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교하다 신불자 됐지만, 불자여서 멈출 수 없죠”

▲ 이무련 무학봉사신행회장은 "포교를 하다 신용불량자가 됐지만, 포교를 멈출 수 없다"고 말했다.

 30년 넘게 한 분야에 매진한다는 것,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사람들이 꺼려하는 곳에서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일은 더욱 그렇다. 진짜 ‘불자’가 되고 싶어 보살행을 실천하는 불자들이 있다. 엄마의 마음으로 군장병을 만나고 재소자를 만나는 이, 이무련(69) 무학봉사신행회장도 그 중 한사람이다.

“불자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 뿐입니다. 군포교와 재소자 교화는 세세생생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나이가 많다 한들 못할 이유는 없는 거지요.”

2016년 새해가 밝으면 고희를 맞이하는 이 회장이 30년 넘는 세월동안 군법당과 교도소에 다니는 이유는 뭘까. 태어나면서 부모님이 지어 준 ‘이무련’이라는 이름 앞에 성인이 된 후 붙은 ‘불자(佛子)’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이 회장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군과 인연을 맺었다. 그 인연들이 쌓여 군포교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고교 졸업 후 대구의 한 직장에 다닐 무렵, 회사 차원에서 청도 운문산에 나타난 무장공비를 체포하기 위해 활동 중이던 군경을 위문했고, 대구지역 군부대에 김장을 해주러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서울로 온 이 회장은 안보교육 관련 일을 했다. 자연스레 군과 인연을 맺게 됐고, 최전방 부대를 수시로 드나들었다. 이 회장은 “최전방 부대에는 대대급마다 교회는 있는데, 법당이 없는 걸 알고 군포교를 발원했다”고 군포교에 발을 담그게 된 사연을 소개했다.

 안보 교육 계기 군포교

처음엔 안보교육을 갔다가 부대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점심값으로 장병들에게 필요한 축구공이나 빨래 건조기 등을 구입해 전달했다. 군부대에 필요한 물건이면 집에 있는 세탁기도 갖다 줄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정작 자신의 집에는 세탁기가 없다고 했다.

세간살이가 없어도 군포교에 대한 그의 열정은 더 뜨겁게 타올랐다. 장병들이 군법당이 아닌 창고에 불감(佛龕)을 모셔놓고 법회를 하는 걸 보고 마음이 아파 눈물을 여러 번 쏟았다. 조성한지 오래돼 개금이 벗겨진 불상을 보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누구도 개금불사에 관심을 두지 않는 현실이 그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이무련 회장은 “어떤 이들은 상(생색)을 내기 위해 수천만 원이 드는 불사에는 앞다투어 불사금을 내려고 하지만, 군법당에 부처님을 모시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아쉽다”고 속내를 내비쳤다.

그래서 이 회장은 1988년부터 기회가 닿는 대로 군법당을 건립하겠다는 원을 세웠고, 매년 1~2곳의 군법당을 새로 마련해 불자 장병들의 귀의처로 제공하고 있다. 건물을 지을 공간이 없는 군부대에는 부대장의 동의를 얻어 쓰지 않는 공간을 빌려 법당으로 썼다. 불단도 자체적으로 만들어 부처님을 모셨다. 부대 내에 군법당을 조성할 부지가 있으면 블록벽돌로 벽을 쌓고, 조립식 지붕을 덮어 법당으로 사용했다. 때로는 기와를 올린 여법한 법당을 건립하기도 했다. 이 때는 장병들도 법당불사를 도왔다. 목재를 시주받아 법당 건립에 쓰기로 했다.

이 회장은 오전ㆍ오후ㆍ저녁을 가리지 않고 장병들을 위한 법회에 좇아다녔다. 전방부대 초소마다 다니며 장병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다. 그는 불교교리에 대해 해박하지는 않지만, 엄마의 마음으로 장병들에게 법문을 해주었다. 그리고 힘들어 하는 장병이 있으면 먼저 따뜻한 손을 내밀어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부처님오신날 이후 6월에 부대마다 찬불가대회, 독경대회를 열어 포상휴가를 주기도 한다. 그가 가는 군법당마다 장병들이 몰리는 이유 중의 하나다.

 35년째 일요일 군법당서 보내

군포교를 시작한 뒤부터 지금까지 35년 간 매주 일요일 그의 안방은 군법당이었다. 주위에선 그에게 “35년 간 일요일을 잃어버렸다”고 말하지만, 그는 “35년 간 군법당에서 장병들과 놀며 휴식을 취한 것”이라고 했다. 순탄치 않았을 그의 군포교 35년. 이 회장의 호방한 성격과 끈질긴 뚝심이 없었다면 벌써 그만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지금껏 군포교를 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가족과 지인들이다. 이 회장에게는 무남독녀 외동딸이 있다. 그는 딸이 초등학교(당시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군법당에 데리고 다녔다. 4학년 때는 피아노를 가르쳐 군법당에서 법회를 볼 때 찬불가를 연주하게 했다. 그러다 집 인근에 살던 딸의 1년 후배도 함께 군법당에 데리고 다니며 군포교를 했다. 아이들은 전혀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즐겼다고 한다. 아이들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군포교를 이어갔다.

“두 아이만 있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었죠. 뒤에서 잠자는 장병들을 다 깨워서 흥이 나게 해주니 저는 끌고 가기만 하면 됐으니까요. 정말 큰 힘이 됐습니다.”

두 아이는 이무련 회장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딸의 후배는 출가수행자가 됐지만, 딸은 결혼 후 충남 아산에 살면서 매월 한두 번 남편과 자녀를 데리고 서울에 와서 군장병들과 만난다. 이 회장의 어머니도 군법당에 동행해 일을 돕는다. 4대가 군포교에 매진하는 셈이다.

