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 양산 사회 구조, 불교 나서야
증오·적대하는 양극화
가장 먼저 해결할 문제
다름과 틀림 인정해야

<신심명>에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지만 단지 따져 가림을 꺼릴 뿐이다”라 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미워하거나 애착하지 않으면 툭 틔어 분명하게 된다” 하였다. 이 말을 마음 닦음과는 다른 영역, 현재 우리 사회가 가진 근본 문제로 바꾸어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마음과 세상이 둘이 아니니, 마음 닦는 문제와 사회 문제를 굳이 둘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을까?

우리 사회가 지닌, 좋은 세상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움을 계속 생산해내는 근본 구조는 무엇일까? 바로 간택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너와 내가 다름을 나누는데서 문제가 시작한다는 말이다. 단지 나누기만 하는가? <신심명>의 말 순서대로 거기에 미워함, 애착함이 덧붙는 증폭의 과정이 기본적인 순서인양 되고 있다. 그리하여 분명 좋은 세상을 만들 길을 저버리고, 갈등하고 괴로워하는 구조를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빠져 함께 허우적거리는 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르다는 것을 ‘틀린다’고 표현하는 말투 속에 숨어 있는 우리 의식의 문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지적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나와 다른 것은 ‘틀린’ 것이며, 옳지 않은 것이며, 그러기에 미워하고 증오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양극화로의 탄탄대로(?)를 걷고 마는 것이다.

불교가 세상을 이끄는 올바른 종교로 바로 서기 위해서는 괴로움을 양산해내는 근본 구조를 고치는 데 나서야 한다. 괴로움이 이미 이루어진 다음에 그 뒤를 따라 괴로움을 구하려는 것은 뒷북치는 하급의 종교가 되는 길이다. 이런 시각에서 생각할 때 우리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고통 생산구조는 바로 양극화이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고 서로를 증오하고 적대하는 방향으로 줄달음쳐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양극화이며, 우리를 괴로움에 빠뜨리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의 불교가 가장 앞서서 해소하려고 노력해야 할 문제가 바로 양극화의 문제인 것이다. 그 양극화의 모습은 가장 크게 드러나는 것만 해도 남북갈등과 보수와 진보의 갈등, 자본과 노동의 갈등, 세대간의 갈등들이 모두 양극화의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들이 각각 개별적으로 존재하기 보다는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어느 세상이고 이런 문제가 없을 수 없겠지만, 우리의 문제는 그것들이 ‘다름’의 차원에서 논의되고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틀림’의 차원으로 옮겨가 증오와 적대감으로 증폭되는 양극화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요 몇 년 사이의 사회 현상을 살펴보면 이러한 양극화가 나날이 증폭돼 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보다 나은 결론을 향해 나가는 소통이 실종돼 가고 있다. 네 편이냐 내 편이냐만 문제이고, 내편 아닌 사람은 무조건 타도해야 할 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가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우리 심성의 바탕을 이루어 나가는 현상, 이를 극복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 반대로 말하면 이 구조를 극복함이 바로 좋은 세상을 이루는 첫걸음이며, 불국토 건설의 시작인 것이다.

“단지 미워하고 애착하지 않으면 툭 틔어 분명하게 되리라!”하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다름’을 ‘틀림’으로 보는 인식구조를 바꾸고, 양극화로 치닫는 길을 멈춘다면 좋은 세상, 불국토가 분명하게 이루어진다는 말씀에 다름이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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