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단ㆍ스님 청렴ㆍ도덕성 바탕돼야 힘 실려…'개인 완성' 넘어 '사회 완성' 인식 넓혀야

신년좌담-역할 커진 불교시민사회단체 방향을 모색한다.

최근 조계종의 거친 행보가 멈출 줄 모른다. 그 바탕에는 파계가 깔려 있고, 세속화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때문에 출가와 출가ㆍ출가와 재가ㆍ재가와 재가가 서로를 비난하고, 소송을 하며 얼굴을 붉히는 일이 빈번하다. 이런 행태는 불교 인구 급감의 원인이다. 그 어느 때보다 불교시민사회단체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이다. 본지는 신년을 맞아 역할이 커진 불교계시민사회단체의 과거ㆍ현재와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해 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구랍 18일 본지 사무실에서 진행된 좌담에는 박경준 동국대 교수, 이도흠 한양대 교수, 이찬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윤남진 NGO리서치연구소장이 참여했다.
편집자

스님 리더 빠지면 무기력해지고
조계종 범계 문제로 제 역할 못해
정부 압박에 취약해지는 악순환


불교, 21세기 한국사회와
생명ㆍ평화ㆍ정의 공유하며
출재가 떠나 조직ㆍ체계화해야


▲ 불교시민사회단체의 방향에 대해 박경준ㆍ이도흠ㆍ이찬수 교수, 윤남진 소장(왼쪽부터)이 좌담을 나누고 있다.

윤남진(이하 윤): 불교시민사회단체에 대해 이야기 해 보기 전에 우선 시민사회단체에 대한 개념과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사회’가 가지고 있는 역할과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습니다. 

이찬수(이하 찬): 서양에서 시민은 부르주아처럼 경제적 생산주체로 시작되었다가 정치적 주체성을 확보하면서 시민의식이 생겨났습니다. ‘시민’이라는 말의 개념을 경제적 생산주체이기도 하면서 정치적 참여주체라고 정리할 수 있겠네요.

이도흠(이하 흠): 17세기 유럽에서 시민사회가 등장하면서 공공영역이 형성됐습니다. 그 와중에 공공영역에서 토론과 합의가 나타나게 되면서 시민사회가 나름대로의 권력을 형성하게 됐죠. 이런 흐름 속에 혁명과 시민운동이라는 역사적 계기를 통해 조금 더 정부와 맞설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여기에 자본주의의 발전까지 결합되니 자본ㆍ시민ㆍ권력(또는 정부) 이 세 가지가 소위 삼발이처럼 균형관계를 이루게 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시민사회 성장은 18~19세기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본격적으로는 3ㆍ1운동 이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미약했고, 실질적으로 정부와 어느 정도 맞설 수 있게 된 것은 1987년 이후라고 봐야겠죠. 이때부터 본격적인 시민사회단체로 발전하게 됐고, 정부와 맞서 나름대로 시민의 요구사항과 이해관계를 반영하거나, 정부의 문제점이나 부조리(비리) 등을 비판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압도적으로 강한 정부에 대해 조금의 견제 역할을 하는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시민사회단체도 마찬가지고요.

윤: 시민사회단체에 대해 불교 교리적 측면으로 접근해 본다면 어떤 연원을 찾을 수 있을까요?

박경준(이하 박): 우선 막스 베버가 불교에는 시민이나 국가ㆍ인권 등의 개념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비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불교의 업보(카르마) 때문에 생긴 오해인 것 같습니다. 물론 불교인들도 업 사상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해서 막스 베버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있죠. 막스 베버는 불교의 업을 개인의 운명은 자기 자신만의 업에 의해 규정된다는 매우 폐쇄적이 사고방식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대승열반경〉에는 나의 운명이 내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규정된 것이 아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 네 가지는 사대(四大, 세상 만물을 구성하는 땅ㆍ물ㆍ불ㆍ바람), 토지, 인민, 시절입니다.

첫 번째 ‘사대’를 요즘 의미로 보면 기후변화 문제 등 우리가 자연환경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토지’입니다. 아프리카의 척박한 땅에서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실질적으로 수확을 얻기 힘들죠. 이에 반해 토지가 비옥하면 조금만 노력해도 수확을 많이 거둘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인민’은 많은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고, 마지막 ‘시절’은 시대라고 생각할 수 있죠. 조선시대나 한국전쟁 때 태어났다면 영향을 받았겠죠.

