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길 치솟은 하얀 피 역사를 바꾸다

▲ 석당은 육각의 몸돌로 이루어져 있다. 높이는 106㎝, 각 면의 너비는 29㎝. 지붕 모양의 옥개석(屋蓋石)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남아 있지 않다. 육각의 한 면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이 조각되어 있는데, 땅이 진동하고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잘린 목에서 피가 솟아오르는 장면이 간결하면서도 강렬하게 표현돼 있다. 나머지 다섯 면에는 각 면에 바둑판처럼 가로 세로로 교차하는 7행 25칸의 정간(井間)을 치고 그 안에 한 글자씩 해서체로 음각(陰刻)했다. 백률사는 528년(법흥왕 15) 이차돈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절로 본래 이름은 ‘자추사(刺楸寺)’다. 당시 신라에서는 음이나 뜻이 같으면 종종 이름이 바뀌는 경우가 있었다. 자추사도 ‘자(刺)’가 ‘잣’을 거쳐 ‘백(栢)’으로, 추(楸)는 ‘밤’이므로 율(栗)로 바뀐 것이다.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되었다가 1600년 경 새로 지어졌다. 〈사진제공=국립경주박물관〉

법흥왕은 크게 진노했다. “당장에 이차돈을 참하라”고 명령했다. 칼을 찬 무사가 이차돈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 끌려나온 이차돈은 왕과 대신들이 모인 장소에서 하늘을 향해 맹세를 하듯 외쳤다.

“대왕께서 불교를 일으키려 하시므로 제가 목숨[身命]을 돌보지 않고 세상 인연을 버리니 하늘에서는 상서로움을 두루 백성들에게 보여주십시오.”

이차돈이 선 채로 목을 숙이자 형을 집행하는 옥리가 칼을 휘둘러 목을 벴다. 큰 칼이 목을 치자 흰 젖이 한 길이나 치솟았다. 그리고 머리는 멀리 날아가 소금강산(경주 동천동 소재) 마루에 떨어졌다.

갑자기 천지가 어두워져 저녁 빛을 감추었다. 땅은 진동했고 비가 뚝뚝 떨어졌다. 법흥왕이 흘린 눈물이 곤룡포를 적셨다. 재상들은 근심으로 인해 진땀이 흘러내렸다. 샘물[甘泉]이 갑자기 말라 물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뛰었고, 곧은 나무가 저절로 부러져 원숭이들이 떼를 지어 울었다.

- ‘백률사석당기’ 일부 윤색  

527년(법흥왕 14년) 신라의 왕궁 반월성에서 일어난 이차돈(501, 506~527) 순교 장면이다. 528년·529년 설도 있는데, 여기서는 정설을 따른다. 우리는 이차돈의 순교를 신라의 불교 공인을 있게 한 ‘설화’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순교는 불교 공인 외에도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는 큰 변화의 시발점이었다. 신라는 귀족 중심의 부족국가에서 강력한 왕권을 지닌 고대국가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고, 화랑도 창설에도 영향을 끼쳐 훗날 신라 삼국통일의 바탕이 된다.

법흥왕. 그는 ‘法興’이란 시호가 붙었을 만큼 신라의 불교 공인과 흥법(興法)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왕이다. 하지만, 이차돈을 참형에 처한 왕이기도 하다. 현재 학계에서는 신라의 불교 공인 시기를 이차돈의 순교 직후로 보고 있지만, 여러 기록에는 불교가 신라 사회에 뿌리내리기까지 순교 이후 약 8년이 소요된다. 

순교, 어떻게 일어났나?

이차돈 순교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유물은 경주 ‘백률사석당(栢栗寺石幢)’이다. ‘이차돈순교비(異次頓殉敎碑)’라고도 불리는 이 유물은 순교 사건이 일어난 후 290년이 지난 818년(헌덕왕 10) 건립됐다. 석당에는 당시 상황이 그림과 글(석당기)로 묘사돼 있다. 마모가 심해 글씨는 알아보기 어렵지만, 발굴 초기 탁본을 통해 대강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관련 기록은 ‘백률사석당기’ 외에 몇 가지가 더 전한다. 〈삼국유사〉는 ‘촉향분례불결사문’과 〈향전〉을 인용했고, 〈삼국사기〉는 〈계림잡전〉과 ‘백률사석당기’를 인용했다. 이밖에 〈해동고승전〉도 있다. 이 기록들은 이차돈이 자신의 희생을 통해 불교 공인을 관철시켰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하지만 참수의 명분과 관련해서는 차이를 보인다. 찬술 당시의 시대 상황과 찬술자의 역사 인식이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본다.

