4가지 문만 통과하면 된다.

그때부터 우리의 61세부터의 인생은 대역전극이 된다. 꼭 61세가 아니라도 좋다 48세부터 54세에 시작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 아니었을까? 부처님께서는 이 땅을 감인토(堪忍土) 즉 ‘인내를 감당할 수 있어야지만 살아갈 수 있는 땅’이라고 하셨다. 이 사바세계의 존재의 실상을 깨달으신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그냥 사주팔자대로 살아라~ ’가 아닌 고통이 생기고 사라지는 4성제를 설명해주시면서 그 대안으로 8정도(定道)라는 우리가 가야할 길을 제시해 주셨다. 그러면서 우리의 인생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이 되어 ‘고통을 벗어나 즐거움의 길로 들어서서 살게 된다’고 가르쳐 주셨다. 

타인 위한 삶의 출발선

그렇게 되기 위해선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60세 이전과 비교해 보고 우리의 나아갈 길을 밝혀보자. 그 길의 답부터 이야기하면 나를 위한 소원은 내려놓고 타인을 위한 소원을 찾아 다시 세우고, 가지고 싶은 마음을 주고 싶은 마음으로 바꾸고, 누구에게 빌고 구하는 마음을 누구를 위해 기도하고 축원하는 능력으로 사용하기만 하면 된다. 이제 그 방법을 보자.

불자들의 예불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심귀명례 삼계(三界)도사 사생(四生)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이게 도대체 뭔 소리인지 절에 50년 다닌 우리 어머니나 절에 25년 다닌 우리 집사람이나 별로 관심이 없다. 그냥 그 엄숙하고 폼 나는 스님들의 염불소리에 괜히 숙연해지고 눈물이 난다고 한다. 삼계도사(三界導師)란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인간의 마음 따라 형성된 세계들’을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알아가지고는 100세 인생을 살 군자금을 마련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절간 뒷방도 얻지 못한 채 요양병원에서 일생을 맞이할 확률만 높일 뿐이다.

이제는 명확히 알고 100세 인생을 살아가자. 욕계란? ‘욕심으로 사는 세상’을 말한다. 대표적인 욕심이 돈과 사랑이지만 여섯 하늘이 아니라 수천 수만의 여러 레벨이 있다. 그래서 영화건 책이건 강의건 돈과 사랑을 주제로 하면서 ‘이 몸뚱이’에 양식을 채워가면서 산다. 이 세계는 ‘존재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모든 것이 ‘범소유상 개시허망’임을 모르는 무명 중생들이 사는 세상을 말한다.

그리고 색계란? ‘몸으로 사는 세계’를 말한다. 사실 몸이라는 것도 실체가 없다. 심하게 말해서 유체이탈을 해보거나 빙의라는 것을 당해보거나 무속인 박수들에게 보이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공수 받아서 자신의 육체가 보이지 않는 영혼들에게 주인자리를 내놓고 사는 분들을 보면 된다. 즉 자기 몸이 자기가 아닌 경우를 우리는 보고 듣게 된다. 실체가 없는 에너지 덩어리에 불가한 몸의 세계인 색계(色界)도 여러 레벨이 있다. 카마수트라 같은 남녀 간의 육체를 방편으로 사용해서 남자라는 무명의식과 여자라는 무명의식이 하나로 통일되는 느낌을 체험함으로써, 우리들의 몸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실체와 다르다는 것을 알자는 도파도 있다. 그래서 무아(無我)를 체험하자는 부류부터 기도를 통해 강아(强我), 다시 말해 ‘강한 나’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주 탐내고 싶어 하는 세계로 무속인들이 아주 좋아하는 세계다. 이곳은 ‘느낌의 세계’라고도 한다. 인간의 몸을 버리고 죽었는데도 몸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오온체’들이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란 〈금강경〉의 법계의 참된 진리를 몰라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몸에 집착을 보여, 밥을 먹지도 못하는데 제삿밥도 먹으러 오고, 음양이 없는 데도 없는 음양을 그리워하고 천도재 등의 세계가 펼쳐지는 곳이 바로 이 색계에 사는 존재들이다.

반면에 무색계는 어떤 세계일까? 그 곳은 ‘생각으로 사는 세계’를 말한다. 초발심 스님들이 사시는 세계가 대표적 무색계의 세계라고 할 수도 있다. 이곳은 차원 높은 의지(意志)의 세계! 즉 어떤 세속적 욕망도 다 무시한 채 속세 사람들 중 그 어떤 의지도 갖지 않는 사람들이 좋아한다. 사주팔자 등의 모든 인연을 타고 넘는 세계를 추구한다. 그래서 결혼도 하지 않고, 사회적 욕망도 없고 머리카락도 다 깎아 버리고 옷도 버려진 천으로 만든 먹물들인 옷을 입고, 우리의 육신을 유지하는 의식주부터 일반인들과 많이 다르게 추구하기도 한다. 대표적 예로 밥도 오직 탁발(托鉢)로 빌어먹고, 옷도 패션 테러수준이며 사는 곳도 동물 수준으로 신체유지만 하는 것을 지극한 긍지로 여기게 된다. 일반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주 돈이 안 되고 영양가 없는 세계가 바로 이 무색계의 세계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도박이나 도둑들보다 더 미친 듯이 진리를 탐구하고, 법계의 살림살이를 찾아 헤매는 것은 아주 열정적이다. 오직하면 ‘공부하다 죽으라!’ 라는 말까지 다 있을까? 

