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리다

▲ 옛 화비령 아래를 통과하는 동해1터널. 터널 위가 화비령인데 지금은 길이 없다.

‘헌화가’의 고향

신라 성덕왕 때의 일입니다. 성덕왕 재위기간이 691년에서 737년이니,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순정공(純貞公)이라 불리는 관리가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행차가 동해 바다를 따라 올라 가고 있었는데, 마침 봄날이었던가 봅니다. 어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고, 그 옆에는 높은 암벽이 둘러쳐 있는데 하필 석벽에 철쭉이 한 무더기 피어 있었습니다.

순정공의 아내 수로(水路)부인이 그 꽃을 갖고 싶어 “누가 저 꽃 좀 꺾어 줄 수 없는가?”하고 말했는데, 일행들은 “에고, 저 높은 곳을 어떻게 올라가요?”하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부인은 아쉬움이 컸을텐데, 그때 마침 소를 몰고 지나가던 노인이 그 광경을 보고 다가 왔습니다. 그리고는 절벽에 올라가 꽃을 꺾어다 바치고 노래 한 곡을 남기고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노인이 바친 노래는 이렇습니다.

자줏빛 바위 가에
몰고 가던 암소를 놓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 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리다.

이 이야기는 일연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 제2권 ‘기이’편 수로부인 조에 나옵니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를 지으면서 전해오던 민화나 설화 풍의 이야기들을 많이 반영했는데, 그런 이야기들이 역사의 앞에 있건 뒤에 있건 우리 민족의 삶을 비춰주는 아름다운 거울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이 이야기 또한 신라의 푸른 바다와 하늘이 이루어 낸 찬란한 봄날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13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헌화가(獻花歌)’는 한 구절 노래 이상의 의미를 담은 채 연구되고 있습니다.

비화진과 화비령

그렇다면, 이 헌화가의 무대는 어디였을까요?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수로부인에게 꽃을 꺾어 바친 그 바닷가 바위절벽은 과연 어디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국유사〉에는 구체적인 지명이나 위치정보가 없어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학자들은 지금의 경북 삼척시 원덕읍 노곡리의 비화진(飛火津) 마을과 강릉 정동진 인근의 화비령(火飛嶺)이 그 무대였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을 뿐입니다.

공교롭게도 비화진과 화비령은 ‘비’와 ‘화’라는 같은 글자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명의 유래는 서로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비화진 마을은 우리말로 ‘나불메기’라고 하는데 불이 날아다니는 곳이란 뜻입니다. 그곳에 봉화대가 있어서 불꽃이 날아다닌 것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화비령은 〈동국여지승람〉에 ‘강릉부 남쪽 35리에 있으며 영의 흙이 검어서 붉게 탄 것 같은 까닭에 화비령(火飛嶺)이라 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화비령을 불 화(火)자를 피해 꽃 화(花)로 쓰고 있습니다.

전국에 눈 예보가 있던 겨울날, 정동진에서 시작되는 안보등산로를 따라 화비령을 찾아 갔습니다. 안보등산로는 1996년 무장간첩 침투 이후 조성된 정동진과 안인진리 사이의 괘방산과 삼우봉 그리고 이름 없는 산들로 연결되는 산길입니다. 높지 않은 산등성이를 걸으며 동으로는 푸른 바다를 조망하고 서쪽으로는 청학산 너머 백두대간으로 연결되는 산악들을 병풍처럼 감상할 수 있는 코스입니다.

조선 후기의 미수(眉) 허목(許穆 1595~1682)은 그의 기행집에서 “화비령(火飛嶺)의 남쪽에 지명이 정동(正東)이라는 곳이 있는데 동해 가의 작은 산이다. 산은 전부 돌이고 산의 나무는 모두 소나무인데 춘분에 산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해가 한가운데에서 떠오른다. 옛날에는 동해신의 사당이 있었으나, 중고(中古)에 양양(襄陽)으로 옮겼다. 산세가 기이하고 험준하며 신령스러워서 나무 한 그루라도 베면 한 마을에 재앙이 일어나므로 고을 사람들이 신으로 받들어 섬기고 전염병이 돌 때면 그곳에 기도 드린다. 화비는 재의 이름이니 명주(溟州, 강릉의 옛 이름) 남쪽에 있다”라고 소개합니다. 강릉 남쪽으로 정동진과 화비령, 괘방산 등이 한 고을에 모여 있는데 허목의 설명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강감찬 장군과 호랑이 설화

정동진에서 산불감시 초소 옆에 난 계단을 따라 오르니 금방 산등성이에 닿고 그로부터는 외줄기 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갑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겨울을 실감하게 하는데 내려다보이는 동해는 푸르기 그지 없습니다. 이내 183고지에 이르러 잠시 숨을 돌리고 서북쪽을 바라보니 청학산과 괘방산이 이어지는 능선이 가로 누워 있는데 앞쪽이 7번국도이고 그 너머로 동해고속도로가 보입니다.

화비령은 7번국도가 지나는 동해1터널 위쪽입니다. 183고지를 지나면 162고지가 나오고 다시 나아가면 212고지를 지나 삼거리에 이릅니다. 이 무렵에 발아래를 보면 드러난 흙이 검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이 서명하는 대로 흙이 검어 불에 탄 것 같습니다. 이쯤이면 화비령이 가깝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212고지에서 10여 분을 가면 삼거리가 나오고 거기서 왼쪽으로 가면 화비령으로 이어집니다. 오른쪽으로 더 나아가면 당집이 나옵니다.

오늘날 화비령은 그리 높은 고개라 할 수 없지만, 옛날에는 고개에 호랑이가 득실거려 사람들이 넘어 다니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와 관련해 강감찬 장군이 남겼다는 민담이 있습니다. 강감찬 장군이 이 지역 순찰을 왔는데 화비령에 호랑이가 많아 군사들이 두려워하자 여러 장의 부적을 써서 바람에 날리니 이골 저골로 부적이 날아갔고 모든 호랑이가 백두산으로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밤에 울어대는 개구리들 때문에 병사들이 잠을 잘 수 가 없었답니다. 그러자 장군이 벽에 부적을 만들어 붙였는데 바로 개구리 울음이 그쳐졌다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강릉지역 개구리 울음소리가 다른 지역에 비해 이해 적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조그만 당집을 둘러보고 다시 서쪽으로 화비령까지 가는 길은 호젓한 임도입니다. 대부분의 기록에는 화비령의 위치가 지금의 7번국도가 지나는 동해1터널 위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 산등선이 어디에도 화비령이라는 표시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화비령은 이름만 남아 있고 설화와 민담 등이 기록되어 있을 뿐 실체는 사라져 버린 고갯길이 되었습니다.

역사란 기억되어야 하고 그를 위해서 먼저 기록되어야 하지만, 기록된 역사조차 살려내지 못한다면 후손들에게 무엇을 전할 것인지. 지금 화비령에서는 수로부인을 다시 만날 수도 없고, 암소를 몰고 가던 노인을 다시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신라의 어느 아름다운 봄날에 피었던 철쭉꽃이 만들어 낸 지워지지 않을 전설은 남아 있습니다. 터널 위 사라져 버린 길을 생각하며 길이 아닌 길을 따라 국도까지 내려가니 차량들이 천년의 시간을 순식간에 관통하듯 쌩쌩 달립니다.

 

▲ 화비령 동쪽 능선에 자리한 당집.
▲ 화비령 부근의 흙은 불에 탄 것처럼 검다.
▲ 괘방산을 축으로 하는 안보등산로 주변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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