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ㆍ부처님 은혜로 가수, 나눔으로 회향해요”

 

노래, 연기, 개그, 악기 연주 등으로 사람들에게 행복과 기쁨, 때로는 뜨거운 감동의 눈물을 선사하는 연예인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 연예계지만, 그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도 많다. 연말 각종 시상식에서도 보듯 연예계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지만, 신심 깊은 불자들도 많다. 자신의 프로필 종교란에 과감히 ‘불교’를 쓴 이들도 있다.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불자들의 삶과 신행이야기를 들어본다. 편집자

경북 구미의 한 마을, 남자는 동네에서 노래 잘 부르기로 소문난 일명 ‘우리 동네 명가수’였고, 여자는 음악적인 리듬감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이 남자를 일찍이 사윗감으로 점 찍어 둔 이가 바로 여자의 어머니였다. ‘노래를 잘 부른다’게 이유였다. 이렇게 만난 남편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고, 아내 또한 음악을 사랑했다.

이들 부부 사이에서 5남매(3남 2녀)가 태어났다. 5남매 중 부모의 피를 제대로 물려받은 맏이는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노래 잘하는’ 가수가 됐고, 아래 여동생은 피아노학원 선생님이 됐다. 맏이는 ‘당신의 의미’, ‘찰랑찰랑’ 등으로 스타덤에 오른 트로트가수 이자연(53) 씨다.

동네에서 ‘꼬마 이미자’로 불렸을 정도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잘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한두 번 들으면 따라 부를 정도로 머리가 총명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반기고 알아봐 주는 것을 좋아하는 끼가 넘치던 아이였다. 그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좋았던 그는 중학교 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웠다.

5남매 중 맏딸이 당시 ‘딴따라’라며 홀대받던 가수의 꿈을 키우는 것을 본 아버지는 ‘딸이 잘못되면 가족들이 얼굴을 못 들고 다닌다’는 이유로 결사반대를 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래 출전한 대구 MBC의 노래자랑에서 이수미 씨의 ‘여고시절’을 불러 대상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15살. 그는 어린마음에 ‘가수가 되기 전엔 시집을 안가겠다’, ‘가수가 되면 그만이지, 공부는 필요 없다’라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가수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쳐다보지 않았다.

노래자랑 이후로 소녀 이자연에게는 ‘대구의 트롯 신인’, ‘유망주’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어느 날 그의 재능을 알아본 한 작곡가를 만나게 됐다. 작곡가는 그의 부모에게 음반(LP판)제작 제의를 했고, 그와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서울 아세아레코드 녹음실에서 생애 첫 앨범인 ‘호반의 두 그림자’를 제작했다. 이자연 씨는 “당시 LP판은 옴니버스 형태로 제작됐는데, A면이 제작비가 비싸 B면에 노래를 실었다”고 회상했다.

음반을 제작했지만, 집에 전축이 없어 옆집에서 듣던 그는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목소리가 그저 신기하고 행복했다. 그렇게 ‘가수’의 길에 첫 발을 내딛었다. 생애 첫 앨범 발매 전, 어머니는 그의 손을 잡고 팔공산 갓바위에 올랐다. 이자연 씨는 당시 무척이나 힘들었는지 정상에 도착해선 어머니에게 “여기서 뭘 하면 돼?”라는 짜증 섞인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어머니는 “부처님께 너의 소원을 말해라”고 했고, 그는 “부처님 꼭 가수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소원을 빌었다.

이제 데뷔 30주년 중견가수가 됐다. 중학생 소녀가 간절히 발원했던 소원이 이뤄진 것. 이자연 씨는 “부모님과 부처님의 은덕으로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지방 공연이 있을 때면 인근 사찰에 들러 꼭 참배를 한다. 부처님을 만나면 마음이 정화되고, 편안해진다”고 했다.

그는 앨범을 발매한 후 공연문의가 쇄도해 본격적인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19세. 당시 큰 무대에 오르기 위해선 가수협회에 등록을 해야 했다. 함께 준비했던 아는 언니와 시험에 합격해 드레스 두 벌을 사서 부산의 한 야간업소에서 공연을 시작했다. 어린나이에 낮밤이 바뀐 생활패턴과 먼지가 많은 업소환경 때문에 폐가 나빠져 하루에 노래 1곡을 부르기도 벅찬 시절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 야간업소 공연을 하던 그는 일본 NHK의 한국어방송에 출연할 기회가 생겨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했다. 가수 길옥윤ㆍ패티김 씨가 출연하는 ‘한일문화교류-일본 전국투어’공연에서 선배들과 한 무대에 서기도 했다. 그때 나훈아 씨와 인연을 맺게 됐다.

선배 가수들과 여러 차례 공연한 인연 덕분인지 한국의 한 음반회사로부터 한국데뷔 제의를 해왔다. 당시 한국에선 주현미 씨가 큰 인기를 끌 때였는데 음반회사에서 메들리 음반 제작 등 좋은 조건을 제시해 1986년 한국에서 자신의 첫 공식 앨범을 내고 가수로 데뷔했다. 그의 한국 활동 소식을 들은 나훈아 씨는 자신의 곡 ‘내 당신’을 개사한 노래 한곡을 그에게 건넸다. 이 곡은 이자연의 데뷔곡이자 30년간 사랑받고 있는 명곡 ‘당신의 의미’이다.