이를 바탕으로 막스 베버의 견해와는 다르게 업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정화와 선업을 쌓는 것도 필요하지만 다른 영향도 받기 때문에 이것을 달리 말하면 오늘날 시민사회 운동에 대한 교리적 기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십이연기법’도 예로 들 수 있겠네요. 모든 사회문제에도 원인과 조건, 결과가 있을 것이고 우리가 통찰ㆍ분석해서 힘을 모았을 때 여러 가지 문제가 해결 되듯이, 사회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찬: 박 교수님의 네 가지 결정 사항에 정말 공감이 가는군요. 저도 불교공부를 하는 입장에서 윤회를 너무 개인 영혼의 연결 수준으로만 생각하고, 자꾸 사회성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불교 윤리적으로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것을 적극적으로 해석해 불자 개개인에게 알려줘 연대감과 책임감을 계속 일깨워주는 작업을 하면, 불교적 지평을 열어주는 새로운 이론적 장치가 마련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윤: 우리나라 시민사회영역은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아래로부터 개혁의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불교 쪽으로 생각하면 첫 모범사례라고 생각하는 사건이 94년 종단개혁입니다. 그 이전에 1991년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인 월주 스님이 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을 만들었죠. 시민운동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스님이 총무원장이 되면서 사회적 참여가 제도의 틀 안에서 활성화 됐다고 할 수 있죠. 1998년 월주 스님 3선 문제로 터진 조계종의 내부 분규에 대응하면서 교단개혁을 주장하며 설립된 단체가 참여불교재가연대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새롭게 변화된 국면에 따라 불교시민사회 영역으로 흘러간 것 같네요. 비슷한 시기에 도법 스님이 중심이 돼 사부대중이 함께 하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게 현재의 ‘인드라망 생명공동체’죠. 주로 생명평화운동과 환경문제를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또 이 과정에서 이웃종교와 함께 연대를 하게 됐죠. 수경ㆍ도법 스님이 늘 목사ㆍ신부님과 함께 활동을 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세력이 약해지게 됐는데, 그 이유를 진단해 봐야할 것 같네요.

흠: 여러 가지 문제점 중에 가장 큰 것은 명망가 중심이라는 점입니다. 수경ㆍ도법 스님이 4대강 반대나 새만금 사업 반대에 일부분 영향을 끼쳤고, 성과도 거뒀습니다. 하지만 수경 스님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잠적을 해버리자 불교환경연대가 무력해지는 상황이 됐죠. 결국 불교계 시민운동이 조직화나 체계화 부분에서 미성숙했던 것이죠. 그리고 도법 스님도 조계종단으로 들어가 실질적인 2인자가 되다 보니 제도권화 돼 버렸죠. 당시 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에 속한 20여 개 단체를 포함해서 말이죠.

두 번째로 인적관계에 상당히 취약합니다. 불교시민사회단체는 종단과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견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친분 있는 스님, 지인들 때문에 논조가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교를 떠나 한국사회에서는 자기 이념을 바탕으로 목숨을 걸면서 일을 하다가도 일면식이 있는 사람이 하지 말라고 하면 쉽게 포기를 하곤 합니다. 또 판이 좁다는 한계도 있어요.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이에요. 인적관계가 시민사회운동의 가장 큰 장애요소인 것 같습니다. 개인과 집단의 관계, 종단과 시민단체의 관계 등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박: 그 문제에는 단순하게 인적 관계보다도 먹고 사는 문제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 측면도 있기에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시민사회단체라는 게 몇몇 명망가와 활동가 뿐 만아니라 이러한 활동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사람들의 저변이 확대돼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아직 취약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또 불교는 사회적 실천과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작 이웃종교에 비해 많이 부족합니다.

윤: 지금 말씀하신 것은 전문 활동가들이 스스로 자립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만한 여건이 되어있지 않고, 전문 활동가들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강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겠는데요. 저변이 넓어지면 자기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야 하는데 그것을 전문 활동가나 단체에 위임해 버리는 식의 관계가 되고 있지 않나 싶네요.

흠: 그 말도 맞지만 지금까지 쌍용차 사태나 세월호 사건 등을 봤을 때 불교의 활동은 이웃종교에 비해 아주 미약했습니다. 사회적 문제에 대해 거의 활동을 안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활동은 재가불자 100명 보다 스님 한 분의 힘이 더 큽니다. 하지만 막상 현장에는 스님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죠. 이 같은 현상은 스님에게 자율권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나 신부님은 본인이 교회나 성당을 가지면 어느 정도 재정적으로 자율권이 있는데, 스님들은 당장 현장에 오는 순간 지원이 끊어질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재정적으로 상당히 취약하죠. 이런 식으로 스님들이 사회적인 활동을 많이 하려면 재정적으로 독립하지 않으면 상당히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찬: 그런 상황은 한국사회 어디나 다 비슷하지 않을까요?

