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거함 노키아가 침몰한 뒤 오히려 기업가 정신과 창업이 만개하고 있다”면서 노키아가 마이크로소프트사에 팔린 후 핀란드에서 노키아의 인재 독점 구도가 허물어진 뒤 새로운 산업 생태계가 빠르게 조성되며 경제가 새롭게 일어나고 있다는 기사를 우리는 접한 적이 있습니다.

이에 꼭 맞는 선어(禪語)가 있습니다. ‘크게 한 번 죽어 다시 새롭게 태어난다’라는 뜻의 ‘대사일번(大死一番) 절후소생(絶後蘇生)’입니다. 즉, 우리 모두 이원적인 분별의 바다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가짜 나’가 완전히 죽어야만 비로소 ‘진짜 나’가 가는 곳마다 주인공으로서의 삶, 즉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삶을 위해서는 살아가는 순간순간 냉철히 살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초심(初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날이 갈수록 종교와 종파를 초월해 초심을 잃어버린 지도자들에 의해 종교계가 내실 없이 점점 더 거대 집단화ㆍ세력화되어가면서 빠르게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언론을 통해 끊임없이 보도되고 있는 구성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철저히 세속적 방식인 고소고발을 포함한 도를 넘는 일련의 다툼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저의 좁은 소견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해결방안 가운데 하나는 구성원 스스로의 치열한 자기반성 노력입니다. 재가와 출가를 불문하고 통찰과 나눔이 둘이 아닌 ‘통보불이(洞布不二)’의 길을 가고자 하는 구성원들 모두 이해득실을 내려놓고 각자 입문 과정에서의 초심을 상기하며 대사일번, 즉 삶의 여정 속에서 틈날 때마다 “과연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이웃과 함께하고 있는가?”, “겉으로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속으로는 명예나 권력이나 재물 등을 탐하는 행위는 아닌가?”를 성찰하며 그동안의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같은 잘못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는다면, 저절로 ‘절후소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엄정하게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중립을 지키는 언론의 역할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언론사 사주의 역할은 바른 정론을 펴는 언론을 후원하는 것 자체로 그 역할을 다 하는 것이지, 언론사를 활용해 자신의 이익을 반영하거나 청탁에 의해 사실을 왜곡 보도해서는 안됩니다. 즉 언론 기사는 전적으로 독립적인 편집장의 지휘 감독아래 긍정적인 기사든 부정적인 기사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독자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또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이의제기도 적극적으로 수용해 언제든지 반론보도도 함께 다루어 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언론사를 등에 업고 경거망동하는 구성원들이 급격히 줄어들겠지요.

참고로 저의 스승이셨던 종달 이희익 선사께서는 1961년 ‘불교신문’의 전신인 ‘대한불교’ 신문의 주간을 지내셨던 경험을 바탕으로 1988년 당시 새롭게 태어난 ‘법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불교언론의 특수성을 살려야 한다’는 다음과 같은 뼈있는 조언을 하셨습니다. “기자 정신을 살려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정신으로 불교계를 이끌어가야 한다”면서 아울러 “불교언론이 종단이나 단체의 선전매체로 이용되면 그 신문은 죽게 된다”라는 당부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구성원 모두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몸담기 시작할 때의 초심을 잘 유지만 한다면 언론 지면이 거의 다 일반인들의 얼굴까지도 활짝 펴게 하는 긍정적인 기사로 도배가 되겠지요.

또한 구성원들 모두 이런 마음자세라면 종교계뿐만이 아니라 민생정치를 뒷전으로 하고 있는 정치계를 포함해 그 어떤 단체이든, 안고 있는 적지 않은 문제들이 처음부터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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