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사 기도 후 삶 ‘활짝’… 염불·사경하면 ‘행복’

 

역경 이겨내기 위해 찾아간 구인사
늦깎이 불자, 평생 수행하는 삶 서원

43년 전 수산가공업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가던 중 갑자기 물량이 줄어들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마침 그때 이웃가게 지인이 안 좋은 소식을 들었다며 단양 구인사에 가면 ‘산 부처님’이 계신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이라고 생각했다. 곧바로 짐을 꾸려 경남 진해를 출발해 부산을 거쳐 단양에 내렸다. 이불 등 커다란 짐을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내리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가까운 여관방에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날이 밝자마자 구인사행 버스에 올랐다. 그때는 길이 좁고 험해서 산비탈을 지날 때면 아찔아찔하였다. 시간도 꽤 걸렸다. 구인사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에는 맑은 시냇물이 흘렀다. 또한 절 근처에 인가도 별로 없었다. 초가집 몇 채 뿐이었다. 절이 가까워 오니 개굴개굴하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절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귀에 들린 것은 “관세음보살”하는 염불소리였다.

그때는 낮에도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했는지 4박5일 기도하고 나면 자기 목소리 내는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첫날 오후 7시에 종정 스님(상월원각대조사님)을 친견했을 때, 그때의 대조사님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우리 곁에 계시는 것 같고, 법당에 모셔진 그 모습 그대로였다. 대조사님은 소문대로 ‘생불(生佛)’의 모습이었다. 나는 마치 친정아버지의 모습인 것 마냥 늘 생각했다.

나는 삼보당에 들어갈 때는 호기심에 가장 먼저 입장했고, 개인 친견 때는 제일 뒤에서 마지막에 대조사님을 친견했다. 하지만 나이 서른아홉 먹을 때까지 어렸을 적 어른들과 절에 가봤을 뿐이었기에 조심스러웠다. 불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기도실에는 좀 소란한 일도 있었다. 잡신이 떨어져 나간다고 자기와의 싸움이 말이 아니었다. 나는 당연한 걸로 알았다. 그런 사람들은 기도 전 옆 사람에게 미리 말하기도 했다. 나도 부산서 왔다는 보살님이 미리 귀띔을 해주어서 이해하겠다고 했다. 내 기도에 빠지면 옆에서 굿을 해도 몰랐으니까.

대조사님께서는 기도를 시작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 저는 부처님의 변함없는 불제자가 되겠습니다”하고 기도를 마친 뒤에도 이렇게 하라고 하셨다. 또 법당에서 삼배 할 때도 처음과 두 번째는 그대로 하고 세 번째는 반드시 이 염을 올리면서 절을 마치라고 하셨다.

종교에 처음 입문하는 처지라 시키는 대로 하고 무조건 ‘관세음보살’만 염하면 되는 것으로 알았다. 이때는 가을이었다. 동네에서 옥수수를 쪄서 밤이 되면 팔러왔다. 기도를 열심히 하니 시장기가 들었다. 그때 찰옥수수를 사서 먹고 기운을 더 내 열심히 기도하니 꿈인지 기도 중 눈앞에 신작로가 훤히 뚫려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 때는 기도 중에 조금이라도 졸면 누군가 귀에 대고 “일어나” 하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아 놀라서 깨곤 하였다. 주위에서는 종정 스님이 깨우신다는 말이 있었다.

대조사님은 낮에 법당에서 설법을 들려주셨고, 머지않아 구인사에도 관광버스가 들어올 것이라 하셨다. 우리나라 중심인 대전 가까이에 불교대학을 세우신다는 말씀도 하셨다. 그때만 해도 지금 기도실로 올라가는 계단 왼쪽 탑이 있는 자리에는 초가가 있었다. 그 초가에는 노보살님이 한 분 계셨다. 연세가 많으셨던 것 같다. 대조사님 공양과 모든 것을 도우는 분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다.

4박5일 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차 안에서 나도 모르게 평소에 안 부르던 노래를 흥얼거렸다. 내가 생각해도 무슨 내 몸에 변화가 온 것처럼 느껴졌다. 평소 내성적이라 말도 가려서 했으며, 노래는 결혼하고 한 번도 입에서 나온 일이 없었는데 내가 생각해도 희한한 일이었다.

