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은 실크로드 문명의 거대한 결정판”

 나이 서른 즈음에 석굴암에 간 적이 있었다. 새해 첫 일출을 보기 위해 어둠을 밟고 올라갔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석굴암 앞마당을 가득 채웠고, 어둑한 석굴 안에서도 절을 올리고 기도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동해를 향해 열려 있는 마당에서 시려 오는 두 발을 툭툭 부딪치고 입김을 호호 불며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해가 떠오를 때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토해냈다. 그렇게 새해를 맞았고 그 감동은 오랫동안 가슴 속에 살아 있었다.

석굴암의 진면목을 64개의 테마로 장중하게 써 내려간 윤범모 장편시집 ‘토함산 석굴암’. 이 시집을 읽으면 대부분 ‘아, 경주에 가고 싶다’ 내지는 ‘석굴암이 그런 곳이었어?’ 하는 독백을 하게 될 것이다. 석굴암의 예술적 가치는 물론 문화사적 의미와 건축학, 과학적 묘미까지 두루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 현장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일게 된다. 64개의 테마로 구성된 장편시집 ‘토함산 석굴암’, 윤범모 시인은 어떤 인연으로 이런 웅숭깊은 시를 썼을까? 새해 새아침, 윤범모 시인을 만났다.
편집자

64편 테마로 창건 배경과 가치 되살려
다양한 각도 조명하는 창작품 양산돼야


 

-시집의 후기를 보면 첫 문장이 ‘토함산 석굴암은 평생의 숙제였다’입니다. 무슨 뜻인지요?

“후기에 약술했듯이 석굴암을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때 교과서에 실린 기행문이었습니다. 거기에 석굴암 본존상은 맥박이 뛰고 따스한 체온이 흐른다고 했는데, 저는 그것을 아주 감동적으로 받아들이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수학여행을 가서 본존상을 만져 보았는데, 아주 차가왔어요. 교과서에 나온 ‘따스한 체온’과는 전혀 다른 데 충격을 받았고 좌절했지요. 젊은 시절 불교미술사를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때 석굴암과 ‘맞대결’을 하고자 경주로 찾아 갔었습니다. 석굴암 본존불 앞에서 갈등의 시간을 보냈는데, 어느 순간 부처님의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을 세 번째 손가락 위로 살짝 포개져 있는 것이 저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로부터 석굴암에 대한 공부는 시작됐습니다. 거기에다 실크로드 문화 유적 현장을 샅샅이 답사했고, 오지 여행을 제법 많이 다닌 경험이 석굴암의 정체성을 규명하고 그 가치를 가늠하는데 큰 힘이 됐습니다.”

-그렇다면 석굴암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시게 된 건지요?

“실크로드를 수차례 답사하면서 석굴암은 실크로드의 종착점에 이룩된 거대한 결정판이라는 확신을 하게 됐습니다. 1300여 년 전 동서 문화교류의 꽃이었고, 종교와 기술(과학)과 예술의 통섭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석굴암이 신라의 독창적인 문화 배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실크로드의 활발한 문화교류 대장정이 신라의 도읍 경주에 까지 이르러 하나의 걸작을 탄생시킨 거죠.”

-시집의 구성이 매우 입체적입니다. 뜻밖에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석굴암 ‘약탈’에 대한 음모에서 시작되고 있더군요.

“석굴암 이야기는 얼마든지 흥미진진할 수 있지만, 자칫 논문이나 문화해설서 등으로 빠지기 쉽기도 합니다. 물론 소설로도 나왔고 다양한 스토리텔링이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석굴암을 다양하게 이해하고 제대로 알게 하는 장치는 아주 미흡한 실정입니다. 예를 들면 석굴암 박물관을 만들어 조성배경과 기법, 세부적인 의미구조, 전승과정, 종교성 등을 고르게 알려주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한국의 정신을 담고 있는 대표작으로 꼽으면서도 정작 그 가치를 알리는 데는 소홀한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일제의 수탈 음모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제목을 굳이 석굴암만이 아닌 ‘토함산 석굴암’으로 한 것도 의도가 있어 보입니다.