이런 점을 고려한 순교 직전 상황이다. “청하옵건대 소신을 참하셔서 이 시끄러운 여론을 무마하십시오.” 이차돈의 제안에 법흥왕은 “내가 일으키고자 하는 것은 진리다. 어찌 무고한 너를 살생할까”하며 거절한다. 이 때 이차돈이 순교를 암시하는 말을 한다. “만약 그 진리가 이 세상에 행하여 질 수만 있다면 소인은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왕은 마지막으로 군신들을 소집해 보지만, 불교에 대한 부정적 입장만 재확인한다. 결국 법흥왕은 결단을 내린다.

참형의 명분과 관련해 ‘백률사석당기’에서 확인되는 글자로 유추하면 법흥왕은 이차돈에게 고유신앙의 중심지였던 천경림에 흥륜사를 창건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그후 모종의 명분을 만들어 이차돈을 참한다. 이차돈이 흥륜사 창건지로 천경림을 택한 게 혼자만의 판단이었는지는 명확치 않지만, 결과적으로 군신들은 거세게 반발한다. 석당기를 보면 법흥왕은 이차돈의 참형을 명한 후 몰려온 군신들에게 “내가 불법(佛法)을 믿어 탑을 세우고자 한다고 여겨 반역을 꽤하는가?”하며 눈을 부라린다. 깜짝 놀란 군신들은 반역의 의도가 없음을 강조하면서 “만약 (이러이러) 하다면 (이러이러) 하겠다”고 무언가를 맹세한다. 이차돈의 목숨을 담보로 한 계략이 먹힌 것이다. 귀족들의 강한 반발을 유도한 후 측근이던 이차돈을 참하면서 압박 명분을 잡은 것이다.

하지만 이차돈 순교 후 곧바로 불교가 신라 사회에 정착되거나, 절대 왕권이 형성되진 않았다. 8년간의 공백을 거쳐 535년 흥륜사 불사를 재개한다는 점에서 순교 직후 불교가 공인되지 않았고, 맞물려 절대 왕권도 확립되지 않았으리라 유추하는 근거다. 현재 공식적인 신라 불교 공인은 이차돈이 순교한 527년이다. 하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이후 8년을 불교 공인과 절대 왕권의 확립기간으로 본다. 

법흥왕 대 정치·종교적 상황

이차돈 순교가 갖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시 신라 왕실의 권력구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후진적이고, 보수적인 나라였다. 모태는 진한의 6개 부족 중 하나였던 사로국이다. 사로국은 이주민 집단으로 보이는 박혁거세의 등장과 또 다른 이주민 집단인 석탈해, 김알지 등이 지배층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박·석·김 3개 성씨가 번갈아 왕위에 오른다. 초기 신라는 왕이란 명칭 대신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김 씨의 왕위 세습은 내물왕부터다. 이때부터 ‘마립간’이란 칭호를 사용하고, 실성-눌지-자비-소지를 거쳐 지증왕에 이르러 마립간은 왕으로 바뀐다.

법흥왕까지 김 씨의 왕위 세습은 7대째 이어진다. 이 시기 신라는 고대국가를 형성하지 못했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는 일곱 왕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지증왕을 포함한 6부족의 대표를 이르는 말이다. 지증왕은 6부족 중 가장 큰 세력이었을 뿐, 당시 신라는 여섯 지배집단이 분할 통치를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법흥왕 즉위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는 법흥왕 즉위 11년이 되는 524년 세워졌다. 순교 사건 3년 전이다. 이 비석에서도 6부족 체제의 견고함은 확인된다.

당시 강력했던 귀족세력의 힘은 오늘날 경주 도심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고분이다. 천마총이 포함된 대릉원에는 137만㎡에 모두 23기의 고분이 있다. 여기에 견줄만한 고분군이 경주 건천읍 금천리 고분이다. 모두 52기에 이르는 고분은 대릉원 고분과 비슷한 규모인데, 신라 6부족 중 모량부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즉, 왕과 강성한 귀족 간에 세력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불교의 공인 후 무덤은 도심에서 자취를 감춘다. 산으로 올라가고, 규모도 작아진다. 절대 왕권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종교적 상황은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6부족 지배집단은 각자 자신들의 성지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늘의 자손이라는 천신사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신앙은 왕의 입장에서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이즈음, 중국은 남북조시대였다. 당시 북위에서 융성했던 불교의 특징은 바로 ‘왕이 곧 부처[王卽佛]’라는 사상. 왕권이 약했던 법흥왕의 입장에서 불교의 ‘왕즉불’ 사상은 굉장히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반면 귀족들은 백성들이 임금을 부처처럼 여길 경우 힘이 약화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불교 수용의 반대는 당연한 수순이다. 이차돈과 법흥왕은 이 시기에 천신사상의 성지인 천경림에 사찰을 세우려 했다. 그것은 불교의 공인과 왕권 강화를 놓고 벌인 승부수였을지 모른다. 

박씨일까? 김씨일까?