이 회장은 1만 원이 들어오면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2만원을 써야 하는 성격이다. 군법당 갈 때 필요한 돈이 없어 고민할 때는 자신이 운영하는 화랑의 그림이나 도자기가 팔려 충당할 수 있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 일을 한다는 사명감으로 하다보면 아무리 어려운 불사라도 이뤄진다는 걸 절실히 느끼게 됐다고 한다. 이토록 오랫동안 군포교를 했지만, 표창장 한 번 받아본 적 없다. 생색을 내는 것 같아 일부러 알리지도 않았다.

 사비 털어 비용 충당

부처님 법을 전할 수 있고, 그들의 가슴에 부처님 마음이 생기게 해주기 위해서 군법당과 교도소에 간다고 한다. 매월 군법당에 가려면 200만 원 정도 든다. 무학봉사신행회 명의의 후원계좌가 있긴 하지만 매월 들어오는 후원금은 10~ 20만 원 수준. 나머지는 사비와 화주를 해서 충당한다. 그가 매주 가는 법당은 5곳. 1곳은 공양물만 후원해 주면 되지만, 4곳은 직접 가야 한다.

이무련 회장은 군법당을 돌보느라 자신의 원찰에 자주 가지 못한다. 이 회장의 지인들은 그의 집을 두고 ‘불교박물관’이라고 부른다. 군법당에 쓸 물품을 모아놓았다가 필요할 때 가져다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군포교를 하면서 지금껏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지금은 작고한 한 연로한 불자가 그에게 “법사님, 제게 재산이 있다면 돈을 더 보태서 시주를 하고 싶지만 재산이 없어 이렇게 다니면서 불사를 하겠다”면서 시주를 얻어 100만 원을 모아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 불자의 마음에 감동한 그는 더욱 군포교에 매진하게 됐다고 한다.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특히 타 종교를 가진 군인이 군법당 출입을 제한하는 등 방해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자신을 기다리는 불자 장병들을 생각해 참고 견뎠다. 지나온 35년, 때론 그만두고 싶었을 때도 있었다. 주위에서 “칠순을 코 앞에 둔 나이에 무리하지 말라. 이제 좀 쉬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조언하면 마음이 조금 움직이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해야 할 일이 늘어나 그만둘 수 없단다. 특히 군포교는 사비를 털어서 해야 하는 일이기에 선뜻 나서는 사람도 없고, 후원을 정기적으로 해주는 이도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다.

그래도 그는 앞으로 최소 5년은 더 군포교에 매진할 생각이다. 그러면 자신의 뒤를 이어 군포교를 할 사람이 나타날 거라 믿고 있다.

그는 군 포교 못지않게 교도소 포교에도 정성을 쏟고 있다. 이 회장이 교도소 교화를 시작한지도 25년이 흘렀다. 1990년 경 교정위원이 됐다. 그가 교도소 교화에 관심을 갖게 된 건 35년 전 딸이 태어나던 해 오해가 생겨 사기혐의로 구속된 남편을 접견한 게 계기였다.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남편을 접견하러 갔는데 들어갈 수가 없었다. 마침 옆에 매일 새벽마다 아들을 만나러 오는 한 엄마를 보면서 “정말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이 자리에 오는 거구나, 그런 모습을 보고 기회가 된다면 교도소 포교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그에게 “교도소에 수감된 이들은 죄를 지은 사람들인데, 그들에게 뭘 갖다 주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나의 한 마음이 바뀌면, 나 또한 그 자리(교도소)에 갈 수도 있다”고 항변하며 교도소 교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 회장만큼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듯이 한 이도 드물다. 예전에는 스님을 모시고 가서 불교교리를 가르치기도 했지만 지금은 중단하고, 매월 5~6회 교도소를 찾는다. 상담을 한 뒤에는 준비해 간 먹거리를 나눠먹는다. 그는 교도소에 불자 재소자들에게 줄 물품은 가장 좋은 걸로 마련해 간다. 그들에게 정성을 쏟으면 부처님 법을 만난 인연으로 재범을 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갈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출소자 돕다 신용불량자 돼

그토록 교도소 포교에 열정을 쏟았지만, 이무련 회장은 교도소 포교를 하다 신용불량자가 됐다. 출소한 이들이 이 회장을 찾아와 당장 먹고 살 돈과 전세자금 등을 빌려달라고 하면 거절하지 못하고 몇 차례에 걸쳐 집을 담보로 대출을 해줬다. 결국 일부를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된 것. 그때 그는 카드를 다 반납했다. 그랬더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했다. 담보로 제공할 집도 없고, 대출 받을 일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교도소에서 알게 된 재소자들이 출소 후 돈을 빌려 달라고 찾아오는 경우도 없어져 그의 마음은 한결 나아졌다고 한다.

이 회장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집 없이 세 들어 산다. 아랫니 치료가 필요해 치과에 가야 하지만 병원에 갈 시간도 없을뿐더러 치료비가 아까워 주저하고 있다. 그는 “월세면 어떻고 전세 살면 어떻습니까. 내가 사는 집이 내 집이지, 별거 있습니까. 한 푼 있으면 군포교든, 교도소 포교든 어디에도 써야지요”라고 했다.

‘불자 이무련’, 이름 하나만으로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불자로 헛되이 살지 않았음은 분명한 것 같다. 자기가 가진 것을 다 내어주고도 “불자니까, 부처님 일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만족하고 사는 사람.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났지만 보시행을 통해 ‘진정한 불자’로 거듭난 그에게서 ‘보살의 향기’가 그윽하게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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