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녹인 국악가요 매료, ‘보시행’으로 행복한 삶

▲ 불교방송 ‘추억의 음악다방’ DJ 주병선 씨가 청취자들의 신청곡을 라이브로 부르고 있다. 사진=이강식 기자

“안녕하세요. 추억의 음악다방 ‘칠갑산의 가수 주병선’입니다.”

매일 오후 9시 5분 BBS불교방송 라디오에서 방송되는 7080 세대의 음악과 이야기를 나누는 ‘추억의 음악다방’을 녹음하는 주병선 씨의 목소리에 흥겨움이 묻어난다. 그는 녹음 스튜디오 안에서 기타를 둘러매고 앉아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청취자들의 신청곡을 라이브로 부르고 있었다.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고인돌’로 금상을 받고, 1989년 ‘칠갑산’을 열창하던 그의 애절한 목소리는 강산이 세 번 바뀐 세월이 무색할 만큼 변함이 없다. 사실 그는 오프닝 맨트를 ‘가수 주병선입니다’로 하고 싶었지만, 방송국 측에서 “‘칠갑산의 가수 주병선’으로 해야 불자들이 안다”고 해 바꿨다.

당시 그의 나이는 25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전통가요 창법을 구사하며 애절한 목소리로 대중들의 삶의 애환을 대변하던 청년 주병선. 그의 노래 ‘칠갑산’은 발매 후 75만장이 팔려나갈 정도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소위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됐다’는 말을 실감했지만, 갑자기 찾아온 폭발적인 반응에 그는 어리둥절했다고.

주위에선 데뷔하면서 성공을 거둔 그를 “천운을 타고 태어났다”며 부러워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신만의 노래 색깔을 찾아야 할 시기에 평생의 꼬리표와 같은 ‘칠갑산의 가수 주병선’이라는 영원한 타이틀이 생겼다.

그는 ‘칠갑산’을 넘어서기 위해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쓰디 쓴 좌절감도 맛봤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 ‘칠갑산’은 넘어야 할 산이 아닌 30년을 함께 걸어온 귀중한 친구 같은 존재라는 걸. 그는 “‘칠갑산’은 뛰어 넘을 수도, 뛰어넘어야 하는 곡도 아닙니다. 이 곡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좋은 곡을 만들어 오래오래 대중들에게 기억되고 싶어요”라고 바람을 전했다.

올해는 그가 가수로 데뷔한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사람들은 그가 1989년 데뷔한 줄 알지만, 그보다 3년 전인 1986년 KBS 젊음의행진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이 때문에 그는 1986년을 데뷔한 해로 삼는다. 30년 간 가수로 활동해 온 그에겐 기억될 만한 일이 많을 터. 그럼에도 엊그제 일처럼 기억나는 건 첫 방송출연도, 콘서트 무대도 아닌 MBC 대학가요제다. 중학생 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웠고, 가수가 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했던 게 대학가요제였기에 대학 입학과 동시에 각종 가요제에 출전했다.

7번의 예선 탈락에도 굴하지 않고 1988년도에 자작곡 ‘고인돌’로 재도전, 금상의 영예를 안았다. 쓰러지면 일어나고, 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뚝심 좋은 오뚜기처럼 7전 8기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 셈이다. 대학가요제는 걸출한 음악 실력을 자랑하는 대학생들이 참가해 창작곡을 겨루는 신선한 무대였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폐지됐다. 본선에 진출한 것만으로도 ‘동네 자랑거리’가 될 만큼, 본선 무대 진출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렇게 힘들게 얻은 영예였기에 2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기억이 생생한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종방한 tvN ‘응답하라 1988’ 7회에서 극중 배우들이 1988년 MBC 대학가요제를 시청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고인돌’을 당차게 부르던 자신의 옛 모습을 봤다는 그는 “다시 봐도 내가 자랑스럽던데요. 근데 너무 말랐더군요.(웃음)”하며 웃음 지었다. 그는 “당시 록음악으로 각종 가요제에 출전했었는데 계속 떨어졌죠. 그래서 수상곡들을 분석했는데, 전통(국악)을 가미한 가요를 부른 참가자가 상을 받더군요. 그래서 대금연주를 가미한 진짜 국악가요 ‘고인돌’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엔 ‘동상’ 정도 예상했는데 금상을 받아 정말 기뻤죠”라고 회상했다.