그는 첫 데뷔곡이 나훈아 씨의 ‘영영’, ‘무시로’처럼 대단한 곡이길 기대했다. 하지만 편곡이 채 되지 않은 ‘당신의 의미’를 듣곤 실망해 곡이 맘에 안 든다고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당신의 의미’를 발표했을 때 대중들의 폭발적인 반응이 있었지만 그는 실감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이자연은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됐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30여 년간 가수 생활 동안 수많은 공연을 한 그이기에 기억에 남는 공연과 사람들도 적지 않다. 2015년 KBS ‘동포 노래자랑’ 행사로 브라질에 방문했을 때였다.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교민들이 선물을 주는 등 그에게 따뜻한 관심을 가져주었다. 그는 ‘너무 고맙고 감사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유독 팬들과 마음이 통하는 일화가 많은데, 그의 마음을 뜨겁게 달군 특별한 일화가 있다. 몇 년 전 어버이날을 맞아 한 호텔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90세가 넘은 고령의 할머니가 그의 공연을 본 뒤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자식들이 그의 연락처를 수소문해 전화를 걸어왔다. 자녀들의 간곡한 부탁에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어르신과 통화를 했다. 그 어르신은 “내가 자식을 키우고 정신없이 90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나에게도 엄마가 있다는 것을 잊고 살았는데, 이자연 씨의 노래를 듣고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다. 이렇게나마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는 감사의 전화였다.

“나의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줄 수 있어서 (가수가 된 것에 대해)보람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런 재능을 물려주신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할머니의 말을 듣고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살아계신 어머니가 생각 나 함께 눈물을 흘렸다는 이자연 씨. 부모가 전해 준 재능 때문에 오늘의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털어놨다.

그는 지금까지 노래가 좋아 ‘가수의 길’만 걸어왔다. 남들처럼 학교에 다녀야 할 시기에 낮엔 방송을, 저녁엔 업소를 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가수 이외의 다른 것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2009년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소식과 함께 예정돼 있던 각종 공연이 줄줄이 취소돼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를 고민하던 그는 항상 여유 없이 바쁘게만 살아오다가 오랫만에 집에만 있다 보니 무기력감이 밀려왔다. 이를 벗어나려 ‘배움’의 길을 택하고 2년 간 수능시험을 준비해 2011년 건국대 예술학부에 입학했다. 그렇게 그는 40세가 훌쩍 넘은 나이에 늦깎이 대학생이 됐다. 처음엔 공부가 너무 힘들어서 다시 공연을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이 때가 아니면 배울 수 없다’는 생각에 공부에 몰두했다.

그가 당시 첫 수업에 들어갔을 때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학생들과 교수님들이 부담스러워 했지만 모든 스케줄을 조정하면서까지 학부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지금은 편하게 지내고 있다. 첫 수업 날 쑥스러워하며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던 학생들의 도움도 컸다.

30년간 다수의 히트곡으로 부러울 것 없는 ‘가수 이자연’이 늦은 나이에 배움의 길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약속 때문이다. 가수 데뷔를 반대했던 아버지는 ‘가수생활 1년 만 해보고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그의 확답을 받고서야 데뷔를 허락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약속한 시간이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떠나신 후 집안 경제를 책임져야 했던 이자연 씨, 무대에서 더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자신의 힘으로 네 명의 동생을 모두 대학에 보냈다. 그가 5남매 중 가장 늦게 대학에 진학한 이유다. 어린 나이에 동생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정작 본인은 공부를 못했지만, 단 한 번도 가족을 원망해 본 적은 없다. 그는 “노래에 미쳐 학업엔 관심도 없었다. 지금까지도 가족을 원망한 적 없고, 나의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했다.

대학 졸업장을 받은 날, 그는 졸업장을 들고 돌아가신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가수 생활을 1년만 하고 대학에 진학하겠다’고 했던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걸 알려 드리고 싶어서였다. 아버지의 산소에 졸업장을 바친 그의 눈에 눈물이 그치지 않고 흘러 내렸다.

이제 그는 언론홍보대학원에 진학해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배움의 길은 끝이 없기에 평생 배우고 또 배우겠다는 생각이다. 10년 뒤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를 생각하면 학업을 멈출 수 없다고.

1986년 가수로 데뷔 했으니, 올해가 만 30년이 되는 해다. 아직 뚜렷한 계획은 세우지 못했지만 데뷔 30년 특별공연도 구상 중이다. 그리고 대한가수협회 부회장으로써 협회와 가수들을 위해 의미 있는 공연도 준비하고 있다.

노래에 미쳐 서울에 올라와 가수가 된 이자연,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감내했어야 할 고통과 힘겨움은 마음 한 켠의 작은 창고에 넣어두었다. 언젠가 시련이 닥쳐왔을 때 다시 꺼내 보며 견뎌 낼 것이란다. 누구에게도 부끄럼 없는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며 팬들에게 오래오래 사랑받기 위해 죽을 때까지 배움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이자연 씨.

팔공산 갓바위에서 ‘가수가 되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해 이뤄낸 ‘가수 이자연’의 꿈처럼, 사찰에서 여는 산사음악회에서 노래하며 모든 사찰을 다니고 싶다는 ‘불자 이자연’의 염원도 성취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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