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맹정진 중요하지만
도반끼리 대화하며
깨우칠 수 있어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는 논쟁을 불자라면 한 번은 들어봤을 것이다. 이 남종 돈오선에 6조 혜능 스님은 “선지식들아, 나는 5조 홍인화상의 회하에서 한 번 듣자 그 말끝에 크게 깨쳐 진여의 본성을 단박에 보았느니라. 그래서 이 가르침의 법을 뒷세상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를 단박 깨쳐서 각기 스스로 마음을 보아 자성을 단박 깨치게 하는 것이다.”라고 이미 수차례 가르친 바 있다.

‘언하대오(言下大悟)’ 즉 말끝에 단박 깨쳤다고 밝혔다. 참선하다가 깨친 것도 아니고 고행하다고 깨친 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스승과 제자가 아니 도반들끼리 말을 나누다가 깨친 것이다. 제자의 표정과 근기를 보면서 법을 한 마디 한 마디 간절한 말을 통해서 전한 것이다. 이렇게 말을 전하기에 말 끝에 깨칠 수 있었다. 5조가 있기에 6조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강화도 전등사의 이름처럼 나의 법의 등이 밝았으니 그 법을 제자에게 전하는 ‘전등(傳燈)’이라는 말이 생겼다.

그런데 요즘 선방을 보면 모두들 앉아서 좌선하며 용맹정진이라는 고행도 마다치 않는다. 상기가 들거나 몸을 다쳐서 나오는 일도 허다하다. 출가승으로서 그렇게라도 애써주니 그 마음을 부처님도 알아주실 것 같다. 하지만 안거를 끝내고 나온 승려들과 대화하다보면 정말 그냥 앉아서 뭘 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그들은 정말 꼿꼿이 앉아만 있었던 것일까? 수행중의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선방 수좌들이 필요한 것은 용맹정진이기보다는 ‘담선(談禪)’이 아닌가 싶다. 선문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5조가 6조한테 전한 것과 같은 그런 담선 말이다. 물론 상근기에 숙세의 공덕과 선업의 업력 그리고 수많은 생활 속 수행이 전제되었을 것이다.

도반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점점 말을 하기 보다는 듣게 된다. 경청하게 된다. 배려도 하게 된다. 말을 자르지 않고 끝까지 듣다보면 어느 순간인가 그들의 의도가 느껴진다. 말을 듣는 게 아니라 점점 보게 된다. 관세음이니 관음(觀音)이라는 말이 그 뜻인지는 몰라도 실제로 그렇다. 그런데 그것만 보이는 건 아닌 듯하다.

말을 나누다보면 도반들의 안목이 보인다. 굳이 나누자면 점을 보는지 선을 보는지 면을 보는지 아니면 종합적으로 입체를 보는지 나아가 좀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보는지, 나아가 전체 면을 손에 잡고 돌려보는지를 문득 문득 알게 된다. 더 한 사람은 너무 멀고 높아져서 입체를 한 점보다도 작게 보는 거대한 안목을 가지고 보기도 한다.

다시 말하자면 한 점만 콕 찝어 말하는 사람, 점점을 이어 억지로 선을 이어서 만드는 사람, 한 면만 보고 그게 다 인양 떠드는 사람, 대충 모든 면을 봤지만 제대로 본 것은 아닌 사람, 제대로 다보고 통찰력있게 자유롭게 선·점·면·입체를 나누어 의미를 전달하는 사람, 그런 말 조차도 작은 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구분되어 보여지기도 한다.

도반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씩 한단계씩 맑고 밝은 정법으로 나아가도록 거드는 것이 도반의 가장 큰 즐거움이 아닌가 싶다. 잘 되면 법보시한 것이 되고 안되도 들어준 보시는 있으니 다 보리행이다. 그게 아니라면 너가 나이기 때문에 누구도 주고 받지 않은 게 된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