‘국악가요’에 각별한 애정을 갖게 된 건, 그의 집안 환경에 기인한다. 그의 고향은 전남 여수다. 아버지(주운옥)는 여수 농악놀이의 맥을 이어온 유명 풍물패의 상쇠이자 향토문화재였다. 어머니 또한 국악을 전공한 국악 집안이었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박동진ㆍ조상현ㆍ안숙선 씨 등 국악 명인들이 드나들었다.

이런 가정환경 덕분에 6남매 중 4명이 음악인이 됐다. 그와 현재 대학에서 한국무용을 가르치는 큰 누나, 트럼펫 연주자였던 큰 형, 통기타 가수였던 막내 누나까지. 지금도 6남매가 한자리에 모이면 국악부터 대중가요까지 밤새는 줄 모르고 즐긴다고 한다.

국악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누나와 형이 대중가요를 하겠다고 했을 때 극심한 반대를 했지만, 막내인 그가 대중가요를 선택했을 땐 환영했다. 그는 “부모님이 가수에 길을 허락하셨던 건, 아마도 중학교 시절부터 그룹을 결성하고 떠들썩하게 활동했던 게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의 부모는 국악인답게 부부싸움을 할 때도 ‘아이고 어쩔까나~’하면서 판소리 한 대목을 불렀다고 한다. 이렇게 국악은 그의 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대중가요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중학생 시절. 교내 동아리였던 성악그룹 활동을 하면서 당시 성악을 전공한 선생님으로부터 성악 발성과 음악의 기초를 배웠다. 그렇게 쌓은 실력으로 ‘전국 성악대회’에 참가해 상을 휩쓸었다.

당시 그룹 이름을 ‘앞으로 음악으로 밥 먹고 살자’라는 뜻의 ‘밥줄’로 지을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는 록밴드 활동을 했다. 록밴드는 그가 가수의 길로 진로를 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학교분위기는 록밴드를 하거나 그룹을 결성하면 ‘무기정학’을 내리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그의 열성적인 모습에 학교에서 교내 밴드로 정식 인정했다. 덕분에 그는 원 없이 음악을 할 수 있었다. 그때 활동했던 록밴드이름은 ‘수평선’이었다.

록음악에 빠져 ‘가수’의 꿈을 키웠지만, 지방출신이 이름 난 가수가 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가수가 될 방법은 딱 한 가지, 대학가요제에 나가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록음악을 하느라 잠시 내려놨던 국악을 다시 시작했다. 오로지 대학을 가기 위해서였다. 그는 ‘가수가 돼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에 부랴부랴 입시를 준비했다. 남들보다 늦게 준비한 탓에 힘이 곱절로 들었지만, 어렵게 추계예술학교(현재 추계예술대학교) 국악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그의 타고난 재능은 서울에서도 통했다. 대학에서 타악기를 부전공한 그는 경주신라문화제에서 설장구 춤으로 최우수상을 받았다. 록음악과 국악 그리고 타악기까지 섭렵한 그의 재주를 아들이 물려받았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실용음악과에 입학한 그의 아들은 기타와 보컬에 소질을 보여 음악인으로써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과거 KBS ‘여유만만’ 프로그램에 아버지와 함께 출연한 아들은 팝송 ‘You raise me up’을 불러 재능을 인정받았다. 언제나 자녀들과 친구같이 지낸다는 그는 아들의 교육관만큼은 굉장히 엄격했다. 음악계의 대선배인 까닭일까. 그는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발판 삼아 쉽게 오르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남들보다 쉽게 오른 만큼 어려움을 맞닥뜨렸을 때 쉽게 무너진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스스로 해내길 바라고 있다고.

