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서 고구려 ‘영웅’ 된 온달장군 감동 밀려와

한반도는 고구려ㆍ백제ㆍ신라의 통일 전쟁으로 강산이 피로 물들었습니다. 이후 고려ㆍ조선시대에는 몽골ㆍ일본 등 열강들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백성들이 마음 편히 두 다리 뻗고 자는 날이 많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다 보니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사적 요충지에는 성을 쌓아 방어를 했지요. 그래서 우리나라 산에는 수많은 산성이 남아 있습니다. 과거 죽고 죽이는 전쟁의 격전지였던 산성은, 후세 우리들에게는 역사의 현장이자 휴식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산성에 담긴 선조들의 애환과 역사의식을 되새기고자 산성 순례를 시작합니다.
편집자

▲ 온달산성에 올라서면 남한강과 영춘면, 소백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충북 단양은 고구려와 백제·신라가 영토 분쟁을 벌이던 각축장이었습니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영향권에 있었는데, 남하 정책을 펴던 고구려가 가만히 두고 볼 리는 없었겠죠. 고구려군은 백제군을 물리치고 단양 땅을 장악했습니다. 이때 단양은 고구려 적산현(赤山懸)이고 영춘면은 고구려 땅 을아단현(乙阿旦懸)이었다고 합니다.

 

경주를 기반으로 삼국통일을 꿈꾸고 있던 신라는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고구려군을 몰아내고 단양 땅을 차지합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와 신라 간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죠. 신라 진흥왕은 적성(단양)을 공략해 탈취한 뒤 승전을 기념해 단양신라적성비를 세웠지요.

뼈아픈 전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단양군 영춘면 하리에는 서글픈 전쟁의 역사를 대변하는 온달산성이 있습니다.

온달관광지 매표소 입구 왼쪽에 온달산성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나옵니다. 산성을 오르는 중간 중간 정자와 나무의자가 있어 가쁜 숨을 쉬어갈 수 있지요. 그곳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광 또한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줄 만합니다. 성인 걸음으로 30~40분 가량 흙길과 돌계단, 나무계단을 번갈아 오르면 웅장한 모습의 온달산성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온달산성에 올라서면 남한강과 영춘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왜 이곳에 산성을 쌓았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산성을 쌓기 위해 동원된 병사들의 노고는 말할 것도 없겠지요. 고요한 지금과 달리 사력을 다해 적과 맞서 싸운 병사들의 함성과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쟁의 흔적들은 이미 오래전 일이 됐습니다.

온달산성은 해발 427m의 성산 정상부분에 축성된 길이 682m(외측), 532m(내측), 높이 6~8m의 반월형 소규모 석성입니다. 100m 가량 붕괴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완벽하게 남아있어, 1979년 7월 26일 사적 제264호로 지정됐습니다.

산성에는 동문, 남문, 북문 등 3개의 문(門)과 수구(水口)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성내에는 우물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매몰됐다고 합니다. 성 안팎 곳곳에서 삼국시대의 토기 조각을 볼 수 있고, 성벽 바깥에는 사다리꼴 모양의 배수구가 있습니다. 남서쪽 문터의 형식과 동문의 돌출부는 우리나라 고대 성곽중 특이한 양식이어서 주목할 만하다고 합니다. 이 산성이 정확히 언제 축성됐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전문가들은 산성의 구조와 축성법 등을 통해 신라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온달산성 주변 마을의 이름 중에는 전쟁과 관련된 지명이 많습니다. 꼭두방터는 기마병을 막기 위해 진을 치던 곳, 은포동은 고구려군의 돌포가 있던 곳입니다. 군간은 군사(병사)가 경계근무를 서면서 온달산성으로 상황을 보고하던 지역, 쇠점불이 쇄골은 무기를 수리하던 곳, 피바위골은 죽거나 다친 병사들이 흘린 피가 산바위에 많이 묻었다는 데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이밖에 죽은 사람을 모두 매장할 수 없어 돌로 무덤을 만들었다고 해서 돌무지골, 칼을 겨누다가 다친 부상병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함께 살았다고 해서 안이골, 한쪽 골짜기로만 진격하다 집중공격을 받을 것을 우려해 여러 곳으로 나눠 진격했다고 해서 분산골이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합니다.

돌을 쌓아 만든 이 산성의 이름이 왜 ‘온달’일까요? 가장 대표적인 설화는 한국사람 대부분 알고 있는 고구려의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에 나오는 그 온달과 관련된 것입니다.

