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중생들이 느끼는 근본적인 세 가지 번뇌를 욕심ㆍ분노ㆍ어리석음, 즉 삼독이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도 분노는 다른 것보다 순간적으로 일어나 감정을 절제하기 쉽지 않은데요. 부처님은 분노를 왜 경계해야 하며, 어떻게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을까요?편집자 

한 여종이 있었는데, 항상 주인을 위하여 보리와 콩을 관리하였다. 그때 그 집에 있는 양이 몰래 보리와 콩을 먹어 한 말 정도 축내었다. 그래서 그 여종은 주인에게 꾸중을 들었다. 그 일로 그녀는 양을 미워하여 항상 막대기로 양을 때렸고, 양도 화를 내며 그녀를 들이받곤 하였다.

어느 날 여종은 손에 촛불을 들고 있었다. 양은 그녀의 손에 막대기가 없는 것을 보고, 곧 쫓아와 그녀를 들이받았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촛불을 양 잔등에 던졌다. 양은 뜨거움을 못 견뎌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마침내 그 불은 마을을 태우고 산과 들에까지 번져갔다.

그때 그 산에는 500마리 원숭이가 있었는데, 그 불길을 피할 수가 없어 한꺼번에 타죽고 말았다. 여러 천신들은 그것을 보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성내어 서로 싸우는 사이에는 머물지 말라. 양과 여종이 싸우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과 원숭이가 모두 죽었다.
〈잡보장경〉

성냄은 바로 모든 착한 법을 잃는 근본이요, 온갖 악한 세계에 떨어지는 인연이며, 법요(法樂)의 원수요 선한 마음의 큰 도적이며, 악한 말을 내는 창고요, 재앙과 걱정의 칼이며 도기이다. 만약 도를 닦을 때 ‘이 사람(성낸 사람)이 나를 괴롭게 하고 나와 절친한 사람을 괴롭히고 내 원수를 찬양한다’고 생각하면서 과거에도 그랬을 것이고 미래에도 그랬을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이것을 구뇌(九惱)라고 하며, 그런 까닭에 성을 낸다. 성내려는 생각은 마음을 덮어버리기 때문에 개(蓋)라고 하는데 빨리 그것을 버려 불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
〈제경요집〉

성내는 마음은 좋은 법의 곡식들이 잘 익은 뒤에 내리는 우박과 같아서 좋은 곡식들을 못 쓰게 만든다. 오직 바른 지혜의 눈만이 그 어둠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성내는 마음은 불과 같아서 모든 계율을 부순다. 성을 내면 얼굴빛이 변하는데 그것은 나쁜 빛깔의 인(因)이다. 분노는 큰 도끼와 같아서 능히 법의 다리를 부수고, 마음속에 머무르면 마치 원수의 집에 들어간 것과 같다. 그리고 그것은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한결같은 마음과 바른 행을 모두 부숴버린다. 성내는 마음을 버려라. 자비가 능히 그것을 다스린다. 그리고 고집멸도의 네 가지 진리가 그것을 다스린다. 그것은 지옥으로 가는 길의 제일의 사자이다. 그러므로 오직 선한 사람이나 거룩한 성문이나 법을 들은 사람만이 그것을 버릴 수 있다.
〈정법념처경〉

치열한 번뇌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다. 이 세 가지 번뇌 가운데서도 분노의 번뇌가 가장 심한 것이니, 그 불은 욕계로부터 첫째 선정의 하늘까지 태운다.

성냄을 죽이면 곧 편안해지고 성냄을 죽이면 걱정이 없어진다. 성냄이 독의 뿌리가 되고 성냄이 일체의 선행을 없앤다.
〈지도론〉

마치 성한 불길에 사나운 바람이 불어, 그 불꽃이 숲에 불어 모두 태우는 것처럼 성냄은 불꽃과 같아 남과 자기를 태우나니 그것은 극히 악한 해침이니라. 지혜로운 사람은 성냄과 탐욕을 버리나니 사랑과 평등 닦으면 성냄은 차차 없어지리라.
〈잡보장경〉

성내지 않을 일에 성을 내고 짓지 않아야 할 악을 행하면 그는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그 과보의 고통을 받으리라. 남을 해치면 나도 해침을 받고 남을 원망하면 나도 원망을 받으며, 남을 헐뜯으면 나도 헐뜯음을 받고 남을 때리면 나도 맞는다. 이 어떤 사문이기에 바른 법을 알지 못하고 그 수명도 짧아 촉박한데 또 왜 원수를 맺으려 하는가.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말라. 그리하면 마침내 원한은 그치리라. 참으면 원한은 그치게 되니 이것을 부처님의 법이라 한다.
〈출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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