삼계도사, 누구나 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인류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다 이러한 무색계 중생 출신들이다. 즉 한 명의 천재가 100만 명을 구할 수 있고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의 진리가 되어 만 중생을 구하는 그런 큰 심보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 세계이다. 그래서 입만 벌리면 ‘사홍서원’과 ‘일체중생을 다 구하겠다’는 서원을 한다. 이러한 것은 모두 무색계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 생각 중에서도 고결한 생각만으로 사는 세계를 말한다. 전혀 돈 안 되는 일을 하는 과학자와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분들은 돈보다 이성보다 가정보다, 만 중생을 유익하게 할 지적탐구, 진리추구에 더 관심이 있다. 이것을 ‘의지의 세계, 서원의 세계’라고 한다.

삼계의 스승이라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런 갖가지 중생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는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석가모니불!’이라고 우리는 지극한 마음으로 예를 올리는 것이다.

우리는 불자(佛者)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그렇게 따르며 살겠다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부처님의 DNA가 있다. 부처님의 DNA를 잘 키우면 우리도 삼계도사가 될 수 있다. 그러면 부처님은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중생들을 어떻게 다 이끄실 수 있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저런 것들을 다 내려놓는 것이다. 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욕계를 떠난다고 인간의 목숨을 끊는 것도 아니고, 색계를 떠난다고 영적 존재들과 내통해 자기 몸에 다른 영적 존재들을 받아들여 신과 합일을 이룬다는 것도 아니고, 무색계를 여읜다고 이혼을 하고 자식을 버리고 출가하라는 것이 아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저런 모든 것에 ‘의지’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의지를 바꾸기 위해서는 존재의 실상(實相)을 알 필요가 있다.

존재의 실상이라는 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이 ‘22:78’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양의 세계 22%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는 음의 세계 78%이다. 음의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신안(神眼)이 열린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과 같은 지식과 느낌을 통해 알게 된 것을 말한다. 이것이 실상관(實相觀)이다. 예를 들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기도도 할 줄 모르고 염불도 할 줄 모르고 절에 낸 돈도 없는 경우에 그 어려움을 벗어날 단 한 가지 길은 범사에 감사하라! 그러면서 ‘하루에 고맙습니다!’ 만 번을 하면 된다! 그러면 누구나 무조건 되냐? 답은 무조건은 아니지만 누구나 된다는 맞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고맙습니다!’하는 그 마음에 진심이 담기는 경우는 세상을 바꿀 수 있지만 진심이 담기지 않은 ‘고맙습니다!’는 입만 바쁘고 일체유심조가 되지 않아 ‘조화(造化)’가 일어나지 않기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존재의 실상을 알자

실상의 세계를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아프리카 등 많은 나라들이 한국을 벤치마크(Benchmark)해 자신들도 한국처럼 성장하고 싶어 한다. 그러면 한국은 그들에게 ‘새마을 운동’과 ‘한국의 교육열’ 등을 전해준다. 필자는 감히 말할 수 있다. 한국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불교계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대기업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등을 책에서 배우거나 배워서 알려고 하면 다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은 실상(實相)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이고 보이는 양의 세계 22%만 가지고 마치 자신이 실상 100%의 전체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음의 세계 78%에서 정말 미친 듯이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성공한 나라다.

대표적으로 한국전쟁을 통해 지금은 당연히 불법인 약매매와 성매매 등을 통해 밑바탕을 깔고, 월남전에 미국의 용병으로 참여해 국민의 피를 팔고, 중동과 독일 등에서 국민의 땀을 팔고 기술을 배우고 자금을 축적했으며, 미래의 후손과 미래 역사를 위해 당시 불교계는 일본군에게 비행기도 헌납하기도 했고, 국가 개발의 성장 동력을 갖추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로 남의 나라 침범에 개입했던 전쟁! 소위 월남전에 적극 참여하는 근거를 개발해 정부에 제공하는 등 법계의 실상을 아는 사람들이 78%의 음의 세계를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노력을 보태어 대한민국이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다시 말해, 생존을 위해서는 국가·단체·개인이 무슨 일이던지 다 한 것이다.

그런데 필자 자신을 포함한 우리 불자들은, 60세 이전까지는 염불이나 명상이나 100일 기도 1000일 기도 등 양의 세계 22%에서 밝혀진 것만 하면 다 된다고 배웠고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부처님 말씀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일까? 아니다! 우리는 존재의 실상을 너무 몰랐고,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는 선지식(善知識)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매를 맞았던 것이다. 이제 61세부터는 정신을 차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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