이차돈 순교의 전후사정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이차돈과 법흥왕의 가계도 파악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차돈의 가계를 연구한 이도흠 교수에 따르면 신라 21대 소지왕은 후사를 두지 못했다. 결국 사촌인 습보갈문왕(왕의 아버지, 형제, 장인 등에게 내린 칭호)의 맏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데 그가 지증왕이다. 그 아들이 법흥왕, 조카가 이사부와 이차돈의 아버지 길승(吉升)이다. 당시 귀족 세력을 대표하던 이사부는 법흥왕과 사촌지간이 된다. 또 이차돈에게 이사부는 삼촌, 법흥왕은 5촌 당숙이 된다.

가계도가 맞다면 이차돈은 김 씨 왕족으로 봐야 한다.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이차돈의 이름을 ‘이처(伊處)’ 또는 ‘염촉(厭)’, ‘염규(厭覩)’ 등이라 밝히면서 성은 ‘박’이라고 적고 있다. 〈해동고승전〉에도 “내사사인(內史舍人) 박염촉(朴厭觸)은 ‘이차돈(異次頓)’ 혹은 ‘거차돈(居次頓)’이라 불렸는데, 나이가 26세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를 근거로 학계에서는 이차돈을 박씨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본 기획에서는 가계도 분석을 근거로 한 이도흠 한양대 교수의 주장에 따라 이차돈의 성씨를 김 씨로 본다.

성과 이름의 혼란은 당시 신라인의 이름 짓기 습관과 무관치 않다. 신라 초기에는 성씨에 개념이 없다보니 이름을 적을 때 성을 쓰지 않고 마을이름과 사람이름만 썼다. 법흥왕 대를 기점으로 200년이 지난 경덕왕 때 와서 사람 이름을 비롯한 지명과 관명(官名) 등을 한자식(중국식)으로 바꾸었다. 성과 이름의 한자식 명기는 고려에 와서 정착된다. 이런 이유로 ‘김염촉’을 우리는 지금도 ‘이차돈’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시대 초기 포교승은 모두 ‘이차돈(고슴도치)’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차돈은 재가불자였지만, 정방(正方)과 멸구자(滅垢) 등 신라에서 포교를 하다 죽임을 당한 승려들, 고구려에 불교를 전래한 순도, 백제의 묵호자, 신라의 아도 모두 고슴도치의 다른 이름이란 것이다. 낮에 땅굴을 파고 숨어 있다가 밤에 활동을 하는 고슴도치의 행태를 빼닮은 포교 방식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란 게 이들의 주장이다. 즉, 이차돈(異次頓)은 고슴도치의 신라식 표기라는 설명이다. 관련 논문도 발표된 바 있는데, 주제에서 벗어나므로 깊게 살피진 않겠다. 

이적은 일어났나?

불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 순교와 이적이 일어났다는 말은 그 과정이 녹록치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럼, 이적은 정말 일어났을까? 이차돈 순교 시 일어난 이적의 모티브는 불교 경전이란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445년 중국 위나라의 혜각 스님이 펴낸 〈현우경(賢愚經)〉에는 “하늘과 땅이 여섯 갈래로 진동했다”거나 “피가 마침내 우유가 되었다”는 구절이 실려 있다. 472년 위나라 때 간행된 〈부법장인연전(付法藏因緣傳)〉에도 우유가 흘렀다거나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는 대목이 나온다. 학자들은 ‘붉은 피’가 아닌 ‘흰 젖’을 생명, 재탄생으로 해석한다. 갓난아기들이 먹는 흰 젖은 새 생명의 원천이므로 이차돈 순교 설화 역시 이런 경전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백률사 산록(소금강산)의 소나무 가지는 잘라도 다시 난다’는 ‘백률송순’의 고사가 더욱 힘을 실어준다.

이적의 진위를 떠나 이차돈 순교 후 그에 대한 추모 열기는 신라 사회에 광범위하게 확산된다. 817년 남간사 일념 스님이 지은 비문 ‘촉향분례불결사문’은 이차돈에 대한 당시 백성들의 뜨거웠던 추모 열기를 잘 보여준다. 400년 후인 1215년 각훈 스님이 고려 고종의 명을 받고 편찬한 〈해동고승전〉에도 “내가 동쪽 도시를 유람할 때, 금강산 산마루에 올라 외로운 무덤과 작은 비석을 보고 슬퍼서 울고 싶은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날 산인(山人)들이 모임[香徒宴]을 하기에 그 까닭을 물으니 즉 우리 사인(舍人, 이차돈)의 기일이라 하였다. 역시 떠난 지 오래되니 생각은 더욱 깊어진다 하겠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차돈을 추모하는 신행조직은 ‘사(社)’와 ‘향도(香徒)’로 불렸는데 소금강산에 있는 이차돈의 무덤과 백률사 비석을 보수하면서 매년 기일에 재와 함께 향도연을 베풀었다고 전한다. 그들은 신라 때 화랑도, 고려에 와서 승속이 어우러진 모임으로 이어져 1,000년 이상 이차돈을 추모했다. 이차돈의 순교는 왕조가 바뀐 고려 사회에 와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후대에 끼친 영향