집에 오니 둘째 아들이 학교에서 상을 받아다 놓았다. 기쁜 일이 이어질 예시였는지 기분은 좋았다. 며칠 지나고 나서부터 종정스님 친견 때 말씀대로 좋은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가 가공하던 수산물 물량이 다시 늘어나게 된 것이다. 이후 마음은 항상 구인사에 가 있었다. 그때 아이가 넷이었다.

그해 겨울에 또 구인사를 갔다. 한참 기도를 할 때였는데 지금의 식당 올라가는 오른쪽에 냇가가 있었다. 거기에 큰 물고가 터졌는데 너무나 맑은 물이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물이 모자라서 쌀을 씻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다.

집에 와보니 내가 하는 조그마한 가게에 도둑이 들었는지 문만 따 놓고 그냥 간 것을 발견했다. 맥주안주인 건어물이라서 무겁지도 않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소리 없이 가져갈 수 있는 것인데 물건은 그대로였다.

이듬해 음력설에 세배기도를 위해 구인사에 갔다. 얼마나 눈이 많이 왔던지 절에 올라가는 길에 쌓인 눈이 무릎에 닿을 정도였다. 온 세상이 은색이고 사람들까지도 은색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이때는 정말 신도들이 무아지경으로 기도에 빠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대조사님께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법문을 하셨다.

그해 이른 봄, 건어물을 가지고 부산 도매상에 가는데 물건의 양이 많고, 또 이 물건은 아무에게나 넘길 수 없는 맥주안주여서 특별히 취급하는 곳에만 팔 수 있는 물건이라 걱정이 많이 되었다. 그래서 버스로 이동하면서 얼마나 “관세음보살‘”을 염송하였는지 매달리는 기분으로 정신없이 외웠다. 그런데 문득 편안한 기분이 들면서 “걱정 마”하시는 큰스님의 음성이 별안간 들렸다. 너무 의아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꼭 대조사님의 음성 같았다.

버스가 부산에 도착했다. 짐꾼이 짐을 옮겨 실으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가 이 물건 자기가 전부 사겠다고 했다. 놀라서 보니 그 사람 역시 상회에 물건을 넣는 화주였는데 “어째서 이 물건을 사느냐”고 물으니 서울에서 주문을 받았다고 했다. 그 상회는 가 보지도 않고 현금을 받고 그 자리에서 돌아왔다.

내가 구인사에 다니고부터 언제나 나쁜 일은 비껴가고 좋은 일만 따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얼마 후 청천벽력 같은 비보를 접하게 되었다. 구인사에 발 들이고 다음 해에 대조사님의 열반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슬프다 못해 눈앞이 캄캄한 것 같았다. 일거리가 너무 많아서 열반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43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내 가슴을 후빈다.

이듬해 1975년도에 큰아들이 그 어렵다는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했다. 시골인 진해에서는 합격자가 아들 한 명이었다. 온 동네가 들고 일어났을 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구인사를 찾게 되어 정말 고마웠다. 지인들은 나를 만나면 처음부터 함께 구인사를 가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그러나 늦게나마 다행으로 느낀다.

2003년도에 내 나이 70세에 〈금강경〉 108회, 〈법화경〉 ‘관세음보살 보문품’ 108회씩 한자로 사경을 하였다. 〈금강경〉을 98회째 사경하던 중에 경속의 글이 튀어 올라 춤을 추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나도 춤을 출 것처럼 흥겨웠다. 사경을 1년 가까이 마치고 그 후 〈태백산맥〉 10권을 필사했다. 덕분에 한자 1급, 한자한문지도사 2급과 1급자격증을 획득할 수 있었으며 지금은 금강불교대학(창원 원흥사)에 다니고 있다. 현재 82세의 나이로 2학년에 다니고 있다.

집을 나설 때도, 시험지를 받을 때도 나는 언제나 부처님과 함께하고 있다. 특히 부처님과 관세음보살상을 방안에 두고 〈금강경〉을 사경한 것처럼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딸이 점보는 집에 나를 데리고 갔는데 점쟁이가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그냥 가라고 하기도 했다.

나이에 비해 아픈 곳이라고는 아직 없고, 항상 자식들 잘 되기만 빌고 있다. 열심히 불교공부하고 아이들 한자 선생님을 하면서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부처님 가르침과 대조사님의 좋은 법문을 잊지 않으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매주 목요일 저녁 시간이 기다려진다. 불교대학 시간이~.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