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많은 시대, ‘침묵’으로 진리를 설하다

“중생이 아프기에 보살이 아프도다! 병든 중생의 빵을 빌어먹는 대의왕(大醫王)이여! 그대는 무얼 하는가?”

어느 날, 붓다에게 온 편지글이다. 보낸 사람은 유마(維摩). 그는 부처님이 머무는 죽림정사와 가까운 도시 바이샬리에서 소문난 장사꾼이다. 한 때 출가하여 수행자 생활을 했으나 다시 속세로 돌아와 장사를 하며 엄청난 돈을 벌었고, 투전판과 기녀들의 집을 드나들며 살아가는 시정잡배다. 그러나 그는 저잣거리를 떠도는 가운데 속된 행위에 물들지 않고 보시를 하고 선행을 하며 공덕을 쌓는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한 때 자신을 지도했던 스승을 찾아가 논쟁을 벌여 그들을 이겼으며, 심지어 부처님의 제자들을 한 사람씩 만나 수행과 깨달음의 문제 등에 대해 논쟁을 벌여 10대 제자 모두를 무참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 유마가 부처님께 편지를 보낸 것이다. ‘중생이 아픈데, 그래서 보살 또한 아픈데, 당신의 교단은 지금 밥이나 빌어먹고 설법이나 하고 들으면서 도를 구한다고 하니 그게 과연 옳으냐?’는 공세. 10대 제자를 차례로 논파 한 다음, 그 제자들의 스승 붓다에게 보낸 도전장인 것이다.

이 도전장이 위대한 경전을 만들었다. 〈유마경〉 또는 〈유마힐소설경〉으로 불리는 대승경전이다. 부처님의 제자도 아닌 세속의 거사가 부처님의 제자들보다 한 단계 높은 경지에서 성불과 보살행, 즉 불교의 궁극에 대한 견해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경전이다.

그 짜릿한 경전이 2016년 새해 벽두에 한 권의 장편소설로 독자들 앞에 나타났다. 백금남 작가가 30여년 만에 탈고하여 마침내 독자들 앞에 나타난 장편소설 〈유마〉(쌤앤파커스). 물론 소설은 〈유마경〉을 모티프로 하고 있고 ‘소설의 본연’에 충실했다. 편집자

▲ 백금남 작가는…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1985년 제15회 삼성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등대에 불 밝히기〉로 KBS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십우도〉 〈탄트라〉 등을 발표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2003년에 〈티베트의 영혼 파드마삼바바〉로 민음사 제정 ‘올해의 논픽션상’을 받았다. 2013년에는 법정 스님을 다룬 소설 〈맑고 향기로운 사람, 법정〉을 발표해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 됐다. 그의 소설 〈관상〉은 영화로 제작되어 2014년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했으며, ‘궁합’ ‘명당’ 등이 계속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사진=이강식 기자

유마 거사 통해 개인과 사회통합의 참뜻 밝혀
대승불교의 핵심 ‘不二’ 일깨우는 절절한 설법
30여 년 고치고 고친 끝에 탈고 “때가 된 듯”

-지난 해 천만 관객을 동원한 흥행작 영화 ‘관상’의 원작자로 알려졌지만, 사실 불교작품을 꾸준히 써 오셨는데요, 〈유마〉를 30여년 만에 탈고했다는 후문이 있더군요.

“처음 소설을 쓸 때부터 이 작품을 품고 있었습니다. 써 놓고도 계속 뭔가 미진하다는 생각에 고치고 또 고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이 소설에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인가요?

“내용이야 당연히 중요하죠. 소승과 대승이 만나는 시점의 이야기이고, 대승을 아무리 강조해도 소승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니까요. 불교소설이라는 게 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경전의 내용을 소설로 꾸민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경전은 경전이고 소설은 소설이니까요. 말하자면 소설이 가지는 재미와 경전이 가지는 경건성은 조화를 이루기가 어렵죠. 경전적 요소가 강조되면 소설의 재미가 없어지고, 소설적 요소가 강조되면 경전의 핵심이 흐려지니까요. 그래서 고치고 나면 또 뭔가 미진해 보이고 다시 손을 보고나면 또다시 부족한 듯하고. 몇 년 전, 누가 출판을 하자고 제안 했는데, 그때는 선뜻 용기가 나질 않더군요. ‘아직도 부족하기 때문이구나’라고 생각하며 다시 원고를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은 시기적으로 잘 내신 것 같으신지요?