“물론입니다. 토함산은 오악 가운데 동악(東岳)으로 신이 사는 산으로 숭배되어 온 성산입니다. 신라의 성지이고 실크로드 문명교류의 종착지입니다. 석탈해 왕의 사당이 있던 요내정의 의미로부터 신라의 역사와 정신세계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토함산 자체가 중요한 성역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석굴암은 동굴사원의 형태인데, 돈황의 많은 석굴사원과는 다릅니다. 돌을 파고 들어간 석굴이 아니라 인공으로 만든 석굴이니까요. 그렇다면 인공석굴사원은 경주 시내에 지어도 되는데 왜 하필 산중턱에 조성했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에 대한 답이 성역으로서의 토함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함산과 석굴암은 일체적 의미를 가지며, 우리에게 보다 크고 넓은 문화동력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겁니다.”

-시집에서는 8세기 경주의 모습을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참으로 활기차고 뭔가 꿈틀대는 기운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석굴암 불사가 이뤄졌다는 개연성도 충분해 보이고요.

“그때 경주 거리에 낙타가 어슬렁거리고 다녔음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요. 저 먼 사막길을 통해 서역의 문물을 배달한 짐꾼이 낙타였으니 서라벌 거리에 낙타가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죠. 낙타 등에 실려 온 문물 가운데는 별별 진귀한 것이 많았을 것이고, 서적 또한 중요한 물품이었을 겁니다.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에 기술된 붓다가야의 정각상 치수와 석굴암 본존불의 치수가 일치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문물교류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시집은 후반부로 갈수록 클라이막스를 이루고 있습니다. 6부에서는 석굴에 배치된 권속들의 조각을 읽으면서 깨우치는 무한감동을, 7부에서는 본존상의 조성 과정과 의미를 풀고 있으며, 8부에서는 드디어 석굴암 점안식까지 묘사되고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시적 상상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겠지만, 석굴암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융합하기도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많은 연구 자료와 저 나름대로의 해석이 용해되었지만, 일일이 그 전거를 밝힐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작업이 석굴암의 가치를 국제무대에서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뮤지컬이든 영화든 다큐든 다양한 각도에서 우리의 문화유산을 읽고 이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찬란한 문화유산을 가진 민족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과거’를 가졌다는 것만을 자랑 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과거를 현재화 하여 미래의 에너지로 계승해 나가는 노력이 없으면, 퇴보하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문화원형은 그것을 응용한 새로운 문화로 진화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광규 시인은 〈토함산 석굴암〉을 보고 “이런 시집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8세기 김대성이 발원하여 세워진 석굴암을 21세기의 윤범모 시인이 한 권의 시집으로 재건축 했듯, 우리 역사속의 다양한 문화원형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재창조 되는 한 해가 되길 기대해 본다.

 

시집 속의 시 한편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신라 땅으로

네가 있으므로 내가 있네
내가 있으므로 네가 있네

인도에서 태어난 깨달음의 진리
설산(雪山)을 넘어 사막을 건너
중국 대륙을 흔드는구나
시절 인연은 새로운 땅
새로운 산천초목을 향하여 길을 떠나는구나

천축의 정각상
불상 중의 불상
바로 여래의 진실이 담긴 불상의 범본
천축 땅도 세월이 흐르면서 불법의 기운이 바닥에 떨어질 운명
인연은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지
천축의 정각상
이를 영원히 모셔갈 나라는 따로 있네
해 뜨는 나라
동해를 마주하고 있는 토함산의 신라
게서 여래의 정각상을 만날 수 있게 되리

신라의 토함산
천축 붓다가야의 정각을 모시고자 기운이 가득하네
동방의 나라에 정각의 모습을 세우자
불국토 중심에 묘상을 세우자

토함산
태양을 머금고 새로운 시대를 만지고 있구나
깨달음의 원형을 모셔 오는구나

 

윤 범 모 시인은…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뉴욕대 대학원 예술행정학과를 수료하고 플로리다대학교 연구교수로 있었다.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미술평론이 당선되어 미술평론가, 2008년 ‘시와 시학’ 신춘문예에 시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사)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가천대학교 예술대학교수. 시집 〈불법체류자〉외 다수를 냈고, 미술평론가로서 〈김복진 연구〉외 다수의 연구서와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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