고려시대 지식인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三國史記)〉 제45권 열전 제5 ‘온달’조에 온달산성과 관련된 내용이 나옵니다.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인 온달은 590년 평원왕이 죽은 후 처남인 영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왕을 알현하고 평소 자신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온달은 영양왕에게 “신라는 우리 한북(漢北, 한강 유역)의 땅을 빼앗아 군(郡), 현(縣)으로 만들었으므로 백성들은 원통함에 쌓여 아직 부모의 나라를 잊어버리지 않고 있사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 신에게 군사를 내어주시면, 한 번 나가 싸워 우리의 땅을 회복하겠나이다”라고 아뢰었습니다. 이에 영양왕은 허락하였고, 온달은 그 길로 군사를 이끌고 떠날 때 “내 계립현(立峴, 현 문경)과 죽령(竹嶺)의 서쪽 땅을 우리 땅으로 돌리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맹세했다고 합니다.

맹세를 하고 떠난 온달은 아단성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맙니다. 이에 온달의 장례를 치르고자 그의 시신을 넣어 둔 관을 옮기려고 했으나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온달장군이 출정을 하면서 맹세한 바를 지키지 못한 한 때문이라고 여기고 그의 아내인 평강공주를 모셔왔습니다. 평강공주가 온달의 관을 어루만지면서 “생사가 이미 결판났으니, 마음 놓고 돌아갑시다”고 하니, 비로소 관이 움직여 장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영양왕이 크게 통곡했다고 하니, 온달이 고구려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특히 ‘고구려 국민 바보’ 취급을 받았던 자신과 결혼해, 자신을 고구려의 영웅으로 만들어 준 평강공주에 대한 지극한 사랑도 엿볼 수 있습니다. 온달산성에 올라 서서 푸르게 흐르는 남한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지막 가는 길을 아내와 함께 하고팠던 온달의 마음이 겨울의 칼바람도 녹여버리는 잔잔한 감동으로 가슴 속 깊이 밀려옵니다.

평민 바보 온달과 왕족 평강공주는 어떻게 부부의 연을 맺게 됐을까요? 고구려 25대 왕인 평원왕에게는 훗날 영양왕이 된 맏아들 원, 영류왕 건무, 보장왕의 아버지인 태양, 그리고 유명한 울보 평강공주 등 네 명의 자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평원왕은 평강공주의 눈물보를 멈추게 하기 위해 “자꾸 울어 좋은 데 시집 보낼 수가 없겠다.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엄포를 놓았죠.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성 주변에 살았던 온달은 집이 아주 가난해 항상 떨어진 옷과 신을 신고 다녔고, 남들이 놀려도 항상 웃으면서 받아 넘겨, 바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얼마나 유명했으면 왕이 알 정도였을까요.

평강공주가 16살이 되자 평원왕은 당시 권력을 가진 상부 고씨 집안의 아들과 혼인을 시키려고 했는데, 평강공주는 고씨 집안으로 시집갈 생각이 없었죠. 그래서 아버지에게 “대왕께서는 항상 저를 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하시고서는, 이제 와서 어찌 다른 이에게 시집 보내려 하십니까. 보통 사람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하는데, 대왕께서 거짓말을 하신다면 누가 왕명을 따르오리까. 저는 온달에게 시집을 가겠습니다”라고 고집을 부렸답니다.

이 말을 들은 평원왕은 크게 역정을 내면서 “정녕 네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내 딸이 아니다.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고 했죠. 이에 금팔지를 갖고 궁궐을 나온 평강공주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온달의 집에 이르러, 온달과 혼인합니다. 이때부터 평강공주는 온달이 무예를 배우고 글을 배울 수 있도록 내조를 합니다. 열심히 무예를 익혀 늠름한 무사로 거듭난 온달은 사냥대회에서 평원왕의 눈에 들어 군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후 승승장구하던 온달은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러 갔다가 아단성에서 최후를 맞이하죠.

온달장군이 전사한 아단성을 두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아단성이 단양 온달산성이라는 설과 서울의 아차산성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가 어디서 전사했든 중요한 건 그의 이름이 붙은 온달산성이 우리에게 전해져 오고 있고, 그와 관련된 설화가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는 겁니다. 잊혀져 가는 우리 선조들의 무용담과 사랑이야기를 이 시대에 되살려 후대에 전하는 일도 우리의 몫이 아닐까요.

온달산성을 본 뒤에는 온달관광지 내에 있는 온달동굴과 드라마 세트장을 둘러봐도 좋을 듯 합니다. 그리고 인근에 위치한 천태종 총본산 구인사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향산리 3층 석탑에서 전쟁으로 인해 생을 마감한 온달장군을 비롯한 유주무주 고혼의 극락왕생을 기원해 보면 어떨까요.

 

 

 

▲ 하늘에서 내려다 본 온달산성.〈사진제공=단양군청>

 

▲ 온달산성 내 유구.
▲ 온달산성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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