25살의 나이에 스타덤에 올라 국민 애창곡의 주인공이 된 그에게도 어려운 시절은 있었다. ‘칠갑산’ 때문에 매일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던 그는 입대 후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잊혀져갔다.

‘대학가요제’에서 금상을 받고 ‘칠갑산’이라는 히트곡으로 큰 인기를 끌어 소위 잘나가던 그를 제대 후에는 불러주는 곳도, 기억해주는 이도 별로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했던 그를 구해준 이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그에게 “불러주는 사람이 없으면 네가 찾아가서 노래를 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곧장 기타를 메고 전국을 다니며 공연을 했다. 그때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부르는 노래 한 곡이 많은 사람들을 울고 웃게 할 수 있다는 걸.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슬픔을 덜어주는 그런 가수가 되자”고 다짐했다.

그는 ‘칠갑산’ 덕분에 많은 공연과 방송에 출연했고, 돈도 남부럽지 않게 벌어 어머니께 생활비와 용돈을 드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준 돈을 남몰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고 있었다. 그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닥치자 어머니는 “어려운 사람을 돕고 살아야 훗날 복을 받는다”며 그에게 봉사활동을 권했다.

그는 1994년 연예계 친구들과 만든 ‘파랑새’라는 작은 봉사단체를 결성했다. ‘의미 있는 모임을 갖자’는 취지로 시작한 봉사단체에서 매월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 장애인 등 소외된 이웃을 돕고 동료 가수들을 모아 자선공연을 펼쳤다. 조용히 선행을 베풀어 오던 그는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끌어 오던 ‘파랑새’를 해단시켰다.

오랫동안 활동해온 탓에 단체규모가 커지면서 자신이 추구했던 단체로서의 의미가 퇴색했다는 게 큰 이유였다. 그러다가 2015년 불자가수 장미화 씨의 제안으로 ‘주병선의 오후사랑방’이라는 20여 명으로 구성된 작은 봉사단체를 조직했다. 이 봉사단체는 순수한 마음으로 봉사에 임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모아 조성한 단체로 현재 여러 분야에서 종사 중인 사람들이 각자의 재능을 쏟고 있다.

‘진정한 봉사를 하고 싶다’는 그는 제일 잘하는 노래로 즐거움을 주고 함께 즐기는 것이 ‘진정한 봉사’라고 단언한다. 그는 적은 돈으로도 함께 즐기고 좋은 마음으로 대접하는 봉사를 추구한다. 그는 매번 복지기관을 찾을 때마다 자신을 기억해주는 분들과 아팠던 친구들이 많이 호전됐다는 소식을 들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특히 봉사는 그에게 ‘도움을 주러가는 것이 아닌 삶의 에너지를 얻는’ 매개체가 됐다.

다양한 방송과 공연을 통해 20년 동안 불교와 인연을 맺어온 주병선 씨. 2015년 12월부터 시작한 라디오DJ 덕분에 요즘 청취자들과 더욱 가깝게 소통한다는 그는 불자님의 따뜻한 인정 때문에 불교계를 떠날 수 없다고. 그에게 불교는 뼈 속 깊이 녹아있는 정서이자, 인간 주병선을 그대로 봐주고 좋아해주는 ‘고향’ 같은 곳이다.

이제 그는 봉사를 통해 얻은 삶의 에너지를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노래’로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보답할 생각이다. 6월 경에 발표할 9집 앨범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또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찬불가 앨범을 함께 발표해 지금까지 들을 수 없었던 깊이 있는 찬불가를 불자들에게 선사하고픈 것도 ‘불자 주병선’의 꿈이다. 그의 손에서 명작 찬불가 앨범이 탄생하길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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