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견해 주장 위한 대자보
불교계 사건 알리는데 사용하면
모바일 약한 노보살에 유용

지난 1월 15일 영면에 든 신영복 선생은 “언약(言約)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라 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언약을 쉽게 생각하고 만남은 무의미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옷깃 한 번 스치는 데에도 삼천 겁(劫)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커피숍에 앉은 이들이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기보다 모두 스마트폰에 열중이다. 만나자고자 한 언약은 그 자리에서 만남을 위한 핑계일 뿐이다. 참 가벼운 세상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몇 해 전 우리 사회를 새롭게 달구었던 “안녕들 하십니까?”란 대자보(大字報)가 있었다. 2013년 12월 10일 고려대의 한 대학생이 교정에 붙인 대자보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우리 젊은이들의 눈과 귀는 어디로 향하고 있지 의문스럽다.

대자보는 원래 ‘자기의 견해를 주장하기 위하여 붙이는 대형 게시글(文)’이다. 그 유래는 중국 문화대혁명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북경대학 강사 녜웬즈(元梓) 등 7명이 연서하여 1966년 5월 25일 그 대학식당 동쪽 벽면에 붙인 것이 대자보의 처음이다. 녜웬즈의 대자보는 첫 번째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대자보란 칭호를 받아 승승장구했고, 모택동 등이 추진한 문화대혁명의 주요한 기재로도 활용되었다. 모택동을 지지한 북경대학은 법과 철학, 자본주의를 지지한 칭화대학은 공경제(工經濟) 부문을 중점으로 하면서 성장했으나 이제 그 위상이 서로 달라진 느낌이다.

어떻게 보면, 그저 벽이나 게시판에 붙여 널리 알리고자 한 글[壁報]이 엄청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옛날 방문(榜文)과 같았던 대자보가 근대사회로 넘어 오면서 특히 정치적 사건이나 문제에 관한 의견, 그 관련자들에 대한 비방, 대중들을 선동 동원하기 위한 격문으로 자리했던 시절도 있었다.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우리 사회가 직면한 부정부패, 통일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반응은 있을지 몰라도 시큰둥하게 받아들인다. 심지어 어린아이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 답변이 10층 건물의 주인이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월세를 받아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겠다는 식이다. 이 아이들과 꿈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종이에 자기주장을 써 건물의 벽이나 게시판 등에 붙이는 대자보를 한번 해보라고 권하면 어떻게 할까? 타이핑해서 대형복사를 해 그냥 붙이고 말 것인가. 아니면 큰 글자를 연속 프린트해 마구 붙일까? 또 의문이 깊어지고 만다.

지난 80, 90년대까지만 해도 대불련 등 불교학생회에서는 절 입구 한 곳에 ‘이번 사찰순례는 어디로 간다’, ‘수련대회는 언제부터이다’ 등의 일정을 알리는 대자보를 많이 붙였다. 그리고 주지스님 몰래 색깔 짙은 대자보를 붙여 대중선동이나 의식화를 꿈꾼 적도 있었다. 영면에 든 신영복 선생의 글씨체를 배워서라도 대자보를 쓰고 싶었다. 그분과의 인연은 어느 날 저녁에 안주와 곁들이는 ‘처음처럼’이란 글씨로 만나고 있을 뿐. 그땐 나의 주장이나 우리들의 주장을 펼쳐보고 싶은 기재들이 늘 부족했기에 그렇게 한 것일까. 이것은 하나의 이유가 된다. 그럼에도 지금, 대자보를 생각한 것은 최근 불교계에 일어나는 안타까운 일들을 나이든 분들까지도 제대로 알았으면 하는 진실의 바람이 더 큰 것 같다. 모바일에 유독 약한 한국의 노보살님들에게 진실을 보여줄 방법은 말로 해서 귀로 듣게 하는 것과 대자보와 같이 큰 글씨로 이해를 구하는 방식을 선택해 보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 일을 할 젊은이도 없을뿐더러 대자보를 붙일 장소도 없다는 점이다. 겨우 현수막 한 장 붙이는 데에도 수고로움이 여간 있어야 한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