흠: 불교계는 훨씬 더 열악하다고 생각합니다.

찬: 정서적 차이 때문인지 다르게 느껴지긴 합니다. 시민사회활동에 명망가 중심, 생계 문제 등의 요인이 작용하면서도 개인의 인간관계 때문에 하던 일도 못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게 들렸습니다. 한국사회라면 그런 문화는 어디에나 있죠. 그 말을 들으면서 조금 큰 이야기로 비약하는지 모르겠지만 개신교나 가톨릭은 대체로 서구사회의 이원론적인 사상에서 탄생된 종교다보니 이른바 세속화를 거치면서 현실 너머 초월의 세계가 삭제되고 현실만 남게 됐죠.

과거 신이나 교황, 주교의 수직적 통제를 받던 봉건사회 시스템이 사라지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체성이 확보됐어요. 그래서 다시 옛날 종교의 자리까지 올라가는 게 근대국가의 체제에서 나타나는데, 오히려 수직적 이원론적인 사회가 서구에서 문화적으로 점점 해체돼 가면서 사람들의 정치적 상승 욕구가 상대적으로 훨씬 커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불교와 같은 종교는 대체로 이원론에 약하고, 수직적 상승 욕구도 약합니다. 그러다 보니 옆에서 친분이 있는 사람이 잘못한다고 해도 그냥 넘어가는 문화가 더 크게 작용하지 않나 싶어요.

그런데 제가 유심히 관찰하면서 내린 결론은 개신교권 사람들은 삭제되었던 초월이 사실은 자기 안에 있다는 자긍심으로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배타성으로 나타나거든요. 굳이 비교하자면 상대적으로 경제적인 문제나 인간관계의 영향을 덜 받게 된다는 말이죠. 배타적이면서도 열정적이고, 명망가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완전히 휘둘리지 않는 자기 주체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한편으로는 시민운동을 보다 열정적으로 하게 되는 보이지 않는 원동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현상이 사회개혁적 형태로 좋게 나타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박: 불교시민사회운동을 보면 4대강 사업 문제 때문에 문수 스님이 소신공양을 했고, 그 사건이 기점이 돼 그 이후 불교사회운동에 변화가 생긴 것 같습니다.

흠: 문수 스님 소신공양은 당시 전 불자들에게 충격이었죠. 수경 스님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보는데, 잠적을 하게 되는 한 원인이 됐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불교계단체와 조계종단과의 관계가 바뀌었죠. 그 전까지만 해도 불교계가 힘을 모아 정부에 맞서 4대강 반대 운동을 해왔고, 불교계에서도 전폭적인 지원과 지지를 했습니다. 하지만 문수 스님 소신공양을 계기로 조계종단과 불교환경연대가 대립을 하는 구조가 돼 버렸죠. 그 이유는 처음 문수 스님의 장례가 조계종단장으로 치러질 예정이었다가 갑자기 은해사교구장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정부의 압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추측이 됩니다. 그로 인해 조계종단과 대척관계가 돼 버렸죠. 그리고 현 자승 총무원장의 범계와 비리 의혹이 증가했고, 그와 함께 지도층 승려까지도 비슷한 의혹이 제기되니 상황이 지금까지 온 것이죠.

윤: 자승 총무원장 체제가 잘 관리가 됐으면 괜찮겠는데 잘 관리가 안됐죠.

흠: 그래서 원래 불교시민사회단체의 전선이 정권 내지 자본과 맞섰는데 이제는 종단하고 맞서는 형국이 된 거죠, 그 와중에 불교시민사회단체가 여러 곳으로 늘어났습니다. 정의평화불교연대의 경우 문수 스님 소신공양을 계기로 태동한 만큼 종단 문제 뿐 아니라 사회적 문제를 포괄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종단의 범계 문제가 너무 불거지다보니 그 문제부터 거론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또 2014년 바른불교재가모임과 올해 3월 창립 예정인 신대승불교운동 등이 생겨났거나, 생길 예정입니다. 이에 반해 종단은 거꾸로 자승 총무원장의 범계 의혹이 많다 보니 정부의 압박에 대해 상당히 취약해지는 악순환이 계속 일어나게 된 것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얽히고설킨 관계가 됐네요.