“이제는 이 책이 나올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시대가 유마의 침묵을 배워야 할 때라고 봅니다. 말이 많은 시대이고 지나치게 주장이 많은 시대인데, 침묵의 숭고함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마의 침묵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글쎄요. 이 질문에 저도 침묵으로 답할 수 있을까요? 물론, 소설가는 소설로 그 답을 말했다고 봅니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놓고 비춰 본다면, 유마의 침묵은 분열이 아니라 통합과 원융의 침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진리는 말로 설명되어질 수 없지만, 말을 하지 않으면 진리를 전할 방법도 없습니다. 무한한 방편의 바다에서 침묵은 아주 극적인 방편인 셈입니다. 종교적 숭고함을 벗어 놓고라도 우리 시대는 말이 너무 많잖아요? 각자 자기주장에만 집착하고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존중하지 않으니까 분열과 대립이 증폭되는 거고요.” 

-침묵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침묵의 의미겠지요?

“물론입니다. 그 침묵 위의 대답을 알아차려야 진짜 유마를 만나는 것이고 붓다를 만나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시장에서도 깨침을 볼 수 있고, 거리거리에서 숱하게 침묵하는 붓다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만나는 순간 그 침묵과 하나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나눔을 실천 한다며 기자들 앞에서 사진만 찍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이 과연 나눔을 행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보시를 한다고 자랑을 해대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재물을 보시해도 보시 한 것이 아닙니다. 타인과 하나가 되어야, 둘이 아니어야 보시가 되고 나눔이 되는 것인데, 대개는 ‘내가 너에게 보시한다’는 관념을 벗어나지 못하거든요. 그런 구조 속에서 유마는 외치는 겁니다. 나와 너는 둘이 아니라고, 불이(不二)라고. 그래서 보시하는 사람도 보시 받는 사람도 없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한 분별을 버리고 대승적인 일체를 이루는 것이 유마의 극락인데, 그것을 굳이 입으로 말하면 그 극락은 바로 무너져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침묵이라는 위대한 방편을 보인 것이죠.”

-침묵이 우리 시대에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보고도 말을 하지 않는 침묵이 있고 더 큰 목소리로 말을 하는 침묵도 있겠군요. 절대의 침묵은 절대의 외침으로 통한다는 논리라고나 할까요?

“유마의 침묵, 유마의 정신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불이법문이라고 하잖아요? 둘로 분열되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와 하나를 초월해 둘마저도 없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가려는 의지가 필요한 거죠.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통합을 얘기하지만 그것은 진심이 아니고 그냥 구호일 뿐이에요. 정치구호가 갖는 공허함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경험했습니까? 그래도 여전히 구호는 구호대로 굴러다니는 게 현실이잖아요.” 

-소설에서 유마도 일관되게 그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게 유마의 정신이니까요. 내가 너를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가 되는 것이고, 부자가 가난한 자를 돕는 게 아니라 부자가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이 먼저니까요. 깨달음과 깨침의 차이를 굳이 따지는 것도 그 따짐을 초월하지 않으면 답을 얻을 수 없는 겁니다. 타인을 돕기 위해 먼저 타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핵심입니다. 그것을 깨우치고자 유마는 병을 앓았고, 붓다는 그의 병문안이라는 대형 이벤트를 통해 대승의 가르침을 펼친 것이지요.” 

-중생이 아프니까 보살도 아프다는 이 명제를 올곧게 받아들일 때 한국 불교도 달라 질 수 있겠군요.

“종교의 사회적 기능은 무궁무진합니다. 유마가 떠돌던 저자거리가 중생계이고 그 중생계를 포용하고 제도하려는 노력이 유마 시대 대승불자들의 절절한 몸부림이었거든요. 그들은 지금의 정치인들처럼 국민을 미끼로 자기 계산만 채우는 세상을 염려했던 것이고요. 정치인 뿐 아니라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와 타인의 일체화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종교적 성취가 가능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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