이차돈과 달리 법흥왕의 순수성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기록에는 법흥왕도 신심 돈독한 불교도였다. 하지만 그는 귀족 세력과 힘겨루기를 하던 나약한 왕이었다. 그런 왕이 종교에 심취했다는 이유로 정치적 위험을 자초했을까? 법흥왕은 아버지 지증왕의 개혁정치를 계승했다고 평가된다. 즉위 3년 만인 517년 병부를 설치하고, 520년 정월 율령을 반포했다. 백관들의 공복(公服)을 제정하기도 했다.

어쩌면 법흥왕은 개혁과 왕권 강화 과정에서 귀족들과 갈등이 고조됐고, 그 정점에서 흥륜사 창건 문제가 발생해 정치적 위기에 처했을 수 있다. 그런 그에게 이차돈의 순교는 유일한 타개책이었을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했듯이 석당기에는 이차돈 순교 후 귀족들이 법흥왕에게 무언가를 맹세한다. 정치적 협상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마도 불교 공인과 함께 기존 고유종교와 공존의 길을 모색했을 것이다. 오늘날 사찰 안에 고유신앙의 신에 해당하는 산신이나 용왕을 모시는 산신각과 용왕당이 전해지는 건 당시 고유신앙과의 습합을 짐작케 한다. 내밀한 상황은 유추할 수밖에 없지만, 결과적으로 이차돈의 순교는 불교 공인, 삼한의 병합, 삼국 통일의 초석 등 신라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전래과정에서 그 역사적 진실이 일부 각색되었을 뿐, 이차돈의 순교는 허구적 설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이다. 백률사석당은 그 대표적 증거다. 하지만 이런 귀중한 문화유산은 지금까지도 국보나 보물이 되지 못했다. 2014년 2월 10일 문화재청이 보물 지정예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 지정은 보류됐다. 소유권 논란 때문이다. 백률사석당은 1910년대초 일본 학자들에 의해 발견돼 1914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진다. 그런데 소유권 판단의 근거가 되는 발견 위치와 초기 건립추정지를 둘러싸고 문화재청과 백률사 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석당은 보물의 가치가 충분함에도 현재까지 보물 아닌 보물로 남아 있다.

〈삼국유사〉에는 이차돈의 순교를 찬탄하는 일연 선사의 시가 실려 있다.

의 쫓고 생 가벼이 여기니 누가 아니 놀라랴
[徇義輕生已足驚]
하늘 꽃과 흰 피는 더욱 다감하네.
[天花白乳更多情]
문득 한 칼에 몸은 비록 죽었을지라도
[俄然一劒身亡後]
절간마다 울리는 종소리 도성을 뒤흔드네.
[院院鍾聲動帝京]


# 참고문헌

〈삼국유사〉 / 을유문화사
〈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청년사
〈신라왕조실록〉 2권 / 타오름출판사 = 97페이지
〈국상 이사부〉 / 책과나무 = 243~253 페이지 이사부와 울릉도...박씨가 아닌 김씨?
〈HD역사스페셜2〉 / 효형출판
〈조선상고사〉 / 역사의 아침
‘좬三國遺事좭에서의 염촉 순교 설화 수용에 대한 검토’ / 차광호 / 역사문화연구 제55집
‘백률사(栢栗寺) 설화와 제영(題詠)에 대한 연구 : 이차돈 순교 설화와 ‘백률송순(栢栗松筍)’을 중심으로’ / 강석근 / 韓國詩歌硏究. 제32집
‘이차돈 순교유적과 유물에 대한 고찰’ / 김태형 / 불교미술사학 제11집
‘異次頓의 가계와 新羅의 佛敎 수용’ / 李都欽 / 한국고대사탐구 Vol.6
‘興輪寺와 異次頓의 순교’ / 李逢春 / 新羅文化. 제20집
‘新羅 佛敎公認의 實相’ / 辛鍾遠 / 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 제14집
‘고슴도치(異次頓)죽음의 二元的 悲劇姓’ / 김무조 /경성대학교 논문집 13집 3권
‘異次頓說話에 대한 新考察’ / 崔光植 / 韓國傳統文化硏究. 1
‘新羅佛敎의 浸透過程과 異次頓 殉敎問題의 新考察’ / 李丙燾 / 대한민국학술원 인문사회과학편 14
‘고고 자료로 본 신라 고대 국가의 성립 시기’ / 김창호 / 신라문화 제21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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