윤: 그렇게 보면 종교가 권력에 취약해져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웃종교는 모르겠지만 불교계는 스님 개인의 청렴성이나 도덕성에 대해 흠집이 있으면 잘 관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더 취약합니다. 정부가 보수화 되고, 국정원이 자꾸 등장하는 순간 약점이 잡히게 되는 거죠. 이런 상황이 되면 시민사회단체가 사회영역으로 쏟아야 할 에너지를 자꾸 안으로 쏟게 되는 겁니다.

찬: 일단 시민사회운동은 규모가 작더라도 순수하게 자발적으로 움직여야겠죠. 불교와 다르게 가톨릭은 세계적ㆍ유기적 조직이다 보니 정부나 권력이 눈치를 보는 경향이 있고, 개신교는 조직성은 떨어지더라도 어쨌든 선거 때 표로 바로 연결된다는 경계의식이 강해서 조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건데 한국의 불교는 청렴성과 도덕성을 무기로 해야 하는데, 만약 지도자들이 그런 범계 행위가 있거나, 그것을 쉬쉬하며 정부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면서 비판하지 못하면 시민사회운동의 동력이 나올 곳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불교 내 시민사회단체들도 종단으로부터 지원받는 것을 지양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그렇게 지원을 받으면 비영리조직이라고는 말할 수는 있지만, 시민운동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게 됩니다.

윤: 과거에 참여불교재가연대가 자승 총무원장 초임 시절 책 발간을 명분으로 지원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요. 회원관리 같은 기본에 충실하지 않고, 손쉬운 방법을 택한 건 아닌지 하는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것은 시민사회단체로서 좋지 않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는 사이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게 참 어렵죠. 개신교에서는 최근 교회개혁실천연대라는 단체가 생겨서 ‘작은 교회’ 운동을 한다고 하던데요?

찬: 개신교는 워낙 교파가 많고, 시민운동이라고 규정하기 힘든 단체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계열에 근원을 둔 시민운동단체가 개신교의 대형교회의 권력화에 끊임없이 비판하고 도전하면서 교회의 타락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이들 단체는 교회의 부자세습과 재정 비리를 비판합니다. 또 목사들이 조금 가난해지더라도 의도적으로 신자 수 20~30명 이내를 추구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우리나라의 사회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전체 인구수에 비해 개신교계 시민운동이 활성화 돼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지속성은 보여준다고 봅니다.

흠: 불교계시민사회단체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 한국 국민들이 처한 현실에서 대안의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합니다. 결국 21세기 불교가 지향할 가치이면서도 한국사회와 공유해야 하는 것이 생명ㆍ평화ㆍ정의입니다. 생명은 환경 위기라는 모순에 대한 대안이고, 평화는 전쟁 갈등 뿐 아니라  비정규직 문제 등을 포괄한 구조적 폭력을 없애는 적극적인 평화, 그리고 정의는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생명ㆍ평화ㆍ정의를 포괄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설정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패러다임에 맞게 조직을 체계화해야 합니다. 스님들이 없다면 재가불자들이 조직화ㆍ체계화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지역으로 나가야 합니다. 과거 두레공동체 형태로 말이죠. 이 과정이 모두 맞아 떨어질 때 한국사회를 국민이, 불자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 불교라는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와 목적을 분명하게 체계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까지 불교인들은 개인적인 수행에 치우쳐 있고, 운명을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보고 있습니다. 〈대승열반경〉에 나오는 말씀처럼 내 주변이 온전해져야 나도 온전해 진다라고 하는 발상의 인식에 전환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개인완성만이 아닌 사회완성,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정토건설이라는 측면의 의식들을 길러야 합니다.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질 때 많은 불자들이 시민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죠.

불교가 ‘불국정토 건설’, ‘개인의 완성’도 중요하지만 ‘사회 완성’이라고 하는 인식을 좀 더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는 그야말로 세계화 시대입니다. 단순하게 우리만이 아니라 지구촌 곳곳으로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미 지구촌공생회, 로터스월드, 아름다운동행 등이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우리 불교계에서도 희망적인 활동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2016년 붉은 원숭이 해입니다. 지난해는 불교계 안팎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는데, 새해에는 불교계가 안정되고 불교인들이 보다 냉철하게 자신을 성찰해 불교가 사회의 목탁과 향이 되어 주길 기원합니다.

 

▲ 박경준 교수
▲ 이도흠 교수

 

 

 

 

 

 

 

 

 

 

 

▲ 이찬수 교수
▲ 윤남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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