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 받으려면 짓는 게 먼저입니다.

새해가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를 하는데요. 어떤 분들은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라고 하시더군요. 인과법에 따라 복을 지어야 받을 수 있다는 얘기 같은데요. 복을 일단 먼저 받고 지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복을 받고 나서 짓는 것과 짓고 나서 받는 것의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복을 받으려면 지어놓은 복이 있어야 받는 것이겠죠? 내가 복밭을 일구지 않았는데 열매가 맺힐 순 없잖아요. 불자들은 먼저 복을 지어야 합니다.

<증일아함경> ‘호심품’에 보면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복 짓기를 권하셨답니다.

복 받는 과보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복된 즐거움을 누리는 원인을 만들었기 때문이랍니다. 매우 좋아할 일이라는 것이죠.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고자 보리수 아래에서 수행하셨을 때 마왕 파순의 방해를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전생과 금생에 지은 복덕의 힘 덕분이라고 하셨어요.

복을 받으려면 짓는 게 먼저입니다. 어떻게 복을 지을까요?

내가 손해를 보는 것 같은 상황을 마주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 괴로움을 ‘복을 짓고 있구나’ 하고 긍정의 마음으로 받아들여보세요.

복을 받는 것은 저축한 것을 쓰는 생활이고, 복을 짓는 것은 저축하는 생활입니다. 매일 저축한 걸 쓰기만 하면 어떻게 될까요? 빈털터리가 되겠죠? 복을 짓는 삶을 복을 받는 삶보다 더 많이 하셔야 늘 복을 받는 행복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남들이 복 받는 걸 부러워만 하지 마시고 복 받는 내일을 위해 오늘 복 짓는 삶을 사셔야합니다. 인생에 고통이 없을 수 없죠. 그런데 그 고통들이 모두 복을 짓는 중이라고 생각한다면 극복할 힘이 생깁니다. 

자기에게 한 말이 아님에도 혼자 오해하고, 툭하면 삐치는 사람은 어떻게 상대해야 합니까? 처음엔 피해의식이나 자격지심 때문에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자꾸만 제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속이 상합니다.

삐치는 사람들의 심리를 살펴보면 처음에는 기대치의 문제입니다. 그건 서로에 대해 익숙지 않기 때문에 충돌과 오해가 생기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죠. 하지만 불자님이 고통스러운 건 자꾸 반복되고 있다는 거죠.

한 번은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요? 내가 뭘 어쨌길래 저러나 라는 시선에서 저 사람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를 파악하고자 하는 시선으로 살펴보십시오. 삐치는 사람의 심리는 자존심이 상해서 대놓고 말도 못하고 그저 혼자 끙끙거리며 분을 삭이는 경우가 많아요. 상대방이 자기 마음을 알아주기만을 바라며 시위를 하고 있는 거죠.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데 충족이 안 되어 뭘 해도 삐치는 거라면 모자란 부분을 충족시켜주면 되겠죠?

구글 아시죠? 구글에 명상전문가가 있어요. 차드 맹 탄이라고. 이 분이 어떤 말을 했냐면요.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매일 그 사람을 향해 ‘고맙습니다’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했어요. 나의 그런 마음이 전해지면 상대는 나를 미워할 수가 없답니다. 모르는 사람을 향해서도 눈을 한 번 마주치고 감사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그 사람이 나를 좋은 감정으로 보게 된대요.

이게 바로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던 유마거사의 마음이요, 너의 고통을 다 구제해주겠다는 관세음보살의 마음입니다. 못난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죠. ‘못난 자식 부처님 같은 부모 만나게 해주련다’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대해보세요. 그저 밉게 보지 말고 ‘뭐가 부족하기에 저러나, 아껴주자’하는 마음으로 대해보십시오. 분명 달라질 겁니다. 

아내는 절에 다닙니다. 그런데 저는 불교를 아버님의 인연으로 원불교에 입문하였습니다. 열심히 다니지는 않지만, 아버님을 생각하면 다니고 싶은데 아내는 반대를 합니다. 지혜의 가르침을 주십시오.

아버님을 기리는 마음으로 원불교에서 신행활동을 이어가고 싶은 불자님의 마음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아 보세요. 원불교라는 종교에 신념을 가졌다기 보다 아버님을 기리는 추억의 장소인 것이 더 강하시잖아요. 그런 부분을 잘 설득해보세요. 부인이 반대하는 이유 또한 차분하게 들어보십시오.

갈등해소의 기본은 대화와 이해, 그리고 배려입니다. 한 번은 부인과 함께 절에 가주시고, 한번은 같이 원불교에도 가자고 해보세요. 서로 한번은 양보하자고 제안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답은 불자님의 마음에, 그리고 부인의 마음에 다 담겨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를 말합니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 인해 일어나고 벌어지고 해결된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죠.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상대방이 원치 않은 걸 강요하는 건 폭력의 또 다른 이름이에요. 부인께도 이런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일러주세요. 부처님께서는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는데 뛰어난 분이셨어요. 부인께서는 그런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 불자이시니 같이 잘 해결해나가자고 말씀해보세요.

사실 아버님을 기리는 장소가 원불교 교당이든 사찰이든 상관없습니다. 아버님과 함께 한 추억은 언제나 불자님 마음과 머리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불자님 또한 마음 한 번 내어 바꿀 수 있다는 유연한 마음으로 부인과 대화하시면 좋겠어요.

종교문제이든 성격차이든, 부부간의 갈등은 두 분의 화내지 않고 짜증내지 않는 대화가 가장 중요한 약입니다. 대화의 끈을 놓지 마시고